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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평선 틀기 Sep 23. 2023

김 모 씨 덕질기

“네? 누구요?”

“아, 김ㅇㅇ씨요.”

“아니, 정말요? 의외에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의 덕질 경험을 돌아가며 이야기할 때마다 내게 발생하는 익숙한 대화다. 락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90년대 가요계에 한 획을 그었던 가수 김 모 씨. 내 첫번째 덕질의 주인공이다.


중학교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9월에, 나는 당시 선풍적이었던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 모 씨를 처음 알게 됐다. 나는 TV에서 그의 무대를 처음 본 날을 잊을 수 없다. 가왕 조용필의 노래를 편곡해서 나왔던 록커 김 모 씨는 내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샤우팅과 헤드뱅잉을 선보이며 내 귀와 눈을 사로 잡았다.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에는 충격감뿐만 아니라 일종의 경외감도 포함돼 있었다. 헤비메탈이란 장르가 으레 그렇듯이, 통상적으로 예상되는 인간의 감정 표출의 임계치가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넘어선 것이다. 그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나도 모르게 이끌려 가며 나는 아저씨 록커를 좋아하는 중학생이 되어버렸다. 김 모 씨는 열 네 살의 내게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어준 사람과도 같았다.


록커 아저씨를 덕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급 친구들이 모두 EXO를 쫓아다닐 때 나는 그가 데뷔했던 1994년부터의 앨범들을 홀로 섭렵하곤 했다. 5옥타브까지 날카롭게 뚫고 올라가던 그의 90년대 전성기 시절 앨범부터, 성대결절을 두 차례 겪은 후 그로울링으로 창법을 바꾸며 이전보다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2000년대 후반 앨범까지, 김 모 씨의 20년 음악을 따라다니며 나는 내가 가보지 못했던 시간으로의 여행을 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록의 매력을 모르는 너희들, 아직 세상 구경을 덜 해 불쌍하구나’ 라는 생각으로 으쓱거리며, 외롭긴 해도 자부심을 한 스푼 곁들인 덕질 생활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나는 학창시절 상당히 조용한 이미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나의 덕질을 고백할 때마다 나의 의외성에 몹시 당황해하거나 웃음보를 터뜨리는 상대방을 넉살좋게 포용할 수도 있어야 했다.


그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은 콘서트다. 나는 김 모 씨의 콘서트를 총 세 번 갔고, 그 중 두 번은 아빠와 입장하고 한 번은 내가 아빠를 졸라 혼자 들어가게 되었다. 콘서트 관객은 대부분 김 모 씨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중년 여성들이었다. 홀로 등장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에 같은 열에 앉은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몇 살이냐,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 헤드뱅잉은 좀 하냐…쏟아지는 이들의 관심이 무섭기도 했지만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했다. 옆 좌석 관객들이 콘서트 내내 상모돌리기 하듯 과격하게 머리를 흔들어대는 것을 보며, ‘나도 집에서 헤드뱅잉을 미리 연습해왔으면 덜 민망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는 꽤 오랜 기간 김 모 씨를 덕질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사람으로서도 김 모 씨가 배울 점이 많은 어른이라는 생각을 했다. 록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꿋꿋이 록 외길 인생을 걸어온 그였다. 소속사의 배신, 두 번의 성대결절과 희귀병 진단 등 드라마 설정도 이 정도면 과하다 싶을 만큼 온갖 악재가 겹쳤던 그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 는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음악에 대한 사랑 하나로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제 2의 전성기를 연 그의 인생이 10대 시절 내 눈에는 너무도 귀해보였다. 순수함이 원동력이 되어 나아가는 삶 말이다.


스쿨 오브 락 (School of Rock, 2003) | 씨네21


록은 아주 시끄럽고 폭발적이지만 가장 순수한 장르 중 하나다. 록 음악의 가사를 통계 내 보면 ‘죽는 날까지’라는 말이 일등을 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듯 내가 정의하는 록은 ‘온 생을 사람과 세상에의 사랑에 거는 음악’이다. 김 모 씨가 내게 남겨준 것은 바로 그런 순수함이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희망이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런 순수한 연인과의 사랑을, 꿈을, 혹은 세상에의 도전을 마주하게 될 거란 희망의 가능성을 김 모 씨의 음악을 통해 처음으로 품어봤다. 그리하여 어떤 대상을 향한 뜨거운 존경, 그게 나만의 사랑이라고 내 나이 열 다섯에 정의내린 것도 모두 김 모 씨 덕분이다.


고등학교 진학 이후 입시 준비로 바빠지며 나는 김 모 씨의 덕질로부터 점점 손을 놓게 됐다. 솔직해지자면 입시 탓만은 아니었다. 예능에서 희화화되곤 했던 그의 모습 때문인지, 나보다 서른 살 정도 나이가 많은 탓인지, 김 모 씨의 팬이라고 밝혔을 때 나를 우스꽝스럽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과거 덕질 이력을 숨기기 시작했다. 노래방에서 자신 있게 부르곤 했던 그의 히트곡들도, 그의 노래를 잘 모르는 친구들을 보며 점차 부르지 않게 됐다. 그러다보니 한때 나의 우상이었던 김 모 씨는 어딘가 웃기고, 조금은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내내 김 모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뜬 김 모 씨의 방송 출연 영상을 보다가 그의 근황을 좇게 됐다. 올해 유튜브를 시작한 김 모 씨는 지금 서울 외곽으로 이사해 농사도 짓고, 팬들을 위해 작은 콘서트도 꾸준히 열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는 내가 더 미안해질 정도로 한결같다. ‘단 한 명의 관객이라도 남아있다면 끝까지 노래부른다’ 는 말도,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게 없는 그의 진심이 보인다. 음악에 대한, 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원동력으로 여전히 록 외길인생을 걸어가는 김 모 씨다.


사실 김 모 씨는 이런 글을 싫어할 것 같다. 괜히 낯부끄러워 할 것 같고, ‘거기 학생, 공부나 열심히 하쇼잉’ 이라고 대답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나. 당신이 나의 별나고 가치 있는 첫번째 우상이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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