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혁신은 실험실 밖에서 일어난다
어제 아침, 커피를 마시며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의학자의 인터뷰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근감소증 신약을 개발할 때 연구자들은 항상 이런 전제로 시작해요. '사람은 생활습관을 바꾸기 어렵다. 그러니 근력운동 없이도 근력을 높일 수 있는 약을 만들어보자.' 하지만 지금까지 모든 연구를 종합하면, 근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여전히 근력운동입니다."
그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20년 넘게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하면서 수없이 봐온 풍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 대학 연구팀이 개발한 AI 기반 치매 조기 진단 시스템을 평가했던 일이 생각났다. 기술적으로는 정말 뛰어났다. 정확도 95%, 기존 방법보다 6개월 빠른 진단이 가능했다. 논문도 좋은 저널에 실렸고, 특허도 여러 건 나왔다.
그런데 1년 후 추적 조사를 해보니 실제 의료 현장에서 사용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 왜일까?
병원 관계자와 면담을 해보니 이유가 명확했다. 기존 MRI 촬영 후 추가로 30분의 데이터 분석 시간이 필요했고, 의료진은 새로운 시스템을 배우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환자들은 진단 결과에 대한 설명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연구자는 "더 정확한 진단 기술"을 만들었지만, 의료진이 원한 것은 "더 효율적인 워크플로우"였고, 환자가 원한 것은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스마트팜 기술을 개발했지만 60대 농업인들이 사용하기엔 너무 복잡했던 프로젝트, 완벽한 드론 배송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도심 소음 문제로 실제 서비스는 불가능했던 프로젝트...
문제는 우리가 계속 공급자의 관점에서 R&D를 기획한다는 것이다.
"이런 기술이 가능하니까 만들어보자" "해외에서 하고 있으니까 우리도 해야 한다" "이 분야가 유망하다고 하니까 뭔가 해보자"
정작 그 기술을 실제로 사용할 사람들의 목소리는 나중에 듣는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거의 듣지 않는다.
최근 생성형 AI를 R&D 기획에 활용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지난달 농업용 IoT 센서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였다. 보통이라면 "정밀도 향상", "배터리 수명 연장", "데이터 전송 안정성" 같은 기술적 목표부터 세웠을 것이다.
대신 이런 질문을 AI에게 던져봤다:
"충청남도에서 20년째 배추농사를 짓는 58세 농업인 김씨가 스마트 센서를 처음 설치하는 날부터 1개월간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시뮬레이션해주세요."
AI가 그려낸 시나리오는 충격적이었다.
첫째 날: 센서 설치는 했지만 스마트폰 앱 사용법을 모르겠다. 셋째 날: 센서가 알람을 보냈지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일주일 후: 비가 와서 센서가 고장 났는데 AS를 어디에 맡겨야 할지 모르겠다. 2주 후: 데이터는 많이 쌓였는데 이걸 어떻게 농사에 활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 정밀한 센서"가 아니라 "농업인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전체 시스템"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R&D 기획을 시작할 때 질문 자체를 바꾼다.
기존 질문: "어떤 기술을 개발할 것인가?" 새로운 질문: "누구의 어떤 하루를 바꿀 것인가?"
기존 질문: "기술적으로 무엇이 가능한가?" 새로운 질문: "사용자는 어떤 조건에서 이 기술을 받아들일까?"
기존 질문: "경쟁 기술보다 얼마나 우수한가?" 새로운 질문: "기존 방식 대신 이것을 선택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접근법으로 기획한 프로젝트들에서 달라진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디지털 헬스케어 프로젝트에서는 기술 개발과 함께 사용자 교육 프로그램과 고객지원 시스템까지 함께 설계했다. 결과적으로 실제 도입률이 기존 대비 3배 높아졌다.
또 다른 스마트시티 프로젝트에서는 시민들의 일상 루틴을 먼저 분석하고, 그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시민 만족도와 기술 활용도가 모두 크게 향상됐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듯이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술이 인문학과 만날 때 우리의 마음을 노래하게 하는 결과가 나온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진정한 혁신은 누군가의 아침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고민을 덜어주고, 누군가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요즘 사무실 벽에 붙여둔 문구가 있다.
"우리는 기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것이다."
매일 아침 이 문구를 보면서 오늘도 질문한다. 내가 기획하는 이 연구가 정말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진짜 R&D가 아닐까 싶다.
기계공학 박사이자 PMP, Agile 전문가로서 국가연구개발사업의 기획과 평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방법을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