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가는 여정

일타강사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는 일본 속담을 제목으로 뽑은 유튜브 채널에 눈길이 끌린다. 이 채널은 한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나리카와 아야’라는 일본인 기자가 운영하고 있다. 평소에 불편하거나 민망한 문제를 덮어두고, 외면하는 편인 나는 바로 이 채널을 클릭한다.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다’는 속담 설명을 듣자니, 예전에 오락 프로그램에서 설문 조사를 진행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회자가 설문의 내용을 설명한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정성스럽게 요리한 음식을 남편에게 내놓습니다. 남편은 그 요리를 맛보지만,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습니다. 이럴 때, 남편 A는 젓가락질을 한번 한 후에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지만, 다시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남편 B는 음식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불평을 늘어놓지만, 끝까지 다 먹어 치웁니다. 자 여러분은 남편 A와 남편 B 중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다 말고 TV 앞으로 다가온다. 나를 빤히 쳐다보고 말한다. “자기랑 똑같네!” 잠시 후에 이 설문을 가정주부 100명에게 보내서, 결과를 집계한다. 나는 살짝 변명을 늘어놓으며, 조심스럽게 결과를 예상한다. “그래도 남편 A를 30명 정도는 선택하지 않을까?” 아내는 강력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외친다. “노노노” 결과가 참담하다. “15:85” 아내는 결정적인 멘트를 날린다. “봤지!” 나는 살며시 일어나 자리를 뜬다.

나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하기보다는, 덮어두고 시간이 지나가면 그 갈등이 자연스럽게 가라앉기를 바란다. 아니면 정말 형식적인 해결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전에는 갈등의 존재도 잘 포착하지 못했지만, 요즘은 갈등의 전조를 눈치챌 정도의 연륜은 쌓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갈등의 냄새 앞에서는 일단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가 문제를 해결해 주셨던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최근에 읽은 이시구로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전후 일본 사회의 정체성 혼란과 역사적 책임, 그리고 집단적 기억의 흐릿함을 은근하고 섬세하게, 마치 물결처럼 흘러가듯 그려내고 있다. ‘부유하는 세상’은 원래 에도 시대의 향락적 세계, 예술과 관능이 넘실대던 공간을 뜻하지만, 이시구로는 그 전통적 의미를 빌려오되, 전쟁과 기억 사이에서 표류하는 전후 일본 사회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는 덮었던 소설책을 꺼내서 주인공 오노의 독백을 다시 읽는다. 그의 교묘한 마지막 변명은 이시구로의 조용한 고발이 아닐까? “우리는 적어도 믿는 바를 위해 행동했고 최선을 다했다.” 이시구로는 일본인이 아닌, 영국에서 성장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일본을 관조한다. 그의 시선은 애정이 있으나 냉철하고, 따뜻하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무너진 확신이 연기 속으로 스며드는 문학적 메타포를 소설에 담았다.

이시구로는 일본을 부유하는 세상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나는 일본을 표류하는 사회로 부르고 싶다. 일본 집단적 책임은 흐려지고, 시민 개인의 판단은 지워졌기 때문이다. 일본인들도, 일본 사회도 무늬만 항해하는 배처럼 떠돌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는 천황의 존재일 것이다. 일본은 천황의 사면을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사면의 어원은 amnesty 즉, 망각이다. 예전에는 신하가 왕 앞에서 무릎 꿇고 빌면, 왕은 신하의 과오를 잊어주는 시혜를 베풀었다. 그러니까 사면은 본디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기로 한 결정인 것이다.

‘나리카와 아야’ 기자는 또 하나의 신기한 점을 이야기한다. “일본 사회에서는 윗사람에게 ‘~상’이라고 호칭하면 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씨’ 대신에 그 사람의 직위를 붙여서 호칭해야만 한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윗사람에 대해 ‘~씨’라고 호칭하면 결례가 되고, 부장님, 이사님, 대표님처럼 직위를 붙여야 예의 바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국인들이 직위를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존중이 아니라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의 결핍이 선명하게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수직 상승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는 사회이기에, 한국인들은 직위를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으로 여기고, 그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예우, 경외, 대우를 갈구하고 있다.

서글프게도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직함 하나에 기대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인은 자신의 직위를 제외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빈곤한가?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빈곤은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지금 시대가 만들어 낸 강요된 상처이자, 생존의 방식이기도 하다.

한국은 일제 병탄 기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두 차례의 치명적인 단절을 겪으며, 문명과 사회의 그라운드 제로 상태에 놓였던 나라다. 그것은 단순한 몰락이 아니라, 문명적 기억의 절단이자, 정체성의 붕괴였다.

우리 사회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경제적 기적만을 좇는 근대화를 경험한다. 일종의 기억 없는 산업화이자, 정체성 부재 속에서의 번영이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무너진 것 위에 쌓아 올리는 작업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소란스럽고, 날 것 그대로이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가 되어가려는 의지가 있다. 그래서 한국은 모순으로 흔들리되, 그 흔들림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회다.

한국의 라면은 일본의 라멘을 모방하여 출발했지만, 라면은 단순한 복제가 아닌, 절박한 시대 속에서 변형되고 재창조되었다. 라면은 외래어였지만, 어느덧 모국어가 돼 버렸다. 결국 라면 한 그릇은 모방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라면 보통으로 때우기인 “라보때”를 외치며, 허리가 휘도록 일했다. ‘라보때’ 이 말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한국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자신의 뼈를 갈아 넣은 수많은 노동자의 절규이자, 유머로 포장된 비애였다. 라보때는 가난과 조급함의 시대가 만든 생활어이자, 노동과 인간성 사이에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우리 선배들의 자조적인 시그널이었다. 자신의 피땀과 정열을 한국 사회에 바친 우리 선배들에게 ‘라보때’ 시를 헌정한다.

라보때

점심을 삼킨다

국물이 아니라

시간과 땀을 삼킨다

라보때 하자

웃음으로 포장된

허기의 선언

그릇 속의 라면은

삶의 축소판

잠시 끓었다 식는 노동의 숨결

라보때

그 말 한마디에

피땀과 정열이 녹아 있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쫓는 자의 역사를 살아왔다. 항상 앞선 문명을 바라보며, 그 발자국을 뒤쫓고, 때로는 모방하며, 때로는 조급히 앞서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근대화의 늦은 출발에서 기인한 절박함이었고, 동시에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은 문명적 결핍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인권 등은 모두 서구에서 건너온 개념들이다. 한국 사회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생존 전략이었고, 서구에 근접하는 것이 국격 상승의 상징이었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쫓는 자가 아니라, 길을 만드는 자가 될 수는 없는가?

직위에 의존한 정체성 구조를 오랫동안 내면화해 온 것은 정체성의 빈곤이 아니라, 시대가 강요한 자기 망각의 결과였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그 공허를 깨닫고, 다시 자기 이름을 찾기 위한 여정에 나설 때다. 그 여정을 지나야 길을 찾는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직위는 조직이 부여한 역할이며, 나의 외부에서 온 정체성의 가면이다. 그것은 중요하지만,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직위에 안주하면, 사회는 역할의 분배는 있을지언정, 존재의 진실은 사라진 풍경이 되어버린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는 사회는 결코 자기 길을 가는 사회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남이 만든 질서 위를 걷는 사회, 곧 표류하는 사회가 되기 쉽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에 침묵하는가?” 이 질문들은 자기 이름으로, 자기 언어로, 자기 서사로 살아가려는 시도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을 때, 비로소 이 사회는 표류하는 모방에서 길을 찾는 사회의 문턱에 서게 될 것이다. 길은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발끝 아래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길을 찾아가는 여정

어느 날

문득 물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두 떠난 골목에서

나는 스스로를 마주한다

이제 나는 걷는다

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걷는다

그 물음이 내가 갈 길이다

길을 묻는 자는 고독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

길은 시작된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가즈오 이시구로 지음/김남주 옮김/민음사/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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