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들여다보듯 맛보며 즐기기

응원봉

9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부터 장대비가 하릴없이 내린다. 가을 장대비가 인디언 써머를 앞당기면 어떡하지? 이 가을비의 기세로는 10월 중순에 초여름 따뜻한 햇살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다가, 10월 하순이 되면 싸늘한 찬바람을 몰고 올 것 같다.

이런 심란한 가을비로 멜랑콜리한 분위기에 젖여 있는데, 문화 살롱 단톡방에 루브르 박물관 감상문이 올라온다. 문득 파리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한층 더 우울해진다. 어디론가 토끼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밀려든다. 단톡방을 뒤지니,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누아르 & 세잔 특별전을 알리는 멘트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라도 가야겠다. 나도 싸지르는 건가?

아내는 아들의 중간고사를 신경 쓰느라 마음이 여유가 없다. 아침을 먹자마자 일단 설거지를 빨리 끝내고, 조심스럽게 재가를 얻는다. 9시 반에 서둘러 집을 나선다. 목표는 오픈런이다. 차를 타고 강변북로에 들어서니 빗줄기 더욱더 세차 진다. 이 비바람에도 외출 차량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반포대교 남단에서 서초구로 향하고 있는데, 서초구 뮤직 페스티벌을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아뿔싸 오늘도 서초역에서 예술의 전당까지 봉쇄되는구나! 교대역 방면으로 돌아서 겨우 예술의 전당에 도착한다. 시계를 보니 10:15이다. 오픈런은 실패다. 한가람 미술관의 입구에 커다란 안내판이 서 있다. “르누아르 & 세잔 특별전은 건너편 한가람 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냥 빗속을 뚫고 갈까 생각하지만, 눈앞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우산을 챙긴다. 일요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관람 인파는 많지 않다.

고딩 때는 감상(感想)과 감상(鑑賞)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때는 무언가를 즐기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다. 인생 4학년 즈음에 들어서서야 감상(鑑賞)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감상(鑑賞)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거울을 들여다보듯 예술 작품을 맛보며 즐기는 것’이 되지 않을까?

르누아르와 세잔 작품 이외에도 피카소를 포함해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여러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제일 먼저 르누아르의 ‘센강의 바지선’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는 르누아르 특유의 밝고 유동적인 붓질이 강물 위에 번져 있으며, 빛과 공기의 떨림이 푸른 색조 속에서 살아난다.

센강은 넓게 휘돌아 흐르며, 하늘의 흰 구름과 맞닿아 있다. 붓질은 거칠면서도 부드럽게 번져, 바람과 물결이 서로 반사하며 흔들리는 듯한 감각을 준다. 구름은 무겁게 드리우지만, 그 속에서도 빛의 파편이 번져 나와 강물과 호응한다.

강 위에는 바지선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검고 단순한 형태로 그려진 배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노동과 삶의 흔적을 품고 있다. 유유히 떠 있는 듯하면서도, 저 너머 도시를 향해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모습은 당시 파리 근교의 생생한 풍경을 드러낸다.

강둑에는 짙푸른 나무와 관목들이 자리 잡고 있다. 색의 떨림으로 그려진 녹음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생명의 숨결로 다가온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에서 산업화된 도시와 자연의 흐름을 동시에 포착한다. 바지선은 근대적 경제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자연의 일부처럼 강물에 녹아든다.

다음으로는, 르누아르의 정물화 ‘꽃다발’에 눈길이 머문다. 이 그림은 붉은색, 주황, 노랑, 분홍 그리고 옅은 흰빛이 서로 어우러지며, 꽃잎들은 화면 속에서 거의 살아 움직이는 듯 피어난다. 단순한 꽃다발이 아니라, 색채 그 자체가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배경의 강렬한 코발트블루는 꽃들의 생기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며, 녹색 화병은 색의 조화를 매개한다.

꽃잎은 세밀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대신 빠르고 유려한 붓 터치가 겹겹이 쌓여, 빛의 떨림과 생생한 기운을 전한다. 붉은 꽃잎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노란 꽃은 햇살을 머금고 빛나며, 분홍 꽃은 은은하게 속삭이고 있다.

르누아르는 이 꽃다발을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삶의 환희와 따스함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보았다. 그는 늘 강조하던 인간의 행복, 피부의 온기, 삶의 향기가 이 꽃다발에도 담겨 있다. 꽃은 피어나고 시들지만, 그 순간의 빛과 향은 영원한 기쁨으로 화폭에 남겨진다.

이번에는 세잔의 작품을 음미한다. 평소 산책을 즐기는 나는 ‘사토 누아르 공원에서’를 보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 그림에는 곧게 뻗은 나무줄기와 바위로 가득 차 있다. 세잔 특유의 단단한 색면 구성으로 바위는 육중하게 자리하고, 나무들은 위로 뻗으며 화면의 긴장감을 이룬다. 길게 늘어진 수직의 나무줄기와 사선으로 기울어진 가지들이 얽히며, 숲의 깊은 공간감을 형성한다.

세잔은 자연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자연 속에 숨어 있는 형태의 질서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이 숲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건축적인 질감과 조형적인 긴장을 품고 있다. 나무와 바위, 길과 숲은 하나의 거대한 건축물처럼 얽혀 있다.

나는 세잔의 초상화 중에서 ‘화가 아들의 초상’에 마음을 뺏긴다. 화면 속의 주인공은 실제 세잔의 아들인 폴이다. 똘망똘망한 10대 소년이다. 아들과 비슷해서 그런지 계속 마음이 쏠린다.

소년은 의자에 앉아 옆을 응시하고 있다. 얼굴은 정면에서 살짝 비껴 있으며, 차분한 표정 속에서 어린 나이의 순수함과 사려 깊은 기운이 동시에 느껴진다. 뒷배경은 단순한 색면으로 처리되어, 인물이 화면의 중심으로 부각된다.

세잔은 이 작품에서 가족을 모델로 했지만, 아버지의 사랑스러운 시선보다는, 차분하고 건축적인 조형 감각이 두드러진다. 그 결과 이 소년은 단순한 아들의 얼굴을 넘어, 시간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하나의 형상으로 화폭에 자리한다.

나는 글과 그림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작가는 언어라는 기호 체계를 사용한다. 문장, 단어, 은유를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글은 직설적일 수도, 상징적일 수도 있으며, 문맥 속에서 해석을 필요로 한다. 메시지는 언어의 질서 속에서 독자에게 다가온다.

반면에 화가는 색채, 형태, 붓질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색은 단순히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감정과 분위기를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힘을 지녔다. 언어와 달리 색은 직접적 설명이 없지만, 감각을 통해 마음에 스며드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글은 단어, 문장, 은유를 통해 생각의 결을 아주 정교하게 다룰 수 있지만, 그 섬세함 때문에, 전체 메시지가 흐려질 수 있다. 그림은 정반대다. 색과 구도는 한눈에 전체를 보여주고, 세부는 그 안에서 점차 발견된다. 그래서 글은 섬세한 결의 과잉 속에서 중심 메시지를 잃을 수 있고, 그림은 큰 인상의 강렬함 속에서 세부적 뉘앙스를 놓칠 수 있다.

나는 전쟁의 참상을 묘사했던,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를 비교한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게르니카 마을의 참상을 담았다. 그림 앞에 서는 순간, 관람자는 설명을 읽지 않아도 비명, 파괴, 죽음, 공포의 기운을 즉각적으로 마주한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는 헨리의 시선으로 전쟁터와 사랑을 경험하며, 감정과 의미가 서서히 침전된다. 건조하고 절제된 문장이지만, 반복과 여백 속에서 전쟁의 허무가 드러난다.

게르니카는 보는 순간, ‘끔찍하다’는 감정이 솟구치며, 이 감정은 설명보다 먼저, 본능적으로 다가온다. 반면에 ‘무기여 잘 있거라’는 서서히 스며드는 공허를 묘사하고 있다. 헨리의 사랑은 전쟁 속에서 희망처럼 보이지만, 결국 상실로 끝난다. 독자는 긴 여정을 거친 후에야, 전쟁이 남긴 침묵 같은 허무를 체감한다.

전쟁의 두 얼굴

폭격의 섬광 속,

찢긴 말의 울부짖음

흑과 백의 벽 위에서

세상은 한눈에 부서진다

긴 문장 속

건조한 대화와 침묵 끝에서

사랑은 스러지고

허무만이 조용히 머무네

첫째는 순간의 절규로

둘째는 시간의 침전으로

두 목소리는 같은 말을 속삭인다

전쟁은 삶을 부수고

침묵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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