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가 아닌가..?
나는 새해가 지나고, 눈이 내려도 녹지 않고 얼어붙는 날씨가 오면 꼭 한 번은 지독한 감기에 걸린다. 일주일쯤 고생한 뒤 감기가 나으면, 다음 해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큰 탈 없이 지내는 편이다. 그래서 겨울 감기에 걸리면 “올 게 왔구나” 하며,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거나 집에서 버티곤 했다.
그해 겨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소처럼 감기에 걸려, 어릴 적부터 다니던 동네 병원에서 감기약을 처방받고 쉬면서 회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약을 먹고 2주가 지나도 감기는 나을 기미가 없었고, 기침은 더 심해졌으며 숨쉬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그렇게 1주일을 더 버틴 끝에, 감기에 걸린 지 4주째 되는 날, 다시 병원을 찾았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중학교 때는 공부에 관심도 없고 늘 성적도 바닥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와 파일럿이라는 꿈을 갖게 되며 공군사관학교 입학을 목표로 공부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그날도 겨울방학 특강을 들으러 학원에 가는 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주사라도 맞아야 공부를 할 수 있겠다 싶어 병원에 들렀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약만 처방해주려 했다. 나는 숨쉬기조차 버겁고 가슴이 너무 답답해, “주사라도 맞을 수 있을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은 청진기로 숨소리를 듣더니, X-ray를 찍어보자고 했다.
열일곱이던 나도 그 X-ray 사진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부모님께 연락했고, 곧 아버지가 병원으로 오셨다. 아버지는 급히 나를 태우고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평소 크게 아픈 적 없이 자라온 아들이 폐에 문제가 있다는 말에, 아버지 얼굴은 무거워졌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 나는 숨이 점점 더 가빠졌고, 아버지는 더 다급해져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료진에게 내 상태를 설명했다. 잠시 후 어머니도 도착하셨고, 나는 채혈, X-ray, CT 등 응급검사를 연달아 받았다.
시간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금요일 저녁 8시는 넘은 시각이었다. 주치의는 퇴근하고 당직의만 남아 있어 정확한 진단이나 치료는 다음 날로 미뤄졌고, 나는 산소콧줄을 끼운 채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말라는 금식 조치를 받았다. 걷는 것도 금지되었다.
숨쉬기 불편한 상태는 여전했고, 가슴은 조여드는 듯 답답했다. 잠시라도 바람을 쐬고 싶었지만 처치실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말에, 아버지가 휠체어를 밀어 병원 복도 창가 쪽으로 데려가 주셨다. 그때 자판기가 눈에 들어왔다. 식혜가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집에서 해주시던 식혜 생각이 나 아버지께 “식혜 한 모금만 마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의료진에게 물어봤지만, 당연히 돌아온 대답은 “안 됩니다”였다.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시원한 식혜가 괜스레 더 그리워졌다.
그날 밤, 나는 처치실 한쪽 베드에 누워 있었다. 의료진은 수시로 상태를 확인했고, 부모님은 옆에서 말없이 나를 바라보셨다. 미성년자였던 나는 의료진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고,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가가 나를 들것에 옮겨 실어 나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