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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May 01. 2023

만국의 노동자여, 평등해져라!

그리고 행복해져라!

몇 년 전부터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계신 엄마와, 올해부터 조그마한 조경 회사에 들어가셔서 처음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하고 계신 아빠. 엄마는 자녀들을 키우시느라 집에 계셨지만, 막내가 중학생이 되자 아이 돌보미(굳이 영어로 하자면 베이비시터)를 거쳐 요양보호사가 되고, 아빠는 이른바 '건설근로자', 달리 말하면 일용직 노동자로 수십 년을 계시다가 지인 분의 추천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 업체에 소속되다.


아빠는 20년 전에도, 20년 후인 지금도 주6일제 근무를 안 하신 적이 없다. 일이 있으면 나가는, 아니, 나가야 하는 일용 노동자의 특성상 주말에 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일요일에 교회를 나가시니 쉬신다고 할 수도 없거니와, 그나마 종교 활동이 끝나는 오후부터는 집일을 하신다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으시고 저녁이 될 때까지 내내 밖에 계신다. 그렇게 햇빛과 늘 붙어 계시다 보니 아빠의 얼굴과 목은 마치 그 아랫 부분과 연결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꽤나 까맣게 그을려 있어서, 더 가다간 얼굴과 얼굴이 아닌 부위가 완전히 따로 놀 것 같아 선크림을 좀 바르시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그러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엄마는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된 2020년부터 요양보호사를 하셨다. 형식적으로는 주5일제라 이틀의 쉼이 보장되기는 하는데, 문제는 이 문자적으로 적용되다 보니 명절이나 공휴일에도 일을 가셔야 한다는 것이다(난 이것이 순전히 업주들의 돈독 때문이라고 본다). 아무리 혼자 지내는 노인들이 있다지만 그들을 위해 당연한 권리마저 반납하고 출근하는 이들에 대한 추가적 보상이나 휴식은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요양보호사는 서비스직에 해당되는데 서비스직이라 하기도 뭐할 정도로 몸을 많이 써야 하는 직업이다. 온종일 센터 안에서 움직이며 시설 노인들을 돌보아야 하고, 마치 부모가 어린 자녀를 대하듯 식사부터 목욕, 기저귀 가는 것까지 일일이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나마 문제 없던 허리가 말썽을 부려 끝내 척추협착증이 왔고, 결국 수술을 받으신 후 1년 가량 쉬시다 다시 업무에 복귀하셨다.


우리 집의 형편을 고려하면 중산층이라 해야 할지, 그 아래인 서민층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서민층이라 하기엔 엄청 어렵지는 않지만 중산층이라 하기엔 꽤나 위태롭다. 아마 그 경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건실한 중산층'에 해당되면 이에 해당되지 않는 이들에 비해 재산 걱정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집은 재산 걱정을 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부모님께서 건강 문제 등으로 하루씩 일을 빠지시게 되면 생계에 지장이 생기는 구조다.


내가 개신교에 몸을 담았을 때 약간 흥미를 가졌던 개념이 '희년'이다. 희년은 순전히 종교적 개념으로서 달리 말하면 안식년인데, 유대교의 희년은 49년을 주기로 모든 소유가 일절 환원되어 노예는 해방되고, 토지 또한 더는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즉 50년째 되는 그 해에는 그 어떤 예속물도 누군가에/어딘가에 매이지 않은 채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개념이다(심지어 50년째 되는 해에는 타인에게 진 빚도 신의 뜻에 의해 탕감된다.). 성서에 따르면 유대교의 신이 고대 히브리 민족으로 하여금 '모든 만물은 나의 소유'임을 깨닫게 할 목적으로 희년을 선포한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인과 같이 소유 개념을 갖고 있던 고대인에게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실로 혁명적인 개념이었던 것이다.


최근에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를 좀 풀자면, 한국 사회는 인간 존재의 한 유형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 일하는 인간)를 택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그 대가로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노는 인간)를 포기함으로써 휴식을 사치로, 쉼을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악덕으로 간주해 왔으며, 이렇게 형성된 과노동(과로) 사회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지 못한 채 극단적이게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늘어 왔음에도 이 굴레를 끊지 않은 채 계속해서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주6일 수업이 당연했고, (시기를 잘 타고난 것인지 몰라도) 초등학교 1학년 때엔 토요일 4교시, 초등학교 2-3학년 즈음부터 '놀토' 개념 등장, 그 이후 본격적으로 토요일 전면 등교 중단이 시행됨으로써 주5일제 수업이 정착되었다. 기업에서의 주5일제 시행도 이 시기와 맞물린다. 이게 20년 전 얘기인데, 이 말인즉 수많은 한국인은 지난 수십 년간 개인의 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사회와 국가가 정한 대로 야근을 포함한 과노동에 시달려 왔다는 것이고, 그 야근의 잔재를 미처 떨쳐버리지 못한 채 겨우겨우 주5일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5일제 근무가 정착된 2023년 현재에도 이를 남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흔히 '노동자'라 하는, 대개 육체 노동이나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엄연히 말해 노동자나 근로자나 똑같은 말이다. 다만 내포하는 의미가 다소 다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노동자'라 하면 그놈의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노조를 구성하여 기업(주)을 못살게 구는 인간들'을 생각하는데, 난 그러한 편향적 인식이 한국 사회가 과노동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 여전히 작지 않은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국가와 사회에 의해 근로자와 노동자의 용례가 강제로 분리되고, 스스로를 근로자로 인식하는 이와 노동자로 생각하는 이 사이에 괴리감이 커질수록 용어적 차이가 사상적 차이로 연결됨으로써 갈등 요소로 부각되는 반면 실질적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의 휴식권 문제는 그만큼 등한시되는 느낌이 적지 않은 것이다.


기계적인 주5일제의 적용을 받으시는 엄마, 주5일제란 사전에나 존재하는 개념일 뿐인 아빠. 엄마는 '근로자의 날' 혹은 '노동절'인 오늘도 노인들을 돌보기 위해 일터로 향하셨고, '집일을 좀 하려 하니 오늘은 쉬겠다' 하신 아빠는 업주의 권유 아닌 권유를 못 이기셔서 회사 야유회를 가셨다(내 이성이 뜨인 이래 아빠가 회사 아유회를 가신 것은 처음이다.). 도무지 집에 가만히 계시지를 못하는 아빠 특성상 쉬는 날이 의미가 없긴 하지만,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향상을 위해 마련된, 거의 국제적인 기념일인 5월 1일 오늘마저 아빠는 당신 마음대로 보내지 못하게 되셨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것임을 안다.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사회가 돌아가지. 음식점 주인들이 다 쉬어 봐. 쉬는 날에 외식이라도 하겠어?"

"아무도 이날 일을 안 하면 회사가 어떻게 유지되나? 그러니까 다 쉬고 싶어도 나와서 일해야지."


누군가의 쉼을 위해 누군가의 노동이 수반되어야 함을 정확히 짚었다. 참으로 현실적이다. 그래서 참으로 냉혹하다. 마치 인간의 쉼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고, 그러니 그냥 일하라고, 그것이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리 말하는 이들은 사업자일 수도 있고, 노동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서글픈 것은, 누가 이렇게 말하든 간에, 결국 누군가는 어떤 일을 한다는 이유로 조금의 쉼을 더 보장받지만,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 쉼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이 '사회 유지'를 명목으로 합리화되어 반드시 쉬어야 하는 사람과 쉬어서는 안 되는 사람(또는 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나뉜다는 것이야말로 노동에 있어 가장 서글픈 일이다.


주69시간제의 논리로 '형편이 어려워 더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를 법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노동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이해는 된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다. 과연 그들이 전적인 자발로 추가 노동(과노동)을 원하는 것일까? NO. 전혀. 단언컨대 이 세상 어디에도 알아서 더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혹여 있다면, 그들을 일러 '워커 홀릭'이라 부를 텐데, 이는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 중독'으로서 자기 계발과 보람이라는 포장 아래 자행되는 자기 파멸일 뿐이다. 노동을 해야 소비할 수단과 권리를 얻지만, 이를 위해 노동에 종속되어 결국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란 존재...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용어 중 하나인, 위에 언급한 '호모 파베르'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든, 동물의 것과는 달리 정교한 형태의 공작(工作)을 할 줄 아는 존재임을 이르는 학문/중립적 의미이든 간에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 있어서는 절대 긍정적이지만은 아닌, 오히려 이제는 대놓고 부정적이라고 해도 무방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종교가 없는 입장이지만, 기독교에서 노동을 일러 저주라 일컫는 것이 십분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물론 맥락은 '신의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써 따른 대가'라는 점에서 다르지만 말이다.).


요즈음 나는 인간 평등이란 말은 그저 그럴듯한, 사탕발림에 불과한 개념이란 가치관을 확고히 했다. 근대 국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 한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계층', 즉 상행위를 통해 재산을 축적하였으나 신분제의 한계로 언제 지배 계층에게 소유권을 침해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처한 신흥 세력의 자유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을 뿐이다. 다만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지면 혁명에의 동력이 떨어지니 이를 '만인의 자유와 그 평등'이란 아주 매력적이고 솔깃한 개념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민중 입장에서야 부르주아나 자기네나 지배 계급의 압제에 시달리는 것은 매한가지니 '우리 인간은 모두 자유롭고 평등해요!'라는 그들의 그럴듯한 구호에 호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인데, 이것이 당장은 입헌주의 또는 민주공화정의 성립으로 제도화되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금 상이한 집단과 세력 간에 격차가 유발되어 실질적 계급 사회가 도래하였다는 것에는 그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격차를 순전히 개인의 노력 타령하며 정당화하기에는, 고전적(=근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는 소수의 전유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로 나는 자유의 평등, 평등의 자유가 실현될 수 없는, 또는 실현되지 않고 있는 사회가 너무나 안타깝다. 비록 개인주의를 추구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과 분리되는 일은 존재할 수 없다. 국가가 있건 없건 사람은 살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연결성은 곧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명명하게 했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다른 이의 존재에 의지하여 자신의 일을 해 나간다. 이 기본적이고도 당연해 보이는 원칙이, 정작 본질적으로 실현된 적 없고, 앞으로 실현될지조차 미지수인 현 상황에서, 아무리 추가급을 받는다 한들 '근로자의 날'에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나, 우리 엄마나 아빠와 같이 추가급은 꿈도 못 꾼 채 일터로 향해야 하는 이들에게 과연 휴식이란 유의미한지, 그들에게 '여유'를 운운하는 것이 합당한지와 같은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분명 내가 어릴 때엔 엄마도 책을 읽으셨는데, 근 십 년간은 그럴 여유 없이 지내셨다는 사실은(마지막으로 읽으신 책이 <엄마를 부탁해>란 도서였다.), 인간에게 노동이란 더는 자아 실현과 유희, 쾌락, 행복을 경험케 하는 가치 있는 대상이 아닌, 인간을 계속해서 쳇바퀴 속에 가둠으로써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차단하고, 사회에 대한 생각을 마비시키는 아편과 같은 대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21세기 인류에게 노동이란,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그 무언가일까? 아니, 애초에 인간에게 노동이란 단 한 순간이라도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그 무언가였나?




오후 5시 9분이다. 평소 같으면 이쯤 돌아오셨을 아빠는 아직 무소식이시고, 엄마는 1시간 후에야 집에 도착하실 것이다. 그나마 오늘이 근로자의 날이란 걸 아셔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러면 뭐 해. 결국 두 분께선 집에 안 계신걸.


씁쓸하기 그지없다. 일이라, 노동이라, 인간이라....


노동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노동이 삶의 유지에 있어 유일한 수단인 모든 이에게, 아무리 외쳐도 닿지 않을 나의 위로를 전한다. 그리고 자신의 노동으로 누군가의 (인간다운) 삶이 유지되도록 하는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인간이 진정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날, 특히 그놈의 원수 같은 노동에서 해방될 날,

올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오지는 않겠지만, 그렇더라도, 그래서 막연하게 기대는 해 보련다.


만국의 노동자여, 평등해져라!

그리고 행복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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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아빠가 막 오리배 사진을 보내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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