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연히 — 불을 지르지 않은 사랑

행복과 진달래 사이에 그 불멸의 시간

by agon바두슴


유치환의 시 「행복」과 이영도의 시조 「진달래」에는 우연처럼 겹치는 한 단어가 있다.


연연한, 그리고 연연히.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서로 다른 리듬으로 숨 쉬는 말이다.


하나는 형용사로 머물며 색이 되고,

하나는 부사로 흘러가며 시간의 결을 만든다.


유치환은 그것을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 모른다”라고 썼고,

이영도는

“연연히 꿈도 설워라”라고 적었다.


두 문장 사이에는 설명되지 않은 사연이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사연은 비어 있기 때문에 더 오래 남는다.


연연한 것은 대상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 잔상이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연연히는 행위의 집착이 아니라, 끝났음에도 끝나지 않는 상태다.


꽃은 지지만 색은 남고, 꿈은 깨지만 설움은 계속된다.


이 두 시에서 연연은 사랑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떠나지 않는지를 정확히 가리킨다.


그래서 나는 이 단어 앞에서 멈춰 선다.


연연한과 연연히 사이에는 한 사람의 생애만큼 긴 간격이 있고,



아, 15년

한 시대의 윤리만큼 무거운 침묵이 있다.


이 말 하나를 붙잡고, 나는 두 시인의 삶과 편지와 시대를 더듬는다.


마치 사라진 얼굴을 떠올리듯, 이미 지나간 사랑을 현재형으로 불러내듯.


이 글은 그 단어에서 시작된다.
붙잡지 않았기에 더 오래 남은 것,
불태우지 않았기에 더 잔혹하게 빛나는 것.
연연한 사랑, 연연히 지속되는 시간에 대하여


연연히


유치환의 시에서 “연연한”이라는 말은 감정의 수사가 아니라, 결심의 흔적에 가깝다.


그는 사랑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버티게 하는지를 기록했다.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 모른다”는 구절은,

대상을 특정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감정을 영구화한다.


그것은 꽃일 수도,

피일 수도,

혹은 이영도의 이름을 직접 쓰지 못한 채 남겨둔 여백일 수도 있다.


나는 종종 상상한다.

만약 유치환이 어느 밤, 시가 아니라 시조를 썼다면 어땠을까.


짧고 단정한 형식 속에, 그가 끝내 정리하지 못한 마음을 눌러 담았다면.


아마 이런 문장이었을 것이다.



연연한 이 마음을

저녁 바람에 묶어 두니

가는 꽃잎마다

그대 이름 젖어 오네

버리지 못한 사랑이

오늘도 나를 산다


이 시조는 실제로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유치환다운 진실에 가깝다.


그는 언제나 완성된 고백보다, 미완의 상태로 남는 마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연연하다는 말은 바로 그 미완을 견디는 태도다.


정리하지 않는 용기, 닫지 않는 결심.


20여 년 동안 오천 통의 편지는,


사랑의 기록이자 자기 훈련이었다.

하루를 버티기 위해 쓰고,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봉투를 닫았다.


편지를 쓰는 동안 그는 한 사람의 연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 살아 있었다.




이영도는 그 편지들을 읽으며 답장을 아꼈다.


말이 적어서가 아니라,

침묵이 더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말보다 간격에서 자랐다.


연연히라는 말은 바로 그 간격의 다른 이름이다.

“연연히 꿈도 설워라.”


이영도의 이 문장은

꿈이 깨졌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다.


난만히 멧등마다 진달래


오히려 너무 오래 깨어 있어서 슬프다.

꿈이 삶으로 스며들어 더 이상 구분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설움이라 부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사건이었으나, 나중에는 기질이 된다.

버릇처럼 남아, 삶의 리듬을 바꾼다.


이 사랑의 시간은 4·19와 겹친다.

거리에서는 젊은이들이 쓰러지고,

이름 없는 시민들이 역사의 문장을 다시 쓰던 해.


그날의 혁명 역시 단번에 완성되지 않았다.

이후의 좌절과 왜곡 속에서도, 4·19는 연연히 남았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유치환의 사랑과 닮아 있다.


실패했으나 패배하지 않은 마음, 좌절했으나 철회되지 않은 선택.


혁명은 종종 거대한 언어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연연함에서 시작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감정,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도 못하는 마음.

사랑도 그렇다.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만으로 관계를 폐기하지는 않는다.



연연함은 미련이 아니라 책임이다.

한 번 진실했던 감정에 대해 끝까지 예의를 지키는 태도.


유치환에게 편지는 시 이전의 윤리였다.

시는 읽히기 위해 쓰였지만, 편지는 살아 있기 위해 쓰였다.


그는 이영도를 소유하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걸어 잠그지도 않았다.


다만 매일같이 자신을 사랑의 상태로 유지했다.


연연히


그 말속에는 체념도, 집착도 없다.

다만 오늘을 끝까지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있다.


불멸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가 아니다.

불멸의 사랑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감각이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습관으로 남고, 서사가 아니라 자세로 남는다.


어떤 저녁의 빛,

어떤 꽃의 색,

어떤 문장의 리듬에서 불쑥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유치환이 끝내 쓰지 않은 시조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파멸 직전의 미를 붙잡으려는 행위였을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금각을 바라보며 깨달았듯,

완전한 것은

지속되는 순간부터 이미

부패를 시작한다.


사랑 역시 그러하다.

영원히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가장 빛나는 순간에 스스로를 태워버리고 싶은 충동.


연연함은 그 충동을 미루는 기술이 아니라,

파괴하지 않기 위해 더 오래 응시하는 고통스러운 관능이다.


연연한 이 마음을
불 속에 던지지 못해
나는 오늘도
아름다움 앞에서 살아 있다.


불멸의 사랑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끝내 파괴하지 못한 채 남겨진다.


금각이 불타지 않았기에 더 잔혹하게 빛났듯,

사랑도 소멸되지 않았기에 더욱 탐미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연연히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미루어진 파멸 속에서, 인간은 가장 잔인하게 아름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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