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신 중에 못 참고 뛰어 나갔다.

1. 초등학교 방과 후 영어선생님

by Rumi


“오빠 이력서 썼는데 연락이 왔어. 임신 중이라고 했는데 괜찮대.”

신랑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일하러 가겠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나는 해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우리의 신혼 주말 부부는 끝이 났다. 주말 부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고 하는데 신혼 초 주말 부부는 매일 눈물과의 전쟁이었다.

(왜 그땐 그랬을까..?)



임신과 동시에 비행기를 타고 주말마다 서울을 왔다 갔다 했던 나는 사직서를 내고 남편 곁으로 왔다. 입덧이 조금씩 있었지만 심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혼자 심심했던 나는 일을 해보려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연락이 왔던 것이다. 임신을 했다는데도 한 학기만 수업을 해달라고 했다. 면접도 없었다. 티칭 경력은 과외 알바 밖에 없었는데 당장 출근이었다.




차가 없던 나는 일당이 그 당시에 오만 원 언저리였다. 매일 2시부터 4시까지 3타임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임신 중이라 버스는 못 타고 택시를 타고 다녔는데 택시비가 왕복 2만 원이었다. 나에겐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 건강을 위해 멍청비용 2만 원쯤은 기꺼이 지불할 수 있었다. 그래도 3만 원이 남는 장사니깐.




하루종일 신랑만 기다리던 나는 수업 준비도 하고 생산적으로 할 일이 생겨서 룰루랄라 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처음 가르치는 것이라서 매일 저녁을 먹은 후에 이것저것 찾아보며 수업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정말 잘 갔다.



“선생님, 진짜 선생님 뱃속에 아기가 있어요?”

배가 나오니 아이들은 엄청 관심을 가져줬다. 재잘재잘 떠드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너무 이뻤다. 서투르고 처음 가르치느라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아이들은 너무 순수했고 선생님인 나를 정말 잘 따랐다. 한 학기밖에 아이들과 같이 할 수 없었지만 이쁜 아이들을 보면서 태교를 했다.



임신 중에 얼마나 답답했으면 뛰쳐나갔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대단하다. 길도 잘 몰라서 매일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하면서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행복했다. 꼬물꼬물우리 쑥쑥이가 엄마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 엄마의 이중생활은 시작되었다.




엄마의 12년째 이중생활을 연재해 봅니다.



사진출처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