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고 울고 웃어주는 얼굴들

― 박수 없이도 무너지지 않는 어깨

by agon바두슴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 캡처


며칠 전 이데일리 신년음악회에서
나는 소리를 듣기보다
시간이 몸을 통과하는 장면을 보았다.


무대 위 연주자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지만
실은 각자의 생을 다시 들어 올리고 있었다.


활이 현을 긋는 순간마다
지나온 밤들이 진동했고
숨을 고르는 짧은 틈에는
포기하지 않았던 날들이 접혀 있었다.


그들의 삶은 말이 되지 못한 채
몸의 앞면으로 나와
소리보다 먼저 나를 건드렸다.


눈물이 났다.


그래서 음악은 찬란하기보다 가까웠고,
감동이라기보다
조용한 슬픔에 더 닮아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오래됐다.


이런 장면 앞에서 마음이 먼저 고개를 숙이게 된 것이.


내 아이들을 포함해
아침마다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나는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들의 하루가
왜 그렇게까지 치열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다시 선택했다는 사실이
뿌듯해서,

그리고 슬퍼서.



이사도라 던컨의 몸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벗어던진 것은
발레의 규칙이 아니라
몸을 대신해 생각해 주던 타인의 문법이었다.


'자유 무용' 이사도라 던컨


맨발로 선다는 것은 자유의 선언이 아니라
모든 균형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결심에 가까웠다.
그 가벼움은 수없이 무거웠던 연습의 잔여였다.


파블로 카잘스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하루 네 시간씩 첼로를 연습했다.


“아직 조금 나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완성을 향한 욕망이 아니라
중단하지 않겠다는 윤리였다.


살아 있다는 것은,
조금씩 나아지는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는 듯이.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생트 콜롱브 역시
명성을 거부한 채 숲 속에서 연주한다.


그는 상실을 극복하지 않는다.
다만 상실과 함께 연주하는 법을 배운다.


그의 음악은 상처를 치유하지 않지만
상처가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되는 장소를 만든다.


로맹 가리는 여러 이름으로 살았다.
그는 삶이 하나의 자아로는 감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았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문장에는
유머와 절망이 같은 줄에 놓여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때로 자신을 여러 번 다시 써야 한다는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가
끝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독자를 붙잡는 이유는,
그가 특별해지는 법 대신
지속하는 법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달리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 그 단순한 행위들은
삶을 견디는 최소한의 리듬이다.




신년은 늘 새로움을 요구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지금 더 필요한 것은
새로운 목표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다는 인정일지 모른다.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박수가 없어도,
오늘을 연습처럼 살아낸 몸들에 대한 승인.


우치다 다쓰루는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눈에 띄는 영웅이 아니라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세계는 뛰어난 사람들 덕분에 발전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것은
계속 출근하는 사람들 덕분이라고.


그래서 나는 음악회에서 슬펐고,
다시 초대받은 아침의 도시에서 뿌듯했다.


아마도 잘 산다는 것은
찬란한 순간을 갖는 일이 아니라
내일도 다시 몸을 이 자리에 둘 수 있도록
오늘을 지나오는 일일 것이다.


그 정도의 삶이라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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