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의 《시를 어루만지다》를 펼쳐 보니, 이 사진이 보인다. 《시를 어루만지다》는 김사인이 시를 뽑아 짤막한 해설(나는 이런 방식이 시 해설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을 덧붙이고, 사진작가 김정욱의 사진을 군데군데 실은 책이다. 이 멋진 사진은 대체 어떤 시와 맞물려 있나 앞장을 열어 보니, 마종기의 〈여름의 침묵〉이다. 아 제대로다! --- 그 여름철 혼자 미주의 서북쪽을 여행하면서 다코다 주에 들어선 것을 알자마자 길을 잃었다. 길은 있었지만 사람이나 집은 보이지 않았다. 대낮의 하늘 아래 메밀밭만 천지를 덮고 있었다. 메밀밭 시 야의 마지막에 잘 익은 뭉게구름들이 있었다. 구름이 메밀을 키우고 있었던 건지, 그냥 동거를 했던 것인지. 사방이 너무 조용해 몸도 자동차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내 생의 전말같이 무엇에 홀려 헤매고 있었던 것일까. 소리 없이 나를 친 바람 한 줄을 사람인 줄 착각했었다. 오랫동안 침묵한 공기는 무거운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 아무도 없이 무게만 쌓인 드넓은 곳은 무서움이라는 것, 그래도 모든 풍경은 떠나는 나그네의 발걸음이라는 것, 그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무슨 남자냐고 메밀 이 물었다. 그날 간신히 말없는 벌판을 아무렇게나 헤집고 떠나온 후 구름은 다음 날 밤에도 메밀밭을 껴안고 잠들었던 것인지, 잠자는 한여름의 극진한 사랑은 침묵만 지켜내는 것인지, 나중에 여러 곳에서 늙어버린 메밀을 만나 공손히 물어도 그 여름 황홀한 뭉게구름도, 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면벽한 고행 속에 그 흔한 약속만 매만지고 있었다. - -- 김사인의 말대로 “마음의 먼 곳을 거쳐서 나온 것이 틀림없는 호명과 형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