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에 빠지지 않는 야망, 조르바의 땐스

— 아모르파티를 산다는 것

by agon바두슴
정선 계상정거도&BADBOSS The Superhero Under the Sky

야망은 언제나 위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방향 감각은 종종 현재를 잃는다.

발밑의 흙, 오늘의 피로, 지금 곁에 있는 사람.


야망은 우리를 고양시키는 동시에

삶으로부터 이탈시키는 미세한 경사면이 된다.


사람은 야망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야망 말고는 삶을 긍정할 다른 언어를 잃을 때 무너진다.



그 순간부터 삶은 통과해야 할 시험지가 되고,

존재는 끊임없이 평가받아야 할 결과물이 된다.

니체는 이를 견디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아모르파티.

운명을 사랑하라.



바꿀 수 없는 것을 체념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삶의 조건을

‘차선’이 아닌 ‘단 하나의 삶’으로 긍정하라는 요구다.


아모르파티는 낙관이 아니다.

불행마저도 “그랬어야만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긍정이다.


후회 없는 삶이 아니라,

후회를 포함한 삶 전체를 끌어안는 태도.



카잔차키스의 조르바는

니체를 읽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아모르파티를 몸으로 알고 있는 인간이다.


조르바에게 실패는 오점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사건이다.

광산이 무너져도 그는 웃고,

사랑이 떠나도 그는 술을 따른다.


그는 삶이 자신에게 무엇을 주었는지가 아니라

그가 삶에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기억한다.

반면 ‘나’는 끊임없이 계산한다.


이 선택이 옳은가,

이 실패가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그의 야망은 고결하지만

그 고결함이 삶을 지연시킨다.


그는 아직 살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처럼

항상 다음 장으로 미룬다.


포기란 그래서 중요하다.

포기란 뒤로 물러서는 행위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는 결단이다.


그리고 감수하는 능력이란

불행을 제거하는 기술이 아니라

불행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근육이다.



니체가 말한 운명 사랑은

삶을 미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거친 결을 그대로 껴안는다.

조르바가 추는 춤은 기쁨의 춤이 아니라

필연을 견뎌낸 몸의 반동에 가깝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모든 것이 잘 풀린 삶일까,


아니면 어떤 삶이 와도

“그래, 이것이 내 몫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일까.


조르바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더 나은 삶을 꿈꾸지 않았고,

대신 주어진 삶을 끝까지 살아냈다.

아모르파티는 야망의 반대말이 아니다.


그것은 야망을 삶보다 위에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목표가 삶을 대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길을 잃는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뜻이다.

다른 삶을 가정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조르바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춤춘다.

그의 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삶 말고 다른 삶은 없다.”


야망의 함정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더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지금 이 삶을 대체 불가능한 유일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아모르파티.

그 말은 철학이기 전에

살아남은 자의 숨소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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