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5억 번의 대화

우리가 AI와 살아가는 법

아침에 일어나 세탁기에서 'E5' 에러 메시지를 발견했다. 예전 같으면 사용설명서를 뒤지거나 네이버에 검색했겠지만,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ChatGPT에게 물었다. "배수관 문제일 가능성이 높아요. 고칠 때 반려동물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런 일상이 이제 낯설지 않다. 하루에 25억 건의 메시지가 ChatGPT를 통해 오가고 있다는 통계를 들었을 때, 나는 그저 그 25억 분의 1이었을 뿐이다.


8억 명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


블루닷 AI의 강정수 박사는 "2025년이 AI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라고 말했다. 작년 1억 명에 불과했던 ChatGPT 사용자가 올해 7-8억 명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숫자만으로는 와 닿지 않았는데, 사용 패턴을 보니 이해가 됐다.


작년까지는 주로 돈을 내고 쓰는 사람들이 업무용으로 사용했다면, 이제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무료 사용자들이 일상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AI와 상의하고 있다. 여성 사용자 비율이 52%를 넘어선 것도 진정한 대중화의 신호다.


한 대학생이 조별과제로 며칠 밤을 새운 후 ChatGPT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AI는 차분히 조언을 건넸고, 그 학생은 울었다고 한다. "엄마한테 얘기했으면 커피 끓여서 갖고 오셨을 텐데"라면서.


13억 명이 사용하는 위챗 속 만 개의 친구들


중국의 상황은 더욱 흥미롭다. 위챗에는 이미 만 개가 넘는 AI 에이전트 서비스가 들어가 있다. 사람들은 평균 6-8명의 AI 캐릭터와 대화하며 저마다의 '즐겨찾기' 친구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요가 선생님, 명상 전문가, 직장 상사에 대한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사, 심지어 연인 역할까지.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만의 전문성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사표를 쓰고 싶다고 털어놓으면 "지금 쓰지 말고, 이런 식으로 기록을 남겨야 하며, 노무사와는 어떻게 상담해야 한다"며 전문적인 조언까지 건넨다.


중국 정부는 이를 체계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소수의 대기업만 AI 모델 개발에 집중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국민 서비스용 AI 에이전트 개발에 매진하도록 역할을 나눴다. '차밍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해외의 중국계 AI 인재들을 170억원의 이직 비용까지 주며 불러들이고 있다.


외로움이라는 전염병


한편으로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이렇게 AI와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그만큼 외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외로움은 전염병'이라는 연구 보고서들이 나오고 있다. 가처분소득이 낮을수록 외로움이 높다는 통계도 있다.


대전시에서 어르신들에게 나눠주는 인형 안에는 ChatGPT가 들어있다. "약 먹을 시간이에요", "식사는 하셨나요?"라며 말동무가 되어준다. 미국 군인들이 파병지에서 사용하는 AI 상담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고립을 AI가 메워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면도 있다. 인간관계는 갈등을 통해 성장한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한 번은 싸워야 더 깊어지고, 연인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AI는 일방적으로 친절하다. 이런 관계에만 익숙해지면 현실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지식의 민주화, 그 가능성과 한계


그럼에도 AI가 가져온 변화는 분명 혁명적이다. 과거에는 고급 지식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저소득층이나 개발도상국 사람들도 이제 AI를 통해 전문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미국의 'Don't Pay It'이라는 서비스는 벌금과 관련된 법률 문제만 전문적으로 도와준다. 벌금 통지서를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존재다. 2025년부터는 무료 사용자도 최상위 AI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단지 하루 질문 횟수에만 제한이 있을 뿐이다.


인터넷이 정보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면, AI는 지식의 민주화를 가져오고 있다. 누구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세계 최고 수준의 AI와 대화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변화의 속도에 적응하는 법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정수 박사는 "정부의 11월 AI 액션 플랜을 지켜보자"고 했다. 하지만 정책의 속도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우리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AI의 편리함을 누리되,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것. AI의 조언을 참고하되, 최종 판단은 내가 내리는 것. AI와 대화하되, 현실의 사람들과도 계속 소통하는 것.


오늘도 나는 세탁기를 고치며 AI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동시에 집에 돌아와 가족과 나눈 저녁 식사 대화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AI가 바꾼 일상 속에서,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함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하루에 25억 번의 대화가 오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 대화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도 깊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 [목돈연구소] 하루에 메시지 25억 건, 챗GPT 우리 일상 어떻게 바꾸었나? I IT언박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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