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정규직에서 일하고 싶었다.

8. 경력직 면접 합격(but. 거절했다)

by Rumi


계약직으로 일을 해보니 또 할만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일을 하니 삶에 활력도 생겼다.


자신감이 붙었는지 또 구인구직 사이트를 헤매고 있었다. 감사하게 내가 크게 돈을 벌지 않아도 신랑이 열심히 돈을 벌어다 주어서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계약직 강사 수입은 우리 집 생활 수입에 5%도 차지하지 못했다.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11월부터 나는 해운 회사에서 일을 했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다른 곳에 기웃기웃 거리며 학원도 다녔지만 결국엔 처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쭉 한 가지 일을 했다. 대부분 영어로 이메일을 쓰며 해외랑 연락을 하고 서류 작성이 대부분 이였다. 선적 서류를 만들고 작성하는 일은 나름 이 분야의 전문직이다. 다시 직장을 구하려고 이력서를 작성하니 서류전형에 금세 통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집 가까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별로 크지 않은 사무실이었지만 따뜻했고 줄지어 있는 컴퓨터와 사무용품들을 보니 마음이 몽글몽글 했다. 사장님께서는 내 경력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지금 일하는 분이 출산을 하러 가기 때문에 나처럼 아이들이 웬만큼 키운 사람이 맘에 든다고 하셨다. 처음 면접 보러 갔을 때 연봉까지 어느 정도 받고 싶냐고 물어보시고 그 자리에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다행히 집에서 회사 거리는 가까웠다. 아이들을 점심시간에도 케어하면서 다닐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발목을 잡은 건 잦은 야근과 토요일 오전 근무였다.


집에 와서 신랑과 상의를 했지만 신랑은 반대를 했다. 누가 아이들을 돌보냐고 결사반대를 했다. 사실 신혼 초에 신랑이 울면서 돈은 자기가 벌테니 집에서 아이들이랑 같이 있어달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자란 남편이었다. 학교 선생님이셨던 어머님 밑에서 자란 남편은 소풍, 운동회, 각종 학교 행사에 엄마가 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하교 후 깜깜한 집에서 엄마 아빠를 하염없이 동생과 기다렸던 기억들을 아이들에게 해주기 싫다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건 신혼 초 이야기였다. 내가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라며 설득했지만 신랑은 반대를 했다.


친정은 3시간 거리였고, 시댁은 5시간 거리에 살았다. 아이들이 아프면 오롯이 내 몫이었고 바쁜 신랑과 살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을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부풀었지만 정중히 회사에 이야기를 하고 거절을 했다. 거절한 날 얼마나 속상해서 울었는지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프다. 그 당시 너무 어렸던 둘째는 엄마가 우니깐 옆에서 같이 울었다. 이런 아이들을 두고 내가 내 갈길을 가겠다며 나의 이중생활을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이중생활을 포기했던 나의 아쉬웠던 사건이었다.




엄마의 12년째 이중생활을 연재해 봅니다.


대문 사진 - 픽사 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