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궁극적으로 찾는

내가 힘들 때 누군가 반드시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by agon바두슴


조셉 캠벨은 말했다.
우리가 궁극에 찾는 것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라고.

이 말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의미는 설명될 수 있지만,
경험은 오직 통과할 수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가.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순간은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을 때일 것이다.
몸이 먼저 주저앉고,
말보다 한숨이 앞설 때.
그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더듬는다.
누군가가 있는지,
아직 혼자가 아닌지를. 인간은 혼자서 살아 있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숨을 쉬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적대적이지 않다는 감각,
그 미세한 확신이 있어야
삶은 비로소 감각이 된다.


여기에는 아주 오래된 믿음이 있다.


내가 힘들 때,
도움이 정말로 필요할 때,
나와 내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들이
결국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


이 믿음은 특정한 얼굴을 갖지 않는다.
이름도, 계약서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둘레를 이룬다.


마치 밤길을 걸을 때
멀리서 희미하게 이어지는 등불처럼,
서로를 직접 보지 않아도
길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공동체의 신뢰다.


지금 여기의 나만을 향한 약속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
다음 세대까지 전달되는 안전망.
한 사람이 쓰러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믿음.


인지생물학자 움베르토 마뚜라나는
존재의 근본적인 조건은 신뢰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인간 이전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번데기를 벗고 나온 나비는
이 세계를 시험하지 않는다.
공기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지,
바람이 너무 차갑지는 않을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비는 날개를 펼친다.


왜냐하면 나비의 몸은
이미 이 세계를 전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날개와 공기,
더듬이와 바람,
혀의 길이와 꽃의 깊이 사이에는
말없는 합의가 있다.


마뚜라나는 이것을
나비와 세계 사이의 구조적 상응이라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그 상응 자체가
암묵적 신뢰의 표현이라고.


신뢰는 선택이 아니다.
존재가 세계를 향해
처음으로 내딛는 자세다.


의심은 나중에 배우지만,
신뢰는 먼저 태어난다.


그래서 황금률은 도덕이 아니라 기억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
이 문장은 착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라,
우리가 같은 둘레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이다.


암묵적 신뢰가 무너질 때,
삶은 경험이 아니라 계산이 된다.


사람은 얼굴이 아니라 위험도가 되고,
관계는 만남이 아니라 조건이 된다. 그러나 공동체의 신뢰가 살아 있는 곳에서는
삶이 다시 숨을 쉰다.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수치가 되지 않고,
먼저 손을 내미는 일

어리석음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우리가 궁극에 찾는 것은
완전한 안전도,
영원한 보장도 아니다.


조셉 캠벨의 말처럼,
우리가 찾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언제나
내가 무너질 때
나를, 그리고 내 다음을
받아줄 세계가 있다는
조용한 믿음 속에서 시작된다.


좋은 삶이란
나비처럼 세계를 전제로 삼을 수 있는 삶.
의심보다 신뢰가 먼저 움직이는 삶.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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