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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Feb 02. 2023

개인주의의 유형 두 가지 <2>

폐쇄적 개인주의

<주의> 열독에 약간의 인내심을 요하는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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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인 개인주의의 유형 두 가지 <1>에서는 개인주의의 요소와 개방적 개인주의에 대해 논했다. 개인주의의 수준을 결정하는 요소로 자유도와 상호성이 있음을 언급하였고, 개방적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자유도가 상호성보다 높기에 사회 구성원간 소통이 자유로우며, 서로의 행동이나 사고에 서로가 영향을 받지 않는 분위기며, 또 그러한 인식이 일반적임을 설명하였다.


이 글을 통해서는 폐쇄적 개인주의와 그 속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폐쇄적 개인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의 한 유형이기 때문에 개인주의의 반대 개념인 집단주의와는 구별된다. 다만 그 성격상 개방적 개인주의와도 명확하고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개방적 개인주의의 특성을 뒤집으면 폐쇄적 개인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


폐쇄적 개인주의 사회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자기 표현에 소극적인 경향을 보인다. 이는 해당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체와 법률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수립되고 제정되었기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된 사회긴 하나 이를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모습은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해당 사회가 전통적으로 개인주의적 생활 양식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의미하는데, '나'를 드러내는 것이 미덕이 아닌 문화가 강한 상황에서 체제의 변화가 이를 뒤집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사회에서 개인주의는 자생적으로 정착된 것이 아니라 체제 이행에 따라 외부에서 이식된 가치로서, 완전히 사회 구성원의 심리 기저에 자리잡지 못했기에 (과도기적이든 최종적이든 간에) 폐쇄적 형태를 띤다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자아가 비교적 뚜렷히 구분되며, 두 자아가 상당히 다른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즉 외부에 드러나는 나와 홀로 있을 때의 나의 성격이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폐쇄적'이란 말이 보여주듯 해당 사회의 개인주의는 대개 사적 영역에서는 본인의 사고나 행위에 거리낌이 없지만, 사회 구성원 간에 사적 영역에 대한 개입도 일절 없다. 이는 폐쇄적 개인주의 사회의 구성원의 높은 '상호성' 때문이다. 상호성은 한 구성원의 사고와 행동이 다른 구성원의 사고와 행동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고 인식하는 성격을 이른다 설명하였는데, 개인주의란 기본적으로 상호 무관심을 전제하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 수 있으나, '상호성'이 더 높은 형태의 폐쇄적 개인주의는 오히려 '나'를 온전히 기준으로 하기보다는 상대방과의 관계와 상호 작용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서로가 행동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해당 사회의 구성원은 타인의 영역에 함부로 진입하지 않으려는 '조심성'과, 타인이 나의 영역에 함부로 진입하지 않길 원하는 '방어성'을 지닌다. 다만 그러한 태도가 관계의 시작이자 핵심인 대화를 기피하게 함으로써 소통과 교류의 빈도를 줄이기 때문에 공적 관계가 사적 관계로 발전되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으며, 이러한 면은 폐쇄적 계인주의 사회가 역설적으로 얼마나 타인의 존재에 민감한지를 보여주는 예시다.


폐쇄적 개인주의는 개인의 사적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것이 미덕으로, 내향적인 사람이나 외부 대상의 방해 없이 자신만의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긍정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의사 결정에 있어서는 큰 결점을 지닌다. 개방적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만큼 '나'의 생각과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도 자유롭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개진하거나 관철하는 것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폐쇄적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초점이 '자기 자신'과 '내부'에 맞춰져 있는데다 '나'를 드러내고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개입이나 간섭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조심성으로 인해 가급적 자신의 의견을 숨기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로 인해 해당 사회에서는 조정 내지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권위체가 부상할 가능성이 높은데, 권위체를 통한 의사 결정은 대의(代議)에는 부합하나 소통을 통한 공론 형성에는 지장을 주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다수 내지 전체의 의사와는 다른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이는 곧 공적 영역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넘어 정치적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자기 주장이 뚜렷하지 않은 점 때문에 권한을 위임받은 권위체의 방향성이나 지침에 쉽게 순응할 수 있어 개인주의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개방적 개인주의에 있어 권리 의식은 매우 중요하므로 '저항'이란 어쩌면 필수 요소다. 만약 개인의 의지와 주체적 결정을 무력화할 수 있는 무언가가 사회 전반에 걸쳐 시행된다는 우려가 형성되면 개방적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이에 반대하거나 항의하는 목소리가 쉽게 터져나온다. 이런 면에는 중앙 집권화나 정책 시행에 있어 장애 요소로 작용할 여지가 있지만,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함으로써 사적 영역에까지 외부의 영향력이 개입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가 기저에 있다 하겠다.

반면 폐쇄적 개인주의에 '저항'이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요소로 여겨질 수 있다. 폐쇄적 개인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경우는 자신의 사적 영역이 규제당할 때인데, 이는 개방적 개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권익 침해에 별다른 부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며, 실제로도 이는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니다. 폐쇄적 개인주의 사회의 구성원은 공적 영역에 대한 각종 규제를 대체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러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사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거나, 의사 결정을 위한 소통 자체를 기피하는 소극적 심리로 인해 '웬만해선 그냥 넘어가자'는 결론을 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정리하면, 개방적 개인주의 사회는 폐쇄적 개인주의 사회에 비해 '나'라는 존재의 범위를 더 넓게 인식하고 있기에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그만큼 민감히 반응하는 반면, 폐쇄적 개인주의 사회는 상대적으로 '나'의 범위가 그리 넓지 않기에 개인의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하거나 사적 영역의 세세한 부분까지 외부 대상이 개입하려 들 경우에 한해 공적 영역에 목소리를 낸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권위체에 대한 두 개인주의의 인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인간은 억압에서 해방을, 구속에서 자유를 나아다. 그러므로 전제정치에서 민주정치로의 이행 과정에서 개인주의가 정착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문제는 그 과정이 천차만별이기에 국가와 사회마다 상이한 수준의 개인주의가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규범 의식을 중시하는 곳이 있는 반면, 개인의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가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규범 의식보다는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가 인간의 권리와 자유 신장에 있어 더 바람직하다고 보며, '나'를 숨기기보단 드러내는 사회가 합리적이고 활발한 의사 결정과 소통을 위해서도 지향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선 외부의 영향력이 최소화되어야 하며, 가능한 한 나의 권익을 실현할 공간이 확장되어야 한다. 파국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규칙과 법이 존재함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지나치게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결과로 나타난다면 그 사회는 반드시 경직되어 언젠가 동력을 잃고 만다. 개인주의가 그 무엇보다도 넓게, 그리고 깊게 확산되어야 하는 이유다.


근 몇 년간 내가 보아 온 한국 사회는 유감스럽게도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분명 전근대 사회와는 완벽히 이별을 고한 듯 보이면서도 곳곳에 전근대 사회의 특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데, 한국 사회가 근현대를 거치며 겪은 외세에 의한 강압적 통치와 장기간의 (군부)독재가 이를 강화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개인주의에 대한 욕구가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뿐만 아니라 거부감 또한 생각 이상으로 큰 곳이 바로 한국이다. 이는 한국인이 여전히 인간을 개체가 아닌 집합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개인의 주체성에 반하는 '사회/문화적 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즉, 아직 한국 사회는 완전히 탈집단(주의)화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집단주의적 면모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의미다.


폐쇄적 개인주의의 설명에서 폐쇄적 개인주의는 대체로 개인주의가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체제 변혁(이행) 과정에서 이식되면서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 사회가 딱 이런 상황이다. 상호성이 강한 폐쇄적 개인주의 양식에 기존의 집단주의 문화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적 영역에서는 단호히 불간섭을 외치는 한편 공적 영역에서는 국가 지침과 사회적 인식에 개인의 사고와 행동이 지속적으로 규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고도로 발달했지만 그만큼 성장 동력이 떨어져 사실상 내리막길을 앞둔 21세기, 한국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적어도 파국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개인이 집단에 종속되는 상황을 탈피하여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가급적)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비단 사적 영역에서만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적 영역의 자아와 공적 영역의 자아가 하나가 되고, 그렇게 나의 의지와 주장이 나의 행동으로 드러나도 아무런 질타나 비난을 받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한국 사회가 그런 곳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멀어 보이지만, 내가 당신에게, 당신이 나에게서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한국 사회는 급속도로 발전한 물질문명과 발을 맞추어 그 의식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빨리 나아온 만큼 그 성장통과 부작용은 당연히 있기 마련이며, 꽤나 클 수밖에 없다. 그러 발전할 대로 발전한 지금, 계속해서 눈앞만 보기보단 미래를 위해 과거의 유산과 잔재를 털어내고 지금의 나와 훗날의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하겠다. 이는 정부가 정책을 시행하고 돈을 쏟아붓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 무엇보다 개개인의 의식적 각성과 변화가 절실한 시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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