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브런치에서 한국 사회의 ‘신뢰’에 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글의 작성자는 한국 사회에서 공적 신뢰도는 전반적으로 낮으나, 사적 신뢰는 그렇지 않음을 여러 수치와 지표를 통해 제시했는데, 그 글을 처음 읽을 당시만 해도 나는 그 글에 크게 공감하며 그가 타당한 분석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과연 한국 사회의 사적 신뢰가 높은가에 대해 강한 회의감을 품고 있다. 누군가는 '한국인은 전반적으로 심성이 착하여 타인을 선대하고 서로를 잘 돌볼 줄 안다'라며 이 글을 반박하거나 얼굴을 찌푸린 채 그냥 글을 넘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신뢰는커녕 불신으로 가득 찬 곳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이상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다.
이 글을 통해, 나는 왜 한국 사회에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은 여행하기에 꽤나 좋은 곳으로 꼽힌다. 관광 대국인 일본이나 대만 정도는 아니지만 주요 대도시만 다녀도 나름 괜찮은 곳이고, 무엇보다 영미권이나 (북/서)유럽권 거주자 입장에서는 이만큼 물가가 저렴한 곳도 없다. 특히 북유럽 지역에서는 외식 물가가 너무 비싸 대부분 음식을 해 먹는 문화이기에, 한국인 입장에선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나라가 또 얼마나 있을까 싶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적은 금액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국 사회는 신속함과 편리성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만약 전쟁이 없었더라면 그렇게까지 급속도로 발전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대사건을 겪고 폐허가 된 나라에서 가릴 게 무엇이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시 표현을 빌리자면) '북쪽의 공산 괴뢰'와의 체제 경쟁 때문에라도 기를 쓰고 사회를 재건하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한국에 비하면 꽤나 '슬로우 라이프'를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타국인의 관점에서 한국은 꽤나 매력적인 나라다. 더군다나 식당에 가면 나오는 여러 가지의 반찬을 보며 '이걸 공짜로 준다고?' 하고 생각하며 그 특유의 식문화에 감탄할지도 모른다. 국외에 가 본 이라면 알겠지만 다른 나라에선 아예 물조차 주지 않는 식당이 적지 않다. 반찬은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여기선 반찬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외국인에게 한국은 참으로 많이 베푸는(?) 나라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일 감탄하는 부분은 따로 있는데, 바로 특정 공간에서 잠깐 물건을 두고 자리를 비워도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한국인인 내가 생각해도 한국의 긍정적 특징이라 할 만하다. 외국에서 지갑, 핸드폰, 가방을 두고 화장실에 갔다간 그새 털리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곳의 도둑들에게 이런 행동은 "내 물건 여기 두니 가져가쇼~." 하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오히려 이를 잃어버리면 "그러게 누가 두고 가래?"라는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자신의 물건을 잠시 자리에 둔다 해도 사람들의 눈초리가 감히 그것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한다.
만약 이런 것이 한국 사회의 '높은 사적 신뢰'에 해당한다면,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당장 그렇다고 말할지 모른다. 나 또한 한때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으니 이해는 된다.
그러나 난 이것이 진정 한국 사회가 끊임없이 추락하는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도와는 달리 그나마 적정 수준으로 유지되는 사적 신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래와 같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범죄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은 '사적 및 공적 감시망'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타인이 내 물건을 가져가지 않으리란 심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서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도 본다. 하지만 막연한 기대나 믿음을 가지고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서로를 비교적 신뢰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한 사회의 사적 신뢰란 한 가지의 집단적 행동 양식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소매치기와 같은 도둑질이 빈번한 외국 사회에서 과연 '남의 것을 훔치라' 교육받고, 그런 가르침이 사회적으로 전수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둑질은 어느 나라에서나 미덕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도둑질이 미덕인 나라는 독재나 내전 등으로 국가가 막장 수준으로 치달은 몇몇 국가밖에 없다(대표적으로 '소말리아'). 그러나 이는 해당 국가의 역사 및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생존하게 된 경우이므로 전혀 정상적이지 않은 사례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국가에서 대놓고 '남을 등쳐먹으라'거나 '타인의 물건을 탈취/편취하라' 교육 내지는 독려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흔히 '선진국'의 범주에 포함되는 서유럽 사회에서조차 소매치기와 강도질은 그리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 잘사는 나라에서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아무래도 주된 원인으로 해당 국가에서 강력한 경찰력을 행사하거나 경찰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지 않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도 문제인 것이, 빈번히 발생하는 범죄를 막는 명목이라고 해도 강력한 경찰력을 행사하거나 경찰력이 대대적으로 동원되는 것은 공안 사회로 접어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물론 범죄 예방은 필요한 작업이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될 수 있기에 오히려 비정상적인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동아시아 지역과는 달리 여러 요인으로 인해 유럽 지역에 다문화 물결이 한창 밀려드는 중이란 점을 들 수 있겠다. 여행을 통한 자발적 유입이든, 국내 분쟁으로 인한 반(半 내지 反)자발적 유입이든 간에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이들이 체류·거주하고 있는데, 특히 여행객의 경우 잠깐 있다 귀국하기 때문에 도난과 같은 경범죄에는 상대적으로 대응하기가 곤란하다는 점을 간파한 일부 악한(惡漢)들이 개별적 내지 조직적으로 범죄 행위에 가담하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위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기본적으로 한국에는 '한민족'을 제외한 다른 구성원이 거의 거주·체류하지 않고 있다. 있어 봤자 유학이나 생업을 목적으로 하는 소수의 타국 출신자가 전부인데, 그들이 대개 자국 출신들과 어울리는 점을 고려하면 유럽처럼 '가시적으로 구분되는 특징'을 지닌 이들을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혈통적 다양성이 적은 한국 사회에서 외인(外人)이 많이 유입되는 일은 드물며, 외국인이 있어도 대개 일정 기간 이상 체류 및 거주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외부자 대상의 도난 사건이 많이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가 없는 환경이다.
단, 이것으로는 자국인 대상의 도난 범죄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사실을 설명하긴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왜 대체적으로 타인의 물건을 건드리지 않는 편인가?
나는 이 이유로 한국인의 사적 신뢰도가 높아서라기보다는, 과학기술을 활용한 범죄 통제 체계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꼽는다. CCTV의 설치 비율이 상당히 높아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가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 범인을 (그리 늦지 않게) 색출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한국인이 타인의 물건에 손을 잘 대지 않는 지대한 이유인 것이다. 경찰에 신고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것이 한국의 방범 체계로, 심심찮게 뉴스를 통해 도난 사건의 범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경찰 수사와 검찰 기소의 표적이 될 이유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국인 특유의 '번거로움을 기피하는 성향', 즉 일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성향도 한몫한다. 목소리를 내야만 자신의 권익이 온전히 보장받는 상황(예를 들면 시간제 노동자가 주휴수당이나 추가수당을 받지 못한 경우)이라 할지라도 당장 자신에게 손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거나 받으나 안 받으나 그만이라 생각되면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것이 한국인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것이 관습화된 질서이자 미덕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러한 질서를 깨고 미덕을 해침으로써 법적 처분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비난받는 상황을 자처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조용히 사는 편이 좋은데 뭐 하러 그런 일에 연루되겠는가?
이런 점으로 보아 '사적 신뢰'가 높아서 도난 사건 발생 비율이 낮다기보다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한국인의 성향 자체가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다. 사적 및 공적 감시망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은 모르는 이와의 접촉에 우호 내지 중립적이지 않다.
한국인이 '게스트 하우스'나 '도미토리'라 불리는 해외 숙박 시설에 체류할 때 가장 놀라는(경악하는) 점은 바로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한 방에서 침대를 나누어 쉬고 잠을 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일은 거의 없다. 문화적 영향 및 범죄 예방을 이유로 남성과 여성의 휴게 공간을 철저히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여자가 있든 없든, 남자가 있든 없든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점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문화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외국 사회의 사적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낮다면, 이런 형태의 숙박 공간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도난 사건은 충분히 있을 수 있으나, 이성(심지어는 동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 사건이 발생할 위험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면식도 없는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긴장을 놓은 채 쉰다? 사적 신뢰도가 바닥을 기는 곳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숙박 시설은 존재해서도 안 된다.
'징병제'를 예로 들 수도 있다. 징병제 시행 국가인 노르웨이와 이스라엘의 경우를 보자. 한국에서 여성 징병이 아직 고려되지 않는 이유로 군대 내 (양)성평등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드는 경우가 많은데, 위의 두 국가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같은 생활관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내겠는가? 단지 국가가 법적으로 징병을 강제해서? 성별간 상호 신뢰도가 매우 낮은 상황에서 징병제가 시행된다면 아무리 개인주의적이고 소극적인 생활 방식을 선호하는 노르웨이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날 것이며, 역사적으로 인권 침해에 매우 민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욱 거세게 반정부 시위를 전개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왜냐? 기본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대상이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이란 인식이 있기 때문이고, 더불어 지내는 것에 문제 의식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무라 어쩔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는 있겠으나, 행동의 법적 강제에 저항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곳에서 단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미덕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 타자에 대한 경계심이 한층 강화된 계기로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을 들 수 있다.
2020년 2월 중순, 한국에서는 최초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규모 유행이 발생했다. 그 진원지로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하 '신천지')이라는 신흥 종교의 집회가 지목되었다. 그 종교가 진정 종교인지, 그리고 그 신도들을 향한 마녀사냥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신천지는 어마어마한 융단 폭격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그 종교에 관심도 없던 이들이 언론 보도를 통해 신천지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피상적으로나마 접하게 되었고,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던 신흥 종교가 사실은 전국적 망을 형성하였을뿐만 아니라 꽤나 큰 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이에 대한 경각심이 일시적으로 높아졌다. 특히 신천지의 경우 절대적 비율로 '거짓된 방식의 전도' 방식을 주로 사용해 왔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자 사람들은 더더욱 모르는 사람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게 되었다. 안 그래도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낮지 않은데, '바이러스 유행'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특정 집단에 대해 계속되는 언론 보도 등으로 경계심이 더욱 강화되고 만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길을 물으려 누군가에게 다가가도 매서운 눈초리로 "아, 됐어요." 하고 지나친다거나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아예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이 '목적성(주로 종교/금전적 이유)'을 갖고 있다고 치부해버리기 때문에 생기는 일인데,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회의 사적 신뢰도가 과연 높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강한 의문이 든다.
이제 한국 사회의 신뢰도가 높지 않다는 것에 대한 마지막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은 '타인의 행동이 자신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신뢰란 기본적으로 내게 무슨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란 긍정적 인식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신뢰가 높은 사회에서는 타인이 어떻게 행동하든 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실제로 또는 이상적으로) 서로 다른 개인이 공통적으로 타인에게 내 행동이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란 인식으로 행동한다. 이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보이는 모습이나 취하는 행동이 나(와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적 신뢰가 높은 사회에서는 발언이나 행동이 비교적 자유롭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타인과의 관계, 다른 이의 행동과 사고 방식에 상당히 민감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집단주의가 행동과 사고의 본위였기 때문에 현대화·서구화된 지금조차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누군가의 눈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사회에서 누군가가 '신뢰도가 높다' 말한다면, 이는 사실 열에 아홉은 다수가 집단 논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실제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믿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을 벗어나(려)는 이가 발생하는 순간 그것은 곧 '모두'를 대상으로 칼을 뽑는 행위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이에 굴복하거나 순응하는 것일 뿐이다.
신뢰가 일상 영역에서의 긍정적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과 집단주의가 대체 무슨 관계냐고? 신뢰는 제도가 아닌 인식과 문화의 영역이다. 국가에서 강제로 타인을 신뢰하라 해서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다면 개인의 인식과 사회의 문화가 신뢰의 정도를 결정하는 것인데, 이 신뢰란 것은 내가 기대하는 대로 타인이 행동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한국 사회는 그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로 인해 획일화된 생활 방식이 자리잡혀 있기 때문에, 만약 이를 거부하고 '나'의 뜻대로 행동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에 균열이 발생하여 '행동에 대한 기대'가 깨질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으로써 '튀는 행동'을 하는 이가 내게 해를 끼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그 사회의 신뢰는 깨지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집단주의 사회와 신뢰의 관계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의 행동을 보이도록 요구하는 사회에서는 집단 논리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이 사회적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개인 간의 신뢰를 제고하는 형태라면, 이것을 일러 과연 사적 신뢰도가 높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한국 사회는 그 물적 기반(이조차 편차가 매우 크지만)과는 달리 정신적 기반은 상당히 황폐화되어 있다. 개인이 개인을 경계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정치 집단은 말로는 '연대'를 외치나 실제로는 이에 관심조차 없으며, 관심이 있다는 이들은 이를 국가(정부)라는 권위에 의거하여 실현하려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치게 어떤 의제/화제에 민감한 점도 한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주요인이다. 무슨 흉악 범죄가 일어나면 마치 내 근처나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공포감을 느끼는 것이 이 사회의 모습 아닌가? 안심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해서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시대에, 단순히 개인이 개인을 선대하고 경계하지 않는 것과, 사회 차원에서 그러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은 매우 다른 영역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신뢰도가 낮아지면, 그만큼 개인이 신경 써야 할 일이 과거에 비해 많아진다. 길 조심, 차 조심에 '사람 조심'이 늘 따라붙는 것이 현실이고, 언제 어디서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우려와, 타인의 행위로부터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결코 낮지 않은데다, 개인의 정치적 이념이 극단화되고 정치 세력간 투쟁으로 인해 사회적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신뢰'라는 정신적 자원이 결여되어 있다.
이 글을 통해 '어떻게 하면 신뢰를 제고할 수 있다' 말할 생각은 없다. 방법은 결국 개개인의 의식적 전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수많은 소식을 선별해서 수용할 줄 알고, 외부 사건이나 존재가 내게 영향을 끼칠 것이란 우려를 줄임으로써 조금 더 사람과 세상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려는 태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이런 상황을 무슨 정치인이나 정부가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면 초점이 어긋나도 제대로 어긋난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에서 '사회적 가치'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의미와 지위를 갖지만, 현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바닥을 기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완화해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다만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신뢰의 힘을 믿고, 또 개인 간의 결속을 중시하는 이들의 고민과 실천이다. 신뢰가 부족하다 지적하는 것과, 별 수 없으니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니 말이다. 이 글의 문제 의식도 결국 이와 맞닿아 있다. 무조건 상황을 낙관하지는 말되, 그렇다고 내팽개치지는 말자는 것이다. 여러모로 답이 없어 보이는 이 어려운 시대에, '사람'을 향한 개개인의 신뢰와 연민, 그리고 우애는 분명 드러나지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빛이 되어 반짝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