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별에서 사는 공주

창작 편집

석파정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천경자의 ‘내 슬픈 전설의 101페이지’를 감상한다. 천경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금성도 화성도 아닌 지구와 비슷한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를 상상해 본다. 따뜻함보다는 싸늘한 표정에 혈색도 차고 손에 든 꽃도 싸늘한 푸른 꽃인 여인상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나는 ‘제주도 풍경’ 앞에 서서 말없이 바라본다. 이 그림은 왠지 천경자 자신이 던지는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가 정원, 나무, 배, 바다, 하늘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과정을 차분히 관조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밀려나 고립되었다기보다는, 스스로 거리를 두며 고독함을 즐기고 있다.

정원은 주택에 살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세계이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에게는, 로망의 공간이자, 가장 사적인 우주다. 붉은 흙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 흙은 푹신하지도, 메마르지도 않다. 오렌지빛과 황톳빛이 섞여 있다. 우리 주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흙이다. 그래서 이 흙은 ‘지구와 비슷한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의 정원에만 있을 것 같다.

그 흙 위로 두툼하고 윤기 나는 잎들이 낮고 넓게 퍼져 있다. 잎맥 하나하나가 또렷하고 칼날처럼 뾰족하지만, 전체는 부드럽게 흐르고 있다. 소철과 닮았다. 소철은 인류의 역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유구한 세월을 견디며 살아왔다. 이 그림의 소철은 강인함과 온순함이 공존하고 있다. 오렌지빛과 황톳빛의 흙은 낯섦으로 다가오지만, 소철에서는 익숙함이 느껴진다.

그 옆에 팽팽한 긴장 대신 조금 느슨한 곡선을 그리며 피어 있는 꽃이 고요히 서 있다. 소박한 흰 꽃은 옆의 소철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가시도 없이 연약한 꽃잎이 싸우지도, 닫히지도 않고, 그저 열어 둔 채다. 방어와 침묵 사이에 존재하는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다.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의 모습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연약한 꽃 옆에는, 더 붉은 흙 위에 조개와 불가사리가 놓여 있다. 이 조개와 불가사리는 파도가 건네준 기념품이다. 이 정원이 바다와 이어졌음을 이야기하는 흔적이다. 이 조개와 불가사리는 우리들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소철의 앞에는 키 큰 야자수들이 하늘을 향해, 팔을 길게 쭉쭉 뻗고 있다. 붉은 기운이 스며든 줄기와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는 햇볕과 오래도록 대화하고 있다. 그 아래에 흰 줄기의 나무들과 연분홍 꽃들이 촘촘히 엮여 작은 숲을 이루며, 생기발랄함을 발산하고 있다.

내 눈은 바닷가에 조심스레 정박해 있는 작은 배에 머문다. 그 배는 작고 단정하며, 과장된 장식도, 위엄도 없다. 이 배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먼바다로 떠나면, 거친 파도를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된다. 나는 저 배를 타고, 낚시를 할지언정, 절대로 항해를 떠나고 싶지는 않다. 화가는 왜 이 작은 배를 그려 넣었을까? 천경자는 자신의 고향이나 한국을 떠나고 싶었을까?

배가 떠 있는 바다는 소리 없는 깊은 호수처럼 펼쳐져 있다. 로열블루 색조를 머금은 바다는 거칠게 부서지지도, 눈부시게 반짝이지도 않다. 이 고요함에는 한낮의 열정은 이미 지나고, 낙조를 얼마 남기지 않은 차분함이 깔려있다. 작은 배를 볼 때는 살짝 불안함에 항해를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 고요한 바다를 보는 순간, 오디세우스처럼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바다의 오른쪽 위에는 두 개의 섬이 조용히 숨을 쉬고 있다. 너무 작아서 살기는 답답할 것 같지만, 연인과 함께 내려서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지새우고 싶다. 두 번째 섬 위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 있다. 이 꽃의 색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옅은 풀색이다. 이 들꽃이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가 손에 들었을 ‘싸늘한 푸른꽃’일까? 아무리 봐도, 싸늘하지는 않다.

섬 너머에는 하늘이 보인다. ‘제주도 풍경’에서 가장 넓고, 가장 말이 없는 공간이다. 색은 단정하다. 짙지도, 창백하지도 않은 연한 파란빛이다. 마치 막 씻은 유리처럼, 투명하고 맑다. 화가는 여기에 어떤 감정도 과하게 비추지 않고 있다. 이 하늘에는 폭풍의 기척도, 번개를 품은 긴장도 없다.

화가는 정원 위에 펼쳐진 하늘에서 서두르지 않고 기다림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가 상상한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하지 않아도 위로가 된다. 이 하늘은 생각이 쉴 수 있는 자리이며,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는 너른 여백이다. 이름 없는 별에 사는 공주는 자신의 세계를 여유롭고도 풍요롭게 그리고 있다. 나는 그의 세계에 들어가고 보고 싶기도 하고, 들어가면 돌아오지 못할까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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