마음을 가진 AI를 꿈꾸며
새벽 6시, 커피 한 잔과 함께 읽은 신문 기사 하나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연세대 인공감성지능 융합연구센터장 권수영 교수의 "인공감성지능 시대가 온다"라는 글이었다. AI R&D 기획자로 살아가며 늘 고민하던 문제의 해답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인간의 지능은 하나의 단일 능력이 아니라 언어, 수리, 공간, 공감, 대인관계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문제를 해결하고 의미를 창조하는 다차원적 능력이다."
권수영 교수의 이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동안 우리는 AI를 만들면서 무엇을 놓쳤을까? 논리와 추론, 정답을 도출하는 능력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인간다움의 핵심인 감성과 공감 능력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얼마 전 연구소에서 진행하던 AI 프로젝트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완벽한 성능 지표를 자랑하는 AI 모델이었지만, 정작 사용자들은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고 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알 것 같다. 그 AI에게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해 뉴욕타임스에 실린 흥미로운 기고문이 생각났다. AI가 인간의 일터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역설적으로 들렸지만,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장조사, 통계 분석, 편집 같은 하드 스킬은 이미 AI가 인간을 앞서기 시작했다. 반면 의사소통, 협업, 감성지능 같은 소프트 스킬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AI 시대일수록 더욱 중요해지는 인간만의 능력이다.
최근 우리 팀에 새로 합류한 신입 연구원을 보면서도 느꼈다. 기술적 스펙은 완벽했지만, 팀원들과의 소통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반면 기술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뛰어난 공감 능력과 소통 기술을 가진 동료는 모든 프로젝트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기사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은 청소년 통계였다. 13년 연속 자살이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라니. 경쟁과 성과 중심의 교육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와 절망감에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AI에게 감정을 가르치지 못하는 동안, 정작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조차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의 학교는 점수와 등수로 아이들을 평가할 뿐 그들의 감정을 묻거나 마음을 살피는 공간이 아니다."
권수영 교수의 지적이 뼈아팠다. 우리는 AI에게 인간의 지능을 가르치려 하면서, 정작 인간에게는 인간다움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일리노이주는 20여 년 전부터 SEL(사회정서학습)을 법제화해 모든 학교에서 감정 인식, 자기 조절, 공감 능력, 관계 형성을 필수로 교육하고 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학교폭력은 줄어들고 학업 성취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일본도 SEL 기반 '공감 교육'을 적극 시행하고 있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공감 훈련을 실시해 교실 안 신뢰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K-뉴딜과 디지털 대전환을 외치면서도 정작 이런 근본적인 변화에는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계공학 박사이자 R&D 전략을 기획하는 입장에서 몇 가지 방향을 생각해봤다.
첫째, 인간-AI 협업 인터페이스 연구다. 단순히 명령을 내리고 결과를 받는 관계가 아니라, AI가 인간의 감정 상태를 이해하고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이 필요하다.
둘째, AI 기반 교육 혁신이다. SEL을 AI 기술과 융합해 개별 학습자의 감정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조직 내 감성지능 증강 시스템이다. R&D 팀의 창의성과 협업 효율성을 높이는 감성지능 지원 도구 개발이 시급하다.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정(情) 문화와 공동체 의식이 강한 한국의 특성을 살린 '한국형 SEL'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면, 오히려 세계를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범부처 협업을 통해 교육부, 과기정통부, 보건복지부가 손을 잡고 10년 단위의 장기 투자 계획을 세워야 한다. 공학과 심리학, 교육학이 융합된 전문가를 육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퇴근길 차 안에서 신호 대기 중 옆 차를 보니, 운전자가 스마트폰을 보며 AI 어시스턴트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무표정했다. 기계와 대화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AI와 대화하면서도 진정한 소통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올까? AI가 내 마음을 이해하고, 위로해주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진짜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
권수영 교수의 말처럼 "온전한 지능은 좌뇌만이 아니라 우뇌의 감성 역량으로 완성된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똑똑한 AI가 아니라, 마음을 가진 AI를 만들어야 한다.
인공감성지능 시대. 그것은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회복이다. 우리가 만드는 AI가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내일도 새벽 커피와 함께, 이 꿈을 현실로 만들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출처: 권수영, "인공감성지능 시대가 온다", 바이블시론, 2025.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