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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ramram Jul 24. 2022

역시 인생은 모르는 거야.

 요즘 왜 글 안 올려? 벌써 식은 거야?

 뜬금없는 친구의 연락에 뭔가 양심에 찔리는 기분이기도 했지만 농담할 기운은 남아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조회수에 너도 있었구나.

 퇴사하면서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한 가지 약속한 건 매일 최소 2000자 이상 글을 쓰는 것이었다. 매일 딱 4000자(원고지 20매)만 쓴다고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패턴을 따라한 셈이다. 목표를 높게 잡으면 매일의 할당량이 스스로에게 숨어있는 강요 의식에 의해 글을 쓰는 행위가 의무의 개념이 될 것 같아 처음부터 목표를 높게 잡지 않았다. 난 나 자신을 너무도 잘 아는 놈이니까. 

 나를 방 안에 가둬두고 실험용 쥐처럼 테스트를 해보기도 했다. 목차를 전해놓고 스토리가 이미 그려진 에세이 같은 경우에는 3시간 앉아있으면 평균적으로 3500자에서 4000자를 쓸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스토리를 그려놓았다 하더라도 쓰면서 전개가 자주 바뀌는 단편소설 같은 경우는 3시간 앉아있으면 평균적으로 2500자에서 3000자를 쓰는 것 같다. 이러니 2000자는 매일 2시간 정도만 앉아있어도 하루의 목표치를 쉽게 채울 수 있는 수준이다. 사실 이 정도의 속도도 나름대로 괜찮은 속도인 줄 알았지만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들은 5000자도 1, 2시간 만에 쓴다고 한다. 그런 정보를 어디에서 듣고선 존경심과 질투심의 경계에서 혼자 마음이 삐뚤어지기도 했다. 나는 피츠제럴드처럼 좀 신중하게 글을 쓰는 스타일이라 그러면서.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른 거지 뭐. 앞으로도 속도가 늘지 않을 걸 알았나 보다. 

 가끔은 목표치를 넘어 5000자, 6000자를 쓰는 날이 있기도 하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글을 자기만족의 개념으로 쓰고 있어서 그런지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게 유일한 취미이자 삶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근데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왜 괴로워하는 거지?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한 뭐 그런 건가. 나한테 더 이상 실망할 게 남았다고? 아이코. 녀석아. 의사 쌤이 뭐라 그랬어. 자존감을 높이라 그랬잖아. 깜빡하고 오후 약을 안 먹었나 보다.

 진짜 글에 대한 열정이 식었다면 팩트를 콕 집은 친구의 연락이 미웠겠지만 오히려 여유로웠다. 이유가 있었으니까. 조금의 양심이 찔린 이유는 더 부지런해져서 새로운 글을 연재할 수 있는 방법도 있었을 테니까. 약간의 아쉬움 정도로 묻어두고 말았다.

 먼저 완결한 에세이 2편에 대한 원고 투고를 시작했다. 내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포털사이트와 유튜브의 힘을 빌려 며칠 동안 책 출판에 관한 정보를 익혔고 내가 원하는 정보를 다 얻었다고 생각할 때쯤에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아. 생각보다 쉽지 않네.(=생각보다 귀찮네.)

 시작도 하지 않은 채로 접근조차 꺼려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출간기획서 제작이었다. 워드나 엑셀, PPT 작업에 관해서는 웬만한 초등학생 저학년들과도 실력이 비등비등한 내가 출판사의 눈을 사로잡을만한 출간기획서를 PPT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컴퓨터학원을 등록할 기세가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충분히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며 자신을 설득하고 만다. 그래.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해야지. 하여간 관심 없는 부분은 죽어도 안 하려고 한다니까. 

 그렇게 내가 선택한 차선은 인재 활용이었다. 기본 컴퓨터 능력은 물론 PPT 제작부터 섬세한 디자인까지 아주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내 아내였다. 

 아니, 표도 못 만들어? 이거 완전.....

 아주 기초적인 것도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문맥상 쉽게 알 수 있었다. 서른이 넘도록 이것 하나 못하냐는 일종의 감탄사도 속해있는 듯했다. 굴욕적인 모습들을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관계에서 갑은 엄연히 아내였고 나는 저 아래 깊숙하게 묻혀있는 을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내의 작업 손길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면 어쩌면 이 사람이 천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내가 했으면 족히 수개월은 걸렸을 작업(사실 끝내지도 못했겠지만)을 아내의 손길을 거쳐 3일 만에 마무리 짓고 그때부터는 출판사에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실 메일을 보내는 건 누가 봐도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지극히 단순노동이라 금방 싫증이 나버렸다. 출판사 수십 개에 메일을 한 번에 묶어 보내는 건 아무래도 출판사에 대한 매너가 아니니 개별로 메일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한 과정이기도 하고. 

 유튜브에서는 ‘200곳 넘게 투고하세요.’, ‘출간기획서가 제일 중요합니다.’, ‘작가 본인을 어필하세요.’, ‘출판사 성향도 파악하세요.’ 등 다양한 말들로 복잡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새겨들었다. 그런 부분들을 모아 아주 적당한 정도로 60곳의 출판사를 추렸고, 아주 적당한 정도로만 본인 소개글을 정했고, 아주 적당한 온도만 가지고 출판사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고 2주 정도가 지나서 출판사에서 응답 온 메일들을 하나씩 정리해보았다. 상처받을 준비를 하면서. 사실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니지. 이건 거짓말이다. 내심 기대했다. 비율로 정리하자면 80%는 ‘저희 출판사와 방향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중하지만 명확한 거절의 응답이었고, 나머지 15%는 원고 검토 후 연락 주겠다는 답장이었다. 이것도 거절의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흐느끼는 희열의 감정은 수분기 없이 말라지는 느낌인데 그래도 이 날 이 감정들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죽기 전에 책을 한 번 내고 싶다는 사소했던 버킷리스트 중 한 가지가 꽤나 정답게 부둥켜 살을 맞댔는지 이제는 일생의 유일한 소원인 것처럼 거창해지고 소중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머지 5% 출판사 측의 연락들이 감사할 뿐이었다.

 선생님의 출판에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방에서 혼자 들뜬 기분을 표출했는데 아마 환호, 감동, 행복, 만족 곳곳에 숨어있던 반갑고 좋은 감정들이 마중을 나와주었겠지. 마음을 가다듬고 내게 선물을 선사해준 출판사에 답장을 천천히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가 이제 뭐 어떻게 하면 되나요?   


 글을 쓴다는 건, 소설을 쓴다는 건. 


 부장님, 선배. 좋은 글이 뭐예요?

 지금 생각해보니 부장이고 선배고 할 것 없이 나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사실 살짝은 비아냥댄 것이기도 하다. 매일 어떤 기사들을 보며 잘 쓴 기사다. 잘 쓴 칼럼이다. 이 양반, 글 잘 쓴다. 뭘 아는 것처럼 말하기는 하는데 그걸 아는 양반들의 글은 내 성에 차지 않았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본인들만의 기준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이때만 해도 나도 참 건방졌지. 

 일단 기사는 쓰는 양식이 어느 정도 있으니 제쳐두고. 기자들이 말하는 잘 쓴 글의 기준을 종합해보면 생각 외로 다양했다. 그리고 생각 외로 기자들이 글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하나씩 나열해보자면 아주 기본적인 맞춤법부터 한 문장의 길이, 즉 문장의 호흡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었고, 첫 문장에서 감흥이 없으면 바로 쳐다도 보지 않는다는 느낌파도 있었다. 또 글을 읽다 보면 가끔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가 흘러가는 글이 있는데 그럴 때는 글쓴이의 신뢰를 바로 잃어버린다는 조금은 극단적인 독자도 있었다. 이거는 문맥의 흐름을 중요시하는 거겠지. 그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소재를 중요시하는 아이디어파, 본인이 글로 인해 설득당하게 되는 논리정연파, 괜히 마음이 울컥해지거나 끓어오르게 하는 감정파까지. 항상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귀로 담아보니 세상이 글을 보는 시선은 참으로 다양했다. 최악의 글들은 이것에 반대되는 글일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선배들에게 답을 얻고는 결국 내게도 물음이 돌아왔다. 

 너는? 

 그냥 모르겠다고 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면 철부지가 단순히 객기만 부린 것 같잖아.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했다. 어차피 멋진 말이 되지는 않을 테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읽고 나면 여운 남는 글이요. 

 기껏 생각해낸 게 겨우 여운이라니. 답답하고 아쉬운 대답이었지만 이게 내 수준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라는 위로를 삼는 수밖에. 그러다가도 어쩌면 여운이라는 단어는 나름대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전적 의미로 여운이란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 있는 운치를 뜻하지만 더 단순한 나만의 기준에서 여운이라는 건 감상을 마무리 짓고서 혼자만의 잔잔한 생각에 빠지는 걸 의미한다. 굳이 예를 들자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여운이 많이 남았고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잘 쓴 글, 좋은 작품이라고 느끼고 있다.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점이 하나 있는데 글 쓴다는 건 정말이지 매일이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울리지 않게 겸손해지기도 하는데 석 달 전쯤인 소설을 쓸 때부터는 이 생각들이 더욱 가까이 와닿고 있다. 소설을 어설프게나마 공부한 결과, 소설은 소재도 특별해야 하고 특별하지 않다면 전개를 색다르게 해야 하고 그 전개는 본인만의 아주 특별하고도 강렬한 문체로 녹여내야 한다. 또 최근 추세에서 한국 단편 소설의 소재는 그동안 보지 못한 소재라 해도 체감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소재여야 하고 그 시대의 트렌드를 앞서가야 하니 우울증이나 퇴사 같은 뻔한 소재는 피해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우울해야 한다. 그래야 작품성이 있어 보이니깐.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건 문체 내 표현과 어투, 묘사의 부분에서 독자들이 보기에 과하지 않게 글에 힘을 빼야 한다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을 머릿속에 넣고 모니터 앞에 앉으니 나는 한 문장도 쓸 수 없는 인간이 되어있었다. 이럴 때마다 이제는 습관처럼 혼자 지난 인생을 후회하기도 한다.

 아. 공부는 아니더라도 책이라도 좀 많이 읽을 걸. 

 책이라도 많이 읽었다면 나만의 문체라도 새겨졌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지만 이렇게 지난날을 후회할 때면 난 어설픈 최면에 들어가야 한다. 난 아직도 붉은 피가 선명한 아주 젊은 사람이라며. 그러니 지금 뭘 해도 늦지 않았다고. 

 이런저런 후회 섞인 한탄을 늘어놓고 싶을 때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어차피 주위에 있는 사람은 아내밖에 없지만. 그럴 때마다 내 아내는 아주 현명하신 판사님처럼 답을 내려주기도 한다. 

 뭐 많이 써보지도 않았으면서 벌써부터 그래. 적어도 10년은 써보고 말하지?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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