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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선 틀기 Dec 28. 2023

유한한 건반에서 피어난 무한한 예술의 바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


'문화가 있는 날' 덕에 평소보다 덜한 부담으로 영화 두 편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오늘 낮에 본 <피아니스트의 전설>과 저녁에 본 개봉작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는 모두 피아노와 진하게 연고가 있는 어느 예술가를 조명한다. 두 편을 모두 관람한 후 묘하게 나인틴 헌드레드와 류이치 사카모토가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배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육지에 발을 디딘 적 없는 나인틴 헌드레드. 피아노 천재인 그의 범상치 않은 예술성을 보면서 그가 땅을 밟지 않는 이유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긴 했다. 그러다 그는 육지에서 바다 소리를 듣고자 드디어 배에서 내려보기로 결심했으나...내려가던 계단에서 발걸음을 돌려 다시 배로 올라탄다. 왜일까, 많이 궁금했었다. 그 이유는 나인틴 헌드레드의 절친한 벗이자 유람선의 음악 동지인 트럼펫 연주가 맥스와의 대화를 통해 유추가 가능했다. 



피아노를 봐.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지. 어느 피아노나 건반은 88개야.
그건 무섭지가 않아. 무서운 건 세상이야.
건반들로 만드는 음악은 무한하지. 그건 견딜 만해. 좋아한다구.
하지만 막 배에서 내리려고 했을 때, 수백만 개의 건반이 보였어.
너무 많아서 절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것 같은 수백만 개의 건반...그걸론 연주를 할 수가 없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두려움을 듣기 좋게 포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아주 모르는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쥔 게 너무 많다보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지 감조차 잡히지 않으니까. 반면 자신이 손에 쥘 수 있는 적당한 도구로 자신만의 세계를 일궈나가는 것은 누군가에겐 큰 기쁨이자 자유, 해방일테니.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유한한 건반으로 무한한 창조 속 세계에서 살기를 꿈꿨던, 나인틴 헌드레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다. 결국 그는 원하던 대로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음악과 함께 무한한 세계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어울리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격언은 저녁에 관람한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에서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관람 굿즈로 매표소에서 받은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의 팜플렛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문장이었다. <류이치 사카모토 : 오퍼스>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임종 전 그의 음악 생애 중 만든 20곡을 직접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귀에 익은 곡들도 있고, 영화 OST로는 <전장의 크리스마스>, <마지막 사랑>, <마지막 황제>, 그리고 그의 스크린 음악 유작이 된 <괴물>까지 영화의 감동을 재현해내는 곡들로 가득 차 있다.


2시간 가량 펼쳐지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 모습을 보며 만감이 꽤나 교차했다. 그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빚어내는 음들은, 흑백인 이 영화에 색채감이 불어 넣어진 듯한 환상을 가져다주었다. 낮에 봤던 나인틴 헌드레드처럼, 사카모토 역시 유한한 건반에서 아름답고, 자유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음악으로써 그의 세계를 체험하며 공유하는 우리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은 이 작곡가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피아노를 매개로 한 두 예술가의 이야기가, 오늘 우연하게도 운명적인 조합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품으로서 영화에 대한 만족감과는 별개로, 경이로운 영화적 체험으로 기억하고 싶다. 유한한 건반 안에서 무한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바다를 창조해 남긴, 나인틴 헌드레드와 류이치 사카모토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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