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여행
몇 번의 울림이 있었을까? 수 없이 많은 표식들을 지나치고, 걷다 보니 둔감해진 탓이겠지. 원망의 마음도 어제의 비와 바람처럼 시원스럽게 녹아내려, 슬픔이란 덫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된 것 같다. 이걸 단단함이라고 표현한다 하지? 이토록 평온한 깃털의 비와 바람들이 위로하듯 차갑게 지나친다.
비워내는 것에도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속상함이 속상함으로 끝나지 않도록 붙들어 메고 추억인 줄 착각했던 젊은 날의 자부심. 그 속상함은 두고두고 쌓여 가상의 원수를 만들고 모든 아픔을 곧 쓰러질 탑처럼 많이도 쌓아 올렸다. 벽돌 하나가 빠지자 우르르 떨어져 나가던 감정들의 파편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
성을 다시 쌓고자 하는 재료로 사용하기에 이미 낡아빠진, 부분 부분이 조각나 버린 것들 뿐이었다.
새로운 재료가 필요하다. 기존과 다른 방식의 재료들을 모으는 여정을 시작하였다.
마음의 여행일지, 행위의 여행일지, 시각의 방대함을 즐길거리로 삼는 단순한 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때는 온마음을 다하고, 재료의 깊이를 하나하나 보살펴가며 길을 만들련다.
성이란 무의미함을 버리고, 혜안의 길을 내고, 간혹 여유가 된다면 신비의 정원을 가꾸기도 해 보는 것이다.
영혼의 울림은 보이지 않아 애타게 하지만, 그러한 애달픈 마음으로 그곳에 닿게 된다는 것이 어린아이 장난 같기도 하며, 깊은 성찰의 끝에 다다른 어떤 이의
깊은 우주 같기도 하다.
고단한 몸일지라도 바란다면, 걷는 것이고 그 걸음들이 헛되이 흐를 것이란 조바심에서 한 걸음 멀어져 그 순간의 체취와 정감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가을의 쌀쌀한 바람은 낙엽의 따스한 채색과 균형을 이루듯 삶의 쌀쌀함에서 따스함을 입히는 시간이다.
산도 계절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누군가를 맞이하고, 그에게 웃는 낯빛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또 그렇게 보려 하면 생각보다 쉬이 볼 수 있게 된다.
북한산의 솟은 봉우리가 표우하는듯한 커다란 함성을 내지르는 날에 옷을 갈아입고, 신나게 뛸 수 있는 나만의 놀이터.
그 길이 어떠한 여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 딛는 그곳은 누구나에게 여행지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자연은 누군가에게 여행지이기도 하며, 지금의 나로서는 가장 안전한 진통제이기도 하다. 그중 사진으로써의 기록은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경례를 하는 듯한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리의 몸가짐이고, 스스로의 사랑이며, 존중이다. 그들은 자연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갈 오래된 스승이자 전승자이기도 한 것이다.
뚜렷이 떠올리는 것이 즐거움일 때가 있었다. 그것이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러한 무모한 장난질을 오래도록 하면서도 스스로 기억이란 감옥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기억이란 것들에 너무 많은 것들을 저장하고 허덕이고, 감당하지 못할 무게들을 잘도 만들어냈었다.
자연 곁에서 멀어지면, 곧 다시 묵직해진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로 비틀거리겠지? 아찔하다.
이미 수 없이 경험을 했고, 언제나처럼 지친 나의 정신은 이들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어느 날에 문득, 멍 때림을 배우기로 한다.
잊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기억할 시간의 틈조차 사라지게 외면하고 회피한다. 생각보다 멍 때리기는 많은 것을 공백으로 남기에, 어느 날엔 코를 바라보고
어느 날에는 먼 하늘을 응시하며, 말이란 것들의 가벼움들을 빠르게 회피한다. 그러한 가벼움이 저 머나먼 시간 속으로 지나쳐 가도록 기억이란 장치에 닿기도 전에 멀리멀리 날려 버린다.
이 또한 자신에게 애쓰는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나라는 사람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저항하는 힘이 강력해질 때 자신을 해치는 줄 모르고 버틴다고 능사가 아니니 말이다. 뒷 목이 뻣뻣해지고, 오바이트가 쏠릴 정도로 견뎌내는 인내의 힘은 강력한 자산이기에 반드시 아껴두었다가 바로 사용할 곳이 생겼을 때 쏟아내야만 한다. 그에 비하면 멍 때리기란 행위는 그저 멍청한 짓거리가 아니다. 그토록 인내의 시간을 버텨낸 자신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평화라는 선물은 오롯이 정신으로부터 이루어지기에 누구나 할 수 있으며, 어디서든 가능하다. 어떠한 일어남이 없는 상태에 들어가기 전, 걷고 뛰고를 반복하며 몸을 달련하고 숨이 차 오르고를 반복하다 평온해질 때의 경험은 정상의 산을 오를 때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경험한 아픔 중, 제일 커다란 죄책감이란 놈을 깡그리 부숴버리고 싶지만, 정신이란 것이 도무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평화를 외치게 된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다”를 되뇌고 외친다. 명상의 상태로 접어들면 그제야 이성을 찾고는 한다. 멍 때리는 기분을 만끽하고 나서야 몸의 평화도 함께 찾아온다.
도약을 하기 전, 그러한 상태를 만드는 것이 누군가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느껴지겠지만, 10년의 세월 동안 얽혀버린 정신의 사슬을 끊어내려 노력한 후에야 안정을 되찾게 된 것처럼, 노력이란 것이 저항을 뜻하는 말이 아닌, 자신을 위해 부단히 애써주는 마음, 그리고 그것의 간절함이 이끈 길 그곳에 아마도 나라는 사람이 간절히 원하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