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에서 배우는 혁신의 진실
어제 밤, 피터 틸의 강연 영상을 보다가 펜을 멈췄다. "경쟁은 패배자를 위한 것"이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20년 가까이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하면서 늘 품어온 의문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정말 혁신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남들과 경쟁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얼마 전, 한 연구개발 사업 평가회에서 겪은 일이다. 10개 과제가 모두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기반 솔루션을 제안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기술 스택, 비슷한 로드맵, 비슷한 목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든 생각이 있었다. 우리는 혁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왜 모두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을까.
틸은 이런 현상을 "모방하는 원숭이"의 본성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따라 하려 한다. 언어를 배울 때도, 문화를 전수받을 때도 모방을 통해서다. 하지만 이 모방 본능이 때로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다.
모든 연구팀이 트렌드를 쫓아가면, 결국 누구도 진정한 차별화를 이루지 못한다. 레스토랑을 창업하는 것과 같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대부분은 망하고, 살아남아도 별다른 수익을 내지 못한다.
"제2의 마크 저커버그는 소셜네트워킹 사이트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제2의 래리 페이지는 검색엔진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틸의 이 말이 핵심이다. 진정한 혁신은 남이 한 것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하지 않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있다. 그는 이를 "0에서 1로"라고 표현한다. 기존의 것을 개선하거나 복제하는 "1에서 n으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페이팔을 창업할 때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결제는 거대한 시장이었지만, 그들은 eBay 파워셀러라는 아주 작은 틈새에 집중했다. 2만 명 정도의 상인들이었지만, 기존 해결책보다 훨씬 나은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35% 시장점유율을 달성했다.
구글도 마찬가지다. 이미 수많은 검색엔진이 있던 시절이었지만, 구글은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을 했다. 사람이 운영하는 검색이 아니라 알고리즘 기반 검색. 페이지랭크라는 혁신적 아이디어가 게임 체인저였다.
20년간 R&D 현장에서 느낀 가장 큰 아쉬움은 이것이다. 우리는 너무 '계획'에 매몰되어 있다. 명확한 로드맵을 그리고, 예측 가능한 마일스톤을 설정하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진정한 혁신은 예측 가능한 계획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용자가 진짜 원하는 것, 시장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에서 나온다.
몇 년 전부터 나는 'Value-Driven' 접근법을 주장해왔다.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부터 묻자는 것이다.
실제로 적용해본 사례가 있다. 한 스마트팜 연구과제에서 처음부터 농민들과 함께 시작했다. 연구실에서 기술 스펙을 정하는 대신, 현장에서 진짜 어려움이 무엇인지부터 파악했다. 그 결과 기존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연구가 진행됐지만, 실제 농가에서 바로 쓸 수 있는 솔루션이 나왔다.
전통적인 R&D 프로세스는 이렇다. 3-5년 연구 → 논문/특허 산출 → 기술이전 시도. 문제는 현장의 목소리를 마지막에야 듣는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늦다.
새로운 방식은 다르다. 연구 초기부터 잠재 사용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한다. 프로토타입을 만들 때마다 현장에서 테스트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필요하면 연구 방향을 바꾸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요즘 생성형 AI를 활용해서 이런 피드백을 더 체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인터뷰나 설문의 정성적 데이터를 분석해서 패턴을 찾고,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견을 종합해서 새로운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식이다.
틸이 한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이것이다. "용기가 천재성보다 희소한 자원이다."
연구자들은 대부분 똑똑하다. 하지만 안전한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검증된 방법론, 확실한 성과, 예측 가능한 결과를 선호한다. 그런데 진정한 혁신은 불확실성 속에서 나온다.
몇 년 전 한 젊은 연구자가 상담을 요청했다. 기존과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모두 위험하다고 말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 아이디어가 성공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 것 같나요?"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1년 후, 그는 정말로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아직 큰 성과라고 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남들과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틸은 강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R&D도 마찬가지다. 혁신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 용기를 내서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실패할 수도 있고, 외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이 모여서 진정한 변화를 만든다.
나는 오늘도 연구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기술을 개발할지 논의하기 전에,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지부터 묻는다.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빠른 피드백을 통해 방향을 조정해 나간다.
쉽지 않은 길이다. 기존 시스템의 관성도 크고, 변화에 대한 저항도 있다. 하지만 틸의 말처럼, 용기 있는 선택이 모여서 미래를 만든다.
경쟁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연구. 0에서 1로 가는 혁신. 그런 연구가 하나둘씩 늘어날 때, 우리의 R&D도 세상을 바꾸는 진짜 힘이 될 것이다.
김현철
AI R&D 전략플래너
기계공학 박사, PMP & Agile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