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량문명의 탄생을 보며

한 R&D 전략플래너의 성찰

어제 밤, 송길영 작가의 『경량문명의 탄생』 인터뷰를 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잠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텔레그램 30명, 미드저니 40명, 커서 AI 20명."


이 숫자들이 계속 맴돌았다. 전 세계 수억 명이 사용하는 서비스를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운영한다는 것.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일을 하는 나에게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실존적 질문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2022년 11월 30일, 그날이 시작이었다


ChatGPT가 출시된 그날을 작가는 "더 데이"라고 불렀다. 나 역시 그날을 기억한다. 처음엔 신기한 장난감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난 지금, 내가 매일 사용하는 도구가 되었다. 아니, 동료가 되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기계공학 박사로서, PMP 자격을 가진 프로젝트 관리 전문가로서, 그리고 Agile 방법론을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변화는 달랐다. 이전의 변화들이 '더 좋은 도구'의 등장이었다면, 이번은 '새로운 동료'의 등장이었다.


송길영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핵계인이 AI로 증강된 것이다. 개인이 갑자기 건담 수트를 탄 것처럼 힘이 세진 상황이 벌어졌다.


지능의 범용화, 그리고 나의 일상


작가가 언급한 AI의 IQ 변화 데이터는 충격적이었다. 1년 만에 100 미만에서 140 가까이 올랐다는 것. 평균 인간의 IQ가 100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 AI는 나보다 똑똑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최근 나의 업무 패턴을 돌이켜보니 실제로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예전엔 연구개발 기획서를 작성할 때 수십 편의 논문을 일일이 찾아 읽고 정리했다. 지금은 AI에게 키워드를 던지고 함께 논의하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


단순히 빨라진 것이 아니다. 사고 과정 자체가 달라졌다. AI와 대화하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관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뛰어난 동료와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기분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모든 기획자가 이런 도구를 사용한다면? 기획자의 차별점은 무엇이 될까?


협력의 경량화, 그리고 조직의 미래


"1인당 기업가치가 전통기업 대비 96배."


작가가 제시한 이 수치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미래 조직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언 같았다.


내가 속한 연구기관을 생각해봤다. 한 개의 대형 연구과제를 위해 수십 명의 연구원이 투입된다. 책임연구원, 공동연구원, 연구원, 연구보조원... 피라미드 구조가 견고하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단계적 보고 체계가 있고, 회의와 결재라는 프로세스가 있다.


그런데 송길영 작가의 말대로라면, 이 모든 구조가 '속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험해본 일이다. 간단한 분석 결과 하나를 보고서에 반영하기 위해 3단계 검토를 거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2주가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AI와 함께라면 하루면 충분했을 일이었다.


속도. 그것이 경량문명의 핵심이라는 작가의 지적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준비된 자만 만난다는 것


"우리는 지금 만납니다. 준비가 되신 분만."


작가가 제시한 경량문명의 첫 번째 그라운드 룰이다. 예전에는 '일단 오세요, 가르쳐드릴게요'였다면, 이제는 '준비된 상태로 오세요'라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며 나 자신을 돌아봤다. 과연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


AI 도구들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정말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걸까? 새로운 도구가 나올 때마다 빠르게 습득하고 적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기존 업무 방식에 약간의 효율성만 더한 것에 불과한 걸까?


기계공학을 전공하며 배운 것 중 하나는 시스템 최적화의 중요성이었다. 부분 최적화가 아닌 전체 최적화가 필요하다는 것.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부분 최적화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만나고 다시 만나는 시대


"우리는 잠시 만납니다. 우리는 다시 만납니다."


작가가 제시한 나머지 두 그라운드 룰이다. 30년 동기, 평생직장의 시대가 끝나고 프로젝트 기반의 단기 집중 협력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전문으로 하는 Agile 방법론이 떠올랐다. 짧은 스프린트, 빠른 피드백, 지속적 개선. 어쩌면 경량문명은 전체 사회가 Agile해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동시에 두려움도 생겼다. 잠시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에서는 평판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항상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야 하고,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예전처럼 "처음엔 서투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해가는"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매 순간이 평가받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기회, 빨리빨리의 재조명


그런데 이 모든 변화 속에서 희망적인 부분도 있었다. 작가가 언급한 한국의 강점들 말이다.


"한국의 유료 구독자가 현재 전 세계 3위", "빨리빨리의 나라"라는 표현을 들으며, 우리나라의 높은 AI 수용성이 새삼 자랑스러웠다.


R&D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연구자들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개방성이 높다. 5G, 초고속 인터넷 등 AI 활용을 위한 인프라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K-바이오, K-배터리 같은 우리만의 브랜드를 가진 기술 분야들이 있다는 점이 경량문명 시대에는 더욱 큰 강점이 될 것 같다. 규모의 경제가 아닌 브랜드의 경제에서는 질적 우위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변화의 물결 앞에서


인터뷰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송길영 작가의 표현처럼 "우월한 문명이 오면 기존 문명은 도태된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


하지만 동시에 이것도 깨달았다. 이 변화가 위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전례 없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니콜라 테슬라가 1935년에 한 말이 떠올랐다. "21세기 로봇은 고대 문명에서 노예 노동이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인류는 속박에서 해방되어 더욱 숭고한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90년 전의 예언이 현실이 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한가운데에 서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R&D 전략플래너인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내 자신부터 제대로 준비해야겠다. AI를 단순히 도구로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진짜 동료로 만들어야겠다. 매월 새로운 AI 도구를 학습하고, 내 업무 프로세스에 체계적으로 통합해보자.


그리고 우리나라 R&D 생태계가 경량문명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소규모 고효율 연구팀 모델, AI 기반 연구 가속화 방법론, 새로운 성과평가 체계 등을 연구하고 제안해보자.


무엇보다 경량문명 시대에 걸맞은 한국형 R&D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 우리의 빨리빨리 문화와 높은 기술 수용성, 그리고 이미 확보한 브랜드 기술들을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마무리하며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송길영 작가의 인터뷰가 던진 질문들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한 답을 찾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안 해도 경쟁자가 누군가 하는 순간 게임이 끝난다."


작가의 이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선택이 아닌 필수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그 변화의 주역이 되어보자.


경량문명의 시대, 나는 준비되어 있는가?


아직은 완벽하지 않지만,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그리고 계속해서 준비해나갈 것이다.


변화는 무섭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 200년간 쌓아온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의 시작점에서, 나는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앞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싶다.


경량문명의 주역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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