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용화전 서유기 그림 이야기

-멸법국 이야기-②

by 강경구

▢ 어둠 속에 숨는 삼장 일행

멸법국의 국왕이 머리 깎은 스님들을 모두 죽인다는 말을 듣고 손오공은 여관에 투숙한 손님들의 옷을 훔쳐 속인으로 변장하기로 한다. 손오공이 불나방으로 변신하여 불을 끄고 옷을 훔쳐낸다. 삼장 일행은 그 훔쳐낸 옷으로 변장을 하고 여관에 투숙한다. 그런데 잠을 자는 동안 모자가 벗겨져 스님의 정체가 탄로날까 걱정하여 큰 궤짝에 들어가 잠을 자기로 한다.

그날 저녁 도둑이 여관에 들어 큰 궤짝(大柜)을 귀한 보물상자(大貴)로 여겨 그것을 훔쳐가다가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그것을 버리고 달아난다. 관군대장은 궤짝을 포도청에 가져다 지키도록 한 뒤 날이 밝는 대로 왕에게 보고하기로 한다. 그 사이 손오공이 궤짝에 구멍을 내고 밖으로 나와서는 무수한 손오공을 만들어 국왕과 왕비와 궁녀와 백관들의 머리를 모두 깎아 민머리를 만들어버린다. 날이 밝아 민머리가 된 관군대장이 똑같이 민머리를 한 국왕에게 궤짝을 바친다. 궤짝을 열어보니 그곳에서 나오는 것도 민머리를 한 삼장 일행이었다. 국왕은 회개를 하고 불교에 귀의하고, 삼장은 멸법국이었던 이 나라에 법을 흠모하는 나라(欽法國)라는 국명을 지어준다.

【그림-1: 속인의 옷으로 변장하는 삼장 일행】

▢ 무차별의 어둠과 차별의 불빛

민머리를 한 스님들을 죽이는 멸법국의 국왕은 머리칼이 있고 없는지에 따라 죽이고 살린다. 차별적 모양의 장애에 걸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국왕은 모양에 따른 차별로 인해 최고 이익을 누리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국왕의 입장이 되면 우주법계 만사만물이 본질적으로 차별이 없어 모두가 평등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빈곤과 천대 속에서 괴로운 삶을 보내는 사람들이라 해도 만유에 차별이 없다는 이 가르침을 기꺼이 수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 당장은 차별의 밑바닥에 있지만 언젠가는 차별의 최정점에 있을 날을 기약하며 지금·현재의 삶을 소외시키는 것이 그 대부분의 삶의 자세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공통성만 가지고 생각해봐도 이러한 입장은 바로 근거를 상실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최고의 부귀, 최고의 명예라 해도 죽음 앞에 평등해지는 것이 정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차만별의 모양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탕은 동일하다는 통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손오공은 불나방으로 변신한다. 불나방은 불을 향해 달려든다. 이 불나방에는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가 있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나방은 욕망의 불길에 몸을 던지다가 스스로를 불태우는 존재다. 그것은 욕망을 부리다가 욕망에 먹히는 삶에 대한 비유다. 그런데 『서유기』에서는 불나방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에서 불나방은 불성(佛性), 혹은 공성(空性)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불나방이 불을 끄면 어둠이 뒤덮어 만사만물의 차별적 형상이 사라지고 그 공통적 바탕인 공성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손오공이 불나방으로 변신하여 불을 끄는 일은 모든 차별적 현상에 무차별적 공통성이 관통하고 있음을 통찰하는 일에 해당한다. 멸법국 이야기에서는 어둠(무분별의 공성)이 빛(차별적 현상)에 우선한다. 그래서 손오공과 삼장 일행은 시종일관 어둠을 만들어 세상을 어둠 속에 담그고자 하고 자신을 감추고자 한다. 불나방이 되어 불을 끄거나, 등불의 그림자 뒤에 숨거나, 한 점의 빛도 없는 궤짝에 들어가 숙박하는 일 등이 그렇다.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이 사건들은 공성에 대한 통찰의 전면화 과정을 드러내는 장치다. 요컨대 아공我空→법공法空→구공俱空으로 전개되는 통찰의 진화에 대한 형상화에 해당하는 것이다. 통찰의 시작은 불나방으로 변신하여 등불을 끄는 일로 일어난다. 등불을 끄는 순간 세계가 캄캄해진다. 다만 그렇게 불을 끈 손오공은 바로 불나방에서 바로 쥐로 변신한다. 그러니까 공의 실천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쥐로 변한 나도 있고, 밤의 동물인 쥐의 시력으로 세계의 모양을 모두 보고 있으므로 대상세계 역시 그대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주체와 대상이 모두 실재한다는 생각(我有法有)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 첫 번째 통찰, 어둠 속에 숨는 삼장 일행

그런데 이때 손오공은 불나방으로 변신하여 불을 끄면서 이마를 조금 그슬리게 된다. 자아를 허무는 일이 시작되었음을 밝히는 장치다. 자아의 실체성에 대한 회의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공성에 대한 첫 번째 통찰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된다. 삼장 일행은 여관에 투숙하면서 등불의 그림자 뒤에 숨는다. 이로 인해 삼장 일행이라는 주체가 무차별의 어둠에 묻히고 여관주인이라는 대상 세계가 불빛 속에 드러난다. 대상의 차별성은 남았지만 주체의 자아 정체성은 사라진 것이다. 공의 실천으로 보면 아공我空의 구현이고, 임제스님의 4료간으로 보면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이다. 이것은 시작단계다. 원래 이 여관은 ‘오고 가는 장사꾼을 편히 쉬게 한다(安歇往來商賈)’는 상호를 걸고 있다. 오고 감을 쉰 편안함, 즉 중도의 안식을 약속하는 여관인 것이다. 어떻게 해도 아공의 통찰만 가지고는 오고 감을 쉬고 안식할 수 없다. 두 번째 통찰이 필요한 이유다.

【그림-2: 큰 궤짝에 들어가 잠을 자려는 삼장 일행】

▢ 두 번째 통찰, 어둠에 잠긴 세상

두 번째 통찰은 빛 한줄기 없는 캄캄한 궤짝 속에 들어가 잠을 자는 일로 실천된다. 삼장 일행은 자신들의 승려 신분을 감추기 위해 궤짝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 외부의 빛을 막기 위한 조치가 여간 주도면밀한 것이 아니었다. 손오공은 주인을 시켜 궤짝의 자물쇠를 채우게 하고, 못을 박고, 벌어진 틈에 일일이 종이를 발라 빛을 완전히 차단하게 한다. 그리고는 백마까지 끌어다 옆에 묶어 두도록 한다. 이렇게 궤짝 속에 들어간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은 서로를 볼 수도 없고 밖을 볼 수도 없게 된다. 자기의 손조차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아공이고, 밖의 세계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법공이다. 임제스님의 4료간으로 치면 주체와 객체를 모두 부정하는 단계,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이다. 그런데 이것은 손오공 일행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밖의 사람들은 사정이 다르다. 여관에 쳐들어온 강도들은 열쇠로 잠그고 못까지 박은 큰 궤짝을 보면서 그것을 보물이라고 생각하여 욕심을 낸다. 더구나 그 옆에 묶여있는 값비싼 백마는 그 궤짝이 보물상자임을 밝히는 상표와 같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 큰 궤짝(大櫃)의 한문 발음이 크게 귀한 것(大貴)이라는 뜻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이 큰 궤짝, 즉 크게 귀함(大櫃=大貴)은 여관주인의 오래 전에 사별한 남편 조(趙)씨가 남겨놓은 유산이었다. 가만히 그 맥락을 살펴보면 남편의 성씨인 조(趙)는 관조를 의미하는 비칠 조(照)와 발음이 같다. 『서유기』에서는 이 치밀한 장치를 통해 아공법공의 통찰에 도달한 수행자가 공 자체에 집착하는 장애에 걸린 상황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둑들은 큰 궤짝을 보물로 여겨 그것을 훔쳐내서는 동쪽으로 달아난다. 동→서로 가는 것이 서천 여행인데 서→동으로 달아났으므로 수행에 퇴보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아공법공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세 번째 통찰이 필요한 이유다.

▢ 세 번째 통찰, 태양빛 아래 열리는 궤짝

세 번째 통찰은 내려놓음의 연속으로 일어난다. 우선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된 도둑들은 궤짝과 백마를 버리고 달아난다. 이에 관군 대장인 총병總兵은 그것을 관청의 마당에 가져다 두고 지키게 한다. 날이 밝는 대로 왕에게 보고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밤사이 궤짝에 구멍을 내고 나온 손오공이 국왕과 왕후와 궁녀들, 만조백관들의 머리를 모두 깎아버린다. 모두 아연실색하는 중에 관군 대장이 큰 궤짝을 습득한 일을 보고한다. 왕의 명령으로 궤짝의 뚜껑을 열고 보니 4명의 중들이 나타난다. 이렇게 하여 캄캄한 무분별을 특징으로 하는 궤짝 안의 공간은 태양 빛—태양빛은 이전의 등불빛과 대조된다—속에 차별상이 분명한 궤짝 밖의 공간과 하나가 된다. 삼장 일행의 입장에서 보면 분별을 부정하는 캄캄함(空)을 내려놓은 것이고,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머리칼의 유무에 의한 차별이 있다(有)는 고집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찬란한 태양빛 속에 아공법공의 소중한(!) 캄캄함이 사라지고 공조차 공한(俱空) 실상의 자리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본질적 공성과 차별적 현상을 함께 보는 중도의 안목이 확보된 것이다. 그래서 치우친 공관으로 현상의 허무성을 고집하는 나라(滅法國)에서 현상을 받드는 나라(欽法國)로 국호의 개명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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