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실존주의로 통역한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정수(精髓)라고 보았다. 사랑이 두려운 이들에게 필요한 건 ‘영원’이라는 달콤한 마취제가 아니라, ‘종말’이라는 서늘한 각성제일지도 모른다. 이별을 도망쳐야 할 재앙이 아닌 삶의 상수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투신할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용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이름의 기만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때 관습적으로 ‘영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 약속은 대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비겁한 마취제에 가깝다.
영원을 담보로 잡아야만 안심하는 마음은,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의 유한함을 견딜 힘이 없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주호진의 선언은 그래서 파격적이다.
“우리에게 해피엔딩 같은 건 없을 거예요. 우리는 반드시 헤어질 거니까.”
이 문장은 관계의 파멸을 선언하는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인간 실존의 가장 뜨거운 지점으로 끌어올리는 서늘한 축복에 가깝다.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
끝을 선구하는 용기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 정의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끝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할 때, 인간은 비로소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 통념(세인, Das Man)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관계가 없으며,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주호진의 ‘반드시 헤어질 것’이라는 확신은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의 선구와 닮아 있다.
그는 이별이라는 관계의 죽음을 미리 끌어당김으로써, ‘언젠가 끝난다’는 명확한 한계를 설정한다.
역설적으로 그 한계가 설정되는 순간, 내일로 미뤄두었던 사랑은 오늘이라는 좁은 틈새로 쏟아져 들어온다. 영원이라는 허구 위에 지은 성(城)보다, 종말이라는 확실한 진실 위에 세운 움막이 훨씬 더 견고하다는 실존적 결단이다.
불안의 안개 너머, 탈은폐(Aletheia)의 순간
우리는 흔히 ‘상대가 나를 떠날까 봐’ 불안해하며 관계를 망친다.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두려움과 다르다. 두려움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세계의 허무 그 자체에서 온다.
주호진은 이 불안을 제거하려 애쓰는 대신, 그것을 관계의 상수로 두기로 한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 앞에 던져져 있다.”
—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별이 대책”이라는 그의 말은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만, 실은 가장 명징한 정신의 소산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을 ‘확실한 종말’로 치환하는 순간, 불안은 더 이상 도망쳐야 할 괴물이 아니라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된다. 그 어둠의 등불을 켰을 때 비로소 가려져 있던 상대의 진실이 드러난다.
하이데거가 말한 진리의 ‘탈은폐(Aletheia)’가 일어나는 것이다.
미친 자만이 목격하는 오로라
“최소한 우리 둘 중에 끝까지 멀쩡하려고 노력했던 내가 미친 것 같으니까. 나 오로라가 보여요.”
세상이 말하는 ‘멀쩡함’이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상처받지 않을 만큼만 마음을 주는 비본래적인 태도다. 주호진은 그 멀쩡한 가면을 벗어 던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세상의 문법으로 사랑을 통역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진리는 억지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가 스스로를 드러내어 밝혀지는 사건이다. 이별이라는 밤을 기꺼이 받아들인 자에게만 허락되는 빛, 그것이 바로 ‘오로라’다.
오로라는 밤이라는 유한성이 있어야만 그 신비로운 무늬를 그린다. 영원을 믿지 않기에 매 순간을 영원처럼 살아내야 하는 이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역설이 주호진의 고백에 담겨 있다.
당신의 오로라는 안녕한가
진정한 통역은 언어와 언어 사이가 아니라, 사라질 것들 사이의 적막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반드시 헤어질 것”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그러니 나는 지금 오직 당신만을 온전히 보겠다”는 가장 지독한 사랑의 맹세다.
우리는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길만을 걷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숲길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허황된 지도가 아니라, 발밑의 절벽을 인정하는 정직함이다.
당신은 지금 끝을 두려워하며 도망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끝을 발판 삼아 눈앞에 일렁이는 오로라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