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한 상황 따위가 슬프고 처량하여 가엾고 불쌍한 데가 있다.”라는 설명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런데 어릴 때 “생각”이 “生覺”인 줄 알았듯이, “애처”는 “哀處”인 줄 알았다. 무식이 도를 넘는다.
“애초(哀楚)”라는 말은 있다. “슬프고 처량하다”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니, 청 나라 때 만들어진 《요재지이(聊齋志異)》에 “牆外有人...反復吟誦, 其聲哀楚”라는 구절이 있다. “담장 밖에서 어떤 사람이...반복해서 시를 읊조리는데, 그 소리가 애초로웠다”는 말이다.
‘애처’이든 ‘애초’이든, 처량하게 살지는 말아야 한다.
《채근담》의 한 구절을 다시 읽는다.
棲守道德者, 寂幕一時, 依阿權勢者, 凄凉萬古.
達人觀物外之物, 思身後之身, 寧受一時之寂寞, 毋取萬古之凄凉.
도덕을 지키면서 사는 자는 한때 적막하지만, 권세에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할 것이다.
달인은 물욕에서 벗어나 진리를 보고, 몸이 죽은 후의 명예를 생각하나니, 차라리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의 처량을 취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