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첫 생일을 장례식장에서 보냈다.

1. 영원

by 주 원

이 세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은 다 변한다.

아니, 살아 숨 쉬지 않는 것들도 모조리 다 변한다.


한때는 영원을 믿었던 어리석은 순간들도 있었다. 어쩌면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알고 있으면서도 한 번쯤은 보이지 않는 믿음에 기대어 마법 같은 영원을 바란건지도 모른다. 참 어리석고 바보 같았다. 하물며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에도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한 이 세상에서, 영원을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건 제 아무리 스무 살, 철부지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 해도 그저 허황된 공상에 사는 어린애로 보일 거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저 세상물정 모르는 애처럼 볼 것 같다는 생각에 괜스레 부끄러워지고 쪽팔린다는 극단의 감정도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제 나는 그런 체면 따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졌다. 지금은 그런 어리석은 기대라도 좋다. 꼭 완전한 영원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나에게 영원 그 비슷한 언저리의 무언가라도 다가와주기를 바랄 뿐이다.


2010년, 밭일을 마치고 땀으로 온몸이 적셔진 채로 집에 들어와, 쓰고 있던 챙 넓은 모자를 황토색 소파에 얹어두고, 내게 “왔냐~~?”하시며 언제나 우렁차고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주셨던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그랬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렇게 늘 우렁차고 담대한 모습이었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자연스레 그 모습을 선망하고, 그 사람을 동경하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언젠가 한 번은 할아버지의 재치 있게 던지는 개그감이 부러웠고,

한 번은 그 넓은 밭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일궈내 온 강인함이 부러웠고,

한 번은 할머니가 크게 넘어져 다리수술로 입원하셨을 때에도 밤낮없이 정성껏 간호하고 본인은 불어 터진 소면에 간장을 비벼 먹는 걸로 끼니를 때우시던 할아버지의 사랑이 부러웠다.


그렇듯 할아버지는 늘 나에게 존경스럽고 닮고 싶은 어른이자, 꿈이었다.


엄마, 아빠에겐 참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할아버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된 지금, 할아버지의 그런 모습들을 얄팍하게나마 흉내 내보려 노력하지만 그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스무 살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 더 여실히 깨닫는다. 그러면서 더욱이 당신의 그런 모습들을 당연히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의 이런 단단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살아오며 가지게 된 본인의 가치관이 당신을 단단하게 만든 걸까.

그것도 아니면 살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연륜으로 깨닫게 된 삶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어렵고도 답이 쉽사리 나지 않는 질문을 매일같이 스스로에게 던지며 나의 스무 살을 보내고 있다. 불안하고 막연한 나의 스물을 하루하루 이겨내듯 지내고 있다. 전쟁 같은 청춘의 터전에서, 그래도 나를 버티게 하는 건 아마 떠나간 자리에 남겨진 할아버지의 무수한 흔적들일 것이다. 이제 나의 세상에서 그는 없다. 그러나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곳곳에 가득한 그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러고선 다시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일생동안 부유하고 돈이 흘러넘치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인생을 사시진 못했지만 그가 가지고 살아간 자산들은 할아버지가 떠난 지금, 아직도 이 자리 그대로 남아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그게 나에겐 불안한 오늘을 버티며 살아가는 당연한 이유임을 상기한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 그가 내게 남기고 간 흔적들을 주워 담아 다시 나의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그는 비록 이곳을 떠났지만, 그는 아직 이곳에 분명히 존재한다. 내 안에 그는 분명히 오늘도 살아있고, 내일도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가 걸어온 길을 내가 돼 밟아가며 그가 삶의 터전에서 몸소 배우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나도 겪어내 이겨내야 한다. 그리하여 청춘이란 전쟁터에서 승리해, 나는 그가 이곳에 머물렀다 갔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다. 구상 없이 시작했던 나의 작은 일기장의 문장들을 이곳에 옮겨적으며, 그 순간순간 예기치 못하게 하염없이 떨어지던 눈물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 이야기를 기필코 마무리지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언제, 어디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에. 다시 만나, 내가 이토록 고심해서 적은 문장들을 다시 만나 당신께 읽어드릴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 내 온 마음을 담아 눌러 적은 이 글 하나만큼은, 아주 먼 미래에 당신을 만나는 그 순간에도 이곳에 남아 영원할 것이기에.


덧붙여 이 글은 언젠간 닿게 될 나의 당신과 더불어, 그 과정에 우연히 닿게 될 수많은 당신들에게 담담한 위로가 되어주길.

언젠가 당연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이별을 맞이할 수많은 당신들에게 바다같이 밀려올 슬픔들을 조금은 건져줄 수 있는 글이 되어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