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그치지 말 것
사람은 상처를 받을 때, 먼저 문을 잠근다.
그 문에는 자물쇠가 없다. 대신 이름이 있다.
부인, 합리화, 투사.
우리는 그것을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방어기제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무너진 뒤의 선택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사전의 몸짓이다.
안나 프로이트는 자아가 세계의 압력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이런 장치들을 발명한다고 말했다.
자아는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견디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어가 오래될 때 시작된다.
문을 잠그는 손이 굳어,
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때.
무의식에는 함정이 있다.
보지 않으려 한 감정들이
다른 얼굴을 하고 돌아오는 순간이다.
그중 가장 조용하고 깊은 방식이
투사적 동일시다.
내 안의 불안과 공격성을
타인의 얼굴에 심는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정말로
의심스럽고, 위협적이고, 차가워 보인다.
나는 경계할 충분한 이유를 얻게 된다.
그러나 실은,
내가 두려워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봉준호의 영화 〈마더〉에서
어머니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모든 의심을 혼자 떠안는다.
경찰도, 이웃도, 제도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신은 냉소가 아니라
집요한 생존의 형태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항상 다른 몸을 찾아간다.
도준이 대신 짊어진 침묵은
어머니의 행동으로 말해진다.
이것이 투사적 동일시의 가장 슬픈 장면이다.
내가 감당하지 못한 두려움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점령할 때.
〈마더〉가 불편한 이유는
악인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격이 아니라 구조다.
믿을 수 없었던 세계,
기댈 곳 없던 시간,
그 안에서 발달한 방어의 습관.
이 영화는 말한다.
신뢰의 결핍은 타고난 결함이 아니라
관계가 허락되지 않았던 역사라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고통은
대개 배신의 기억에서 오지 않는다.
그보다 먼저,
기댄 적이 없었던 시간에서 온다.
신뢰는 선택이 아니라 능력이다.
울어도 세계가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
내 감정을 맡겨도
버려지지 않았던 기억.
그 축적이
‘믿어도 된다’는 감각을 만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의심은 병이 아니다.
그는 아직
세계를 시험해 보는 중일뿐이다.
의심하는 능력은
성숙의 한 형태다.
무조건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천천히 믿겠다는 태도다.
안나 프로이트는
건강한 심리를 병리의 반대편에 두지 않았다.
그녀에게 심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한 조정의 기술이었다.
너무 아프지 않게,
너무 무너지지 않게,
현실과 내면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
삶을 위한 심리는
방어를 버리는 일이 아니다.
어떤 문은
열리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신뢰는 결심이 아니라
리듬에 가깝다.
다가갔다가, 물러서고,
다시 멈추는 호흡.
그 사이에서
사람은 겨우 사람으로 남는다.
의심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세계를 떠나지 않았다는
작은 표시다.
문은 완전히 열리지 않는다.
다만
조금 흔들린다.
바람이 스친다.
그 흔들림 속에서
삶은
말없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