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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미 Nov 29. 2022

나의 첫 번째 아버지 :: 19살 독립 후 10년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10년이 지났다.  

10년 전 나는 연속 3번 상을 치렀다.

석사를 마무리하며,

내일이면 석사 디펜스가 마무리된다.

사실 2년 전 2차 발표까지 끝내 최종 발표만 남은 상태였지만, 미루고 미루다.

내일 디펜스를 마무리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석사논문 별거 아니라 했지만, 나에게 논문 주제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완성시키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이었다.

혼자서 혹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한 이 과정이 대견하기도, 후련하기도

하여 글을 남겨본다


29살 이제는 한 달이 지나면 무려 30살이 된다.

19살 독립의 시작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이다.


13살 집에 불이나 집이 없어지고, 나는 귀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몸이 약해져 잠도 못 자고 악몽에 시달렸다.

수면제며 신경안정제며 약을 가득 먹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다시는 집에 불이 붙지 않을 거라 안심시키며,

자제 하나하나 같이 고르고 다니며, 직접 내방 위치를 고르면 그 위에 우리 집을 지어주셨다.

자제 값도 부족해 조립식 집을 지었는데,

내가 집이 부끄럽다 말하니 아버지는 우리 집을 내가 좋아했던, 노란색으로 페인트칠해주셨다.


논문 이야기며, 독립 이야기하다 왜 집 이야기인지 말하면

내가 공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때문일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목수’ 일명 ‘노가다 꾼’이었다.

동네 바보에, 내가 아는 것만 위로 5명의 형제가 있고, 돌아가신 것까지면 위로 형제가

7명이 된다는데, 조부모님을 집에 모시는, 효자지만 가족들에게는 힘든 그런 존재였다.


친적들 온다고 물고기를 잡아 놓으면, 고모부는 더러운 물에 잡은 물고기 입에 넣기 싫다 말하고, 친척 언니들은 불이 나기 전 푸세식 화장실이 더럽다고 울며 떼쓰곤 했다.

모아논 돈을 형제에게 사기당하고, 아버지가 책임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부모님까지 모시는 우리 집에게 친척들은 핑계가 필요했던 것 같다, ‘바보 같으니’, ‘내가 너무 어려서 밥 차려줄 사람 없으니 엄마 노릇해야 하는 할머니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할머니는 귀가 안 들리고 걷지도 못했다. 밥은 내가 차리고 아버지는 매번 고향 형제들의 10개가 넘는 논을 노가다 끝나고 농사까지 지어주는데, 고맙다는 말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가 싫었을까,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내가 아버지에게 말을 못되게 하지 말라하면, 사기꾼 데려오지 말라하면 ‘싹수없는 년’, ‘엄마도 없는 년’, ‘엄마를 닮아서’ 그런다 등 악담을 내뱉었다.


불이 난 후 새로 지은 집, 아버지는 바보라, 친척들을 믿고 가구를 맡겼으나 2년도 못가고 다 부서져 버렸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너무 밉기도 바보 같아서 내가 꼭 똑똑해져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붕어빵을 먹고 싶다고 하면, 5000원 있는 지갑 속 2000원을 주며 빵을 먹으라 하고,

공부를 하고 싶다 하면 아무것도 모르니까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는 종이를 kg으로 가져다주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하면 자고 일어나면 필통 속 연필이 다 깎아져 있는데,

내가 혹여나 길가에 넘어서 다쳐오면, 그 자리를 찾아가 시멘트로 턱을 메꿔 놓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나의 아버지를 보고 바보라고 말했다.


그런 나의 바보 같은 아버지에게 나는 내가 뭐가 되면 좋을까 물었고,

아버지는 바보같이 내가 하고 싶은걸 하라 말했다.

그래도 묻고 물으면, 밥은 굶지 말라고 군인을 하라 하셨다. 잘 곳도 주고 밥도 주니까


나는 아버지가 너무 바보 같아서, 꼭 성공해야겠다 생각했다.


근데 내가 사랑하는 아빠가 19살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일도 안돼 같이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 들어간 것도 보지 못한 채 할머니를 따라갔다. 그해 삼촌까지 3개월간 3번의 상을 치렀다.


우리 집에 사는 사람은 할머니, 아버지, 나밖에 없는데

집에 나말고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상을 치르며 내가 들은 말은

‘너를 책임져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공장에 들어가라’,

내가 우리 집에 처음 들어와 들은 말은 아버지의 형제들끼리 ‘세탁기는 누가 가져갈래’하는 말 따위였다.


나는 당시 나름대로 공부도 1등 했는데, 아무도 나에게 꿈을 물어보는 사람도,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지를 않았다.


나는 책임을 져달라고 한 적도, 가져가라 한적도 없는데,

다음에 집에 와 있을 때 시골이여 자물쇠 잠겨져 없던 우리 집에 걸린 자물쇠였다.

땅은 큰아버지 꺼라고, 또 모는 누구 거라고 나는 가족도 집도 추억도 모두 다 뺏겼다.


있지도 않는 재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복지란 없고 사각지대였다.

20살이 되어 대학을 다니는데, 9시 반 수업을 시작해 5시 반이 끝나면 6시부터 12시까지 일을 하고 새벽까지 과제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하필 또 예체능을 해서 밤에 할 수 있는 일은 호프집 서빙밖에 없으니 전공을 잘못 선택했다 생각한 적도 많았다. 방학에는 친구 자취방을 빌려 알바를 하고 다음 학기 기숙사비를 모았다. 그래도 친구들을 잘 사귀어 힘들 때마다 술을 먹는데, 친구들도 나를 바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4년 정도 반복하여 여유가 생겼을 때 고민을 했다.

나는 이제 안정적으로 살아도 되지 않느냐고, 꿈을 포기하고 삶에 맞춰가야 하지 않겠냐고,

그런데, 그냥 잊고 살라하면, 바보를 잊고 새 출발을 할라 하면 나는 포기가 안된다.

이제는 인정을 해야겠다. 힘들어도 더 버텨야 한다고.



대학을 끝내갈 때쯤 집에 가 내 짐을 가져왔다.

그리고 물었다. 나한테 왜 그러냐고, 왜 그랬냐고,

이제는 아버지의 형제들은 나에게 ‘못된 년 배워서 사람 무시한다’ 말한다.


글을 쓰는데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몇 번을 코를 푼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는 바보 같은 아버지 때문이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아버지라, 내가 다 컸지만 못살면 아버지가 욕을 먹을까 봐 무섭고,

아버지 같은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지나치고는 못 살 것 같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너무 많아서 나는 계속 공부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부모를 닮는다고 하여,

꺼내지 못했던 아버지의 이름을 10년 만에 불러본다.


나의 첫 번째 아버지에게,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은 당신을 잊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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