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지만 멀지 않은 첫키나와

응원봉

봄의 문턱에 들어선 듯 따사로운 햇살이 산책을 유혹하지만, 막상 산책을 시작하면,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으로 막아서는 쌀쌀함이 매섭게 얼굴을 강타하며, 동장군의 쌩쌩함을 각인시키는 25년 2월 중순 새벽에 오키나와로 떠날 설렘에 잠을 설친다.

멀지만 멀지 않은 오키나와는 아련하고 매혹적인 섬이다. 관련 여행 블로그에는, 첫 번째 오키나와 여행은 ‘첫키나와’, 두 번째는 ‘두키나와’, 세 번째는 ‘세키나와’, 네 번째는 ‘네키나와’로 명명하여, 다섯 번째가 되어야 비로소 ‘오키나와’가 된다는 전설을 전하고 있다.

오키나와는 서울에서 1,263km 떨어져 있어, 비행기로 2시간 반 만에 갈 수 있다. 오키나와가 멀다고 한 이유는 백두산과 한라산 사이의 거리 1,000km를 훌쩍 넘고 있기 때문이고, 멀지 않다고 한 것은 오키나와가 제주도보다 살짝 아래 있는 제주도 동생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2년 전에 방문했던 오사카는 서울에서 1,000km의 거리에 비행기로 1시간 반이면 도착했지만, 서울과 각자 쌓아온 역사의 깊이만큼 생경했다. 그래서 오사카 기행문의 제목을 ‘가깝지만 가깝지 않은 오사카’라고 명명했다.

장자가 이야기했던 ‘소요유(逍遙遊)’가 떠오른다. 소요유는 요(遙)원하게 먼 곳으로 소(逍)풍가서 한가롭게 노는(遊) 것이다. 요원하게 먼 곳이 바로 오키나와다. 소요유의 오키나와 비행 시각은 8시지만, 요원하고 매혹적인 섬에 있을 사이렌을 기대하며, 새벽 1시에 깬 뒤로 눈이 말똥말똥하다. 양을 몇 마리나 세어야 다시 잠이 들까 걱정하다가 어느덧 3시가 된다.

이제는 아예 잠자리를 박차고 공항 갈 준비를 한다. 거실을 어슬렁거리니 아내도 눈을 뜬다. 아들도 곧 일어난다. 여행을 얼마나 더 떠나봐야 설레지 않을까? 아내는 3일간의 퇴거를 위해 집을 단속하느라 분주하다. 아들은 오키나와 날씨를 알아보다가, 인천의 강풍을 걱정스럽게 전한다.

드디어 캐리어를 챙겨 차에 싣는다. 아내와 아들은 A사 항공기를 타고 떠나지만, 나는 항공기 예약을 늦게 하는 바람에, K사 항공기를 탄다. 나 홀로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지 20여 년 만에, 혼자서 국제선을 타는 기분이 묘하다.

1 터미널에 아내와 아들을 내려주고, 서둘러 2 터미널로 향한다. 홀로 비행기를 탄 덕분에 캐리어 없이 배낭 하나만 달랑 들고 출국장으로 올라간다. 출국 시큐러티 심사 대기줄이 상상을 초월하여 몇 겹의 S자를 그리고 있다. 여기는 극도의 혼돈에 매몰된 서울과는 전혀 다른 별천지 같다. 2005년에 보았던 ‘웰컴투동막골’이 떠오른다. 포탄의 아비규환으로 쑥대밭이 된 한반도 전역과는 전혀 상관없이 평화로웠던 동막골이 바로 2025년 2월의 인천공항이다.

이 정도의 대기줄에 참가했던 적은 잠실 야구장으로 프로야구를 관람하러 갔던 지난 6월 주말이 마지막이었다. 심사 대기줄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들은 대략 3 부류다. 한 부류는 떠나는 여행의 기쁨을 숨기지 않고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다른 부류는 얼굴에 표정이 없다. 대개 나 홀로 여행객이다. 나도 무표정할까? 또 다른 부류는 얼굴에서 초조함이 묻어난다. 아마도 처음으로 출국해서 그러지 않을까?

드디어 짐 검사를 통과하니, 이번에는 어정쩡한 항복 포즈 촬영이 기다린다. 도대체 왜 그런 어정쩡한 항복 포즈를 취하라고 하는 걸까? 디지털의 폐해는 일단 데이터를 긁어모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원하는 정보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것이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사상 검증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가 디지털 세상에 남긴 글이나 이미지를 검색해서 AI에 집어넣으면 우리의 성향은 금방 드러날 것이다.

겨우 모든 절차를 마치고 출국장에 들어선다. 입국장 입구에 서 있는 박재홍 야구 해설 위원이 눈에 들어온다. 5학년 아저씨의 오지랖을 발휘하여 아는 척하니, 그가 살짝 놀란다. 비행기 탑승 대기 줄 바로 앞에는 윤희상 해설 위원이 있고, 비행기 안에는 이미 탑승한 장성호, 정민철 위원도 오키나와를 향하고 있다.

아침을 먹기 위해서 카페를 검색한다. 거의 모든 카페는 만원을 넘어서 테이크아웃 음료나 빵을 사기도 버겁다. 마지막 희망으로 공차 카페를 찾는다. 다행히 거기는 차분히 아침을 먹을 자리가 비어 있다. 블랙티와 공빵을 주문하고 노트북을 꺼낸다. 나 홀로 여행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집부터 인천공항에서 일정을 정리하면서 멀지만 멀지 않은 첫키나와를 쓴다.

어느덧 탑승 시간이 다가와서 서둘러 탑승구로 향한다. K사 항공기 탑승구는 이미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끼는 불편한 점은 경제적 계급의 위력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게 비행기라는 독특하고도 좁은 공간이라는 것이다.

아들이 6살 어린이날에 에버랜드를 놀러 갔다. 아들의 강력한 요청이 아니었다면 결코 가지 않을 장소가 에버랜드다. 아들이 5살 때는 아내가 많이 아파서, 어린이날 단둘이 집 근처 롯데월드를 갔다. 아들을 데리고 8시 반쯤 롯데월드 출입구에 도달했다. 그때 가면 롯데월드가 한산할 걸로 예상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먼저 롯데월드의 놀이 기구를 쭉 훑었다. 일단 열기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아들에게 열기구를 타자고 꼬셨다. 아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는 특효약이 있다. 아들이 좋아하는 솜사탕을 사주니 바로 넘어왔다. 그런데 대기자가 많아서 70분 웨이팅을 예상했다. 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순식간에 솜사탕을 다 먹어 치웠다. 그리고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다음은 아이스크림이었다. 70분이 훌쩍 지났지만, 우리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89분 만에 겨우 열기구에 올랐다. 열기구는 3미터 정도 상승하더니 천정에 깔려 있는 레일에 접촉됐다. 그리고는 레일을 따라 3분 정도 롯데월드 천장을 돌더니 너무도 허무하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마치 곰국을 세 시간 정도 정성껏 끓여서 오 분 만에 순삭 한 기분이었다. 몸의 배터리는 이미 95% 정도 방전되었다.

아들은 의욕적으로 다른 놀이 기구를 타고 싶어 했지만, 다시 꼬시기 시작했다. 열기구를 타고 내려오다가 한산한 섹터를 찾아냈다. 그것은 유료로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공간이었다. 아들은 시큰둥했지만, 초콜릿을 손에 쥐어 주니, 순순히 캐리커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점심 먹으러 갔다. 식당 근처에는 롯데월드에서 가장 썰렁한 놀이 기구가 있었다. 회전목마였다. 대부분 할아버지나 할머니, 아들보다 더 어린애들이 타고 있었다. 회전목마를 계속 쳐다보니, 아들은 마지못해 회전목마를 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아들에게 롯데월드 어땠냐고 물으니, 아들은 틈도 주지 않고 시시했다고 꼰질렀다. 그리고 내년 어린이날에는 에버랜드를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나를 빤히 쳐다봤고, 즉시 아들에게 내년 어린이날에는 꼭 에버랜드에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아내의 째려봄 신공을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가기 싫은 에버랜드를 덥석 약속하고 만 것이다.

일 년간 엄청난 숙제가 주어졌다. 열나 검색했다. 결국 12세 미만의 아이를 포함하는 3인 가족권을 20 만원에 구매했다. 거기에는 줄을 서지 않고 최우선적으로 놀이 기구를 탈 수 있는 패스트트랙 티켓이 3장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일단 사파리를 타는데 1장을 썼고, 또 한 장은 수륙 양용차를 타는데, 나머지 한 장은 로스트 밸리를 타는 데 썼다. 패스트트랙 티켓을 다 쓰고 나니 줄을 서서 놀이 기구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시간을 돈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겨우겨우 비행기에 올라서 자리를 잡는다. 1시부터 잠을 설쳐서 그런지 안내 방송이 자장가로 느껴진다. 살짝 졸다가 난기류에 놀라 깨보니 유리창으로 서해 바닷물에 반사된 햇빛이 눈으로 들어온다. 반사된 빛은 직접 비치는 햇빛보다 더 눈부시다. 입에서 절로 “보라 서해에 떠오른 태양/누구의 머리 위에 이글거리나” 노래 가사가 흘러나온다.

옆 좌석의 승객은 햇살이 눈부시다고 투덜댄다. 바로 윈도우 셰이드를 닫는다. 아침 식사가 배달되지만, 따뜻한 커피 한 잔만을 요청하고, 눈앞의 디스플레이에서 영화를 검색한다. 남은 비행시간이 87분으로 뜨니, 비행시간에 가장 유사한 길이의 영화 ‘러빙 빈센트’를 클릭해서 음성은 듣지 않고 한글 자막으로 된 영상만을 감상한다.

방금 전에 항복 포즈의 사진 촬영을 하면서 디지털 폐해에 대해서 투덜댔지만, 이번에는 디지털 덕분에 빈센트의 그림이 살아서 움직이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만사의 미묘함을 느낀다. 지금 우리가 디지털 세상에서 탈출하는 것이 가능할까?

빈센트는 독백한다. “나는 장남이지만, 첫째는 아니었다.” 빈센트의 손위 형은 어머니 뱃속에서 사산됐다. 부모님에게는 그런 빈센트가 눈에 차지 않았다. 빈센트는 부모에게 인정받으려고 기를 썼지만,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다. 빈센트는 오베르에서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죽어라 그림을 그렸고, 밤에는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동생 테오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테오는 빈센트에 대해서 “심장은 두 개지만, 마음은 하나다”라고 이야기한다.

빈센트에게는 테오가 영혼의 친구였다. 형이나 동생이 없어 빈센트나 테오의 관계가 상상되지 않지만, 테오의 멘트 ‘마음은 하나다’가 살짝 부럽다. 주변에 테오 같은 단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테오 같은 친구가 돼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바로 포기한다.

빈센트가 자살하기 직전에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빈센트는 “모든 별에는 외로움이 가득하고 미래는 불안하지만, 내 작품을 통해 별 볼 일 없는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덧없이 소멸하는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외로움이 확 밀려왔다. 빈센트도 외로움이 확 밀려와서 생을 그렇게 마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빈센트 생전에는 그의 작품에서 그의 마음을 읽어주는 이가 동생 테오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별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나고 난 후에는 그를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추앙하는 상황이 씁쓸하다.

랜딩 방송에서 안전벨트 멘트가 나오자 창을 통해서 솜털 뭉게구름 사이로 아련하게 오키나와의 속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살랑살랑 잔파도를 보면서 나하 공항에 착륙한다. 한자 가득한 간판이 없으면 영락없이 제주공항이다. 흰색 통로차가 서서히 다가와 비행기 비상구랑 연결되는 것이 보인다. 곧 내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도착한다.

아내와 아들은 2시간 후에나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어, 아직도 나 홀로 여정이 계속된다. 눈에 익숙한 사보텐에서 카레 돈가스를 주문하고, 편의점으로 커피를 사러 간다. 일단 카레 돈가스를 한 입 깨무니 우리 것 보다 고기랑 카레 맛이 진하다. 아내와 아들이 올 때까지 망중한을 즐긴다.

나 홀로 여행을 3시간 정도 더 즐기니, 드디어 아내와 아들이 국제선 입국장으로 등장한다.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 공항 밖에 대기하고 있는 승합차를 타고 나하 공항을 떠난다. 이것도 제주도 여행 방식과 똑같다. 렌터카 매니저가 렌터카를 배정하며, 일본 운전의 주의 사항을 세심하게 일러준다.

내심 처음 해 보는 오른쪽 운전이 살짝 걱정된다. 유튜브 오키나와 여행 영상에서 와이퍼 바와 깜빡이 바가 한국과 반대로 배치되어 있는 점을 반복해서 들었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첫 오른쪽 운전은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별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깜빡이 신호를 넣으려 하지만, 연신 와이퍼가 움직이기 시작하니, 땀이 삐질삐질 난다. 와이퍼를 멈추기 위해서 와이퍼 바를 건드리면, 와이퍼가 점점 더 빨라져, 아내와 아들은 불안해한다. 겨우겨우 고속도로를 타니 어느 정도 오른쪽 운전에 익숙해지지만, 차선이 계속 왼쪽으로 치우쳐 라인 디파처 알람 신호가 차선을 벗어난 것을 주지 시킨다.

한 시간 정도 운전을 하니, 오키나와 풍광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산 중간중간에 주택이랑 빌딩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이 부산과 비슷하다. 우리가 투숙할 호텔이 위치한, 오키나와 북쪽 모토부로 가기 위해 해안 도로를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다. 해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야자수들이 뒤로 연신 질주하는 모습이 색다른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

드디어 호텔에 도착한다. 로비에 들어서니 통유리 전면을 통해서 회색빛 구름 사이로 은은함을 발하는 낙조에 할 말을 잃는다. 어릴 때는 순식간에 열정을 뿜어내는 일출을 좋아했지만, 언제부턴가 은은한 빛깔의 낙조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다.

오늘 하루는 새벽부터 설렘에 잠을 이룰 수 없어 이것저것 여행 로망을 꿈꾸다가 5시 즈음부터 나 홀로 여정을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나 홀로 여정은 오후 2시까지 계속됐고, 아내와 아들을 만나서는 렌터카를 직접 운전하며 오키나와의 골목을 누볐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읽으면서 차로 운전하며 국경을 넘을 수 있기를 꿈꾸었다. 비록 국경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해외에서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오키나와의 속살을 들여다봤으니, 로망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저녁을 먹고 호텔 방에 들어오니 1박 2일의 여정을 마친 기분이다. 지친 몸을 추스르며 내일의 또 다른 여행 로망을 꿈꾼다.

집을 떠나면, 2시에서 3시 사이에 잠에서 깨곤 한다. 오늘은 3시에 눈이 떠진다. 아내와 아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용히 노트북을 챙겨 호텔 로비로 간다. 이럴 때 아들은 잠에서 깨지 않지만, 아내는 대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느낀다.

어제는 널찍한 호텔 로비에 사람들이 많아도 여유 있어 좋았지만, 오늘 새벽에는 컨시어지와 단둘 이만 이 널찍한 호텔 로비를 차지하고 있으니, 살짝 을씨년스럽다. 컨시어지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멀지만 멀지 않은 첫키나와를 쓰기 시작한다.

새벽에는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 좋기도 하다가, 한순간 아 이 세상에 나 홀로 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외로움이 확 밀려든다. 그래도 기행문을 쓰며 여행의 여정을 회고해 보는 일은 한 번 더 여행의 로망을 꿈꿀 수 있어 기쁨이 두 배다.

어느덧 시간이 6시 반을 지나가니, 아내가 호출한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에게 아침 컨디션을 묻는다. 우리는 호텔 조식을 먹으로 나간다. 호텔 레스토랑에는 동서양의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 이리저리 준비된 음식을 스캔하다가, 빨간색 한국어 문구가 눈에 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 유리 표면에 “아이스크림은 레스토랑 안에서만 드세요. 테이크아웃을 삼가 주세요.”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가져갔을까? 거기에 보관된 아이스크림 3 종류를 시험 삼아서 가져다 먹어 본다. 오키나와 청귤로 만든 셔벗을 맛보니,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호텔 방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조식을 든든하게 먹고 오늘의 여정을 챙긴다.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곧바로 추라우미 수족관으로 향한다. 호텔을 나서니,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줄기는 약하지만, 바람이 돌풍 수준으로 불어대, 우산이 바로 까뒤집어진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처럼 갑자기 마법의 세계로 가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되지만, 빗방울이 얼굴을 적시니 여기는 현실의 오키나와 북부 해안임을 각성한다.

수족관에는 어린아이들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고2가 되는 아들은 이제는 제법 어른스럽다. 아들이 자란 만큼 늙어가겠지! 수족관을 구경하다가 우주선 비행을 하고 있는 마름모의 물고기가 눈에 띈다. 설마 유일하게 아는 그 마름모 물고기일까?

그런데 평소 보던 마름모 물고기보다 훨씬 더 크다. 대각선 길이가 2m에 육박한다. 일단 가까이 가서 보니, 우주선 물고기는 자신의 배를 보이며 유유자적 위로 서서히 올라간다. 단추구멍만 한 두 눈을 껌뻑이는 것이 영락없이 홍어다. 급히 아내를 데려와 우주선 물고기를 보여주니, 홍어가 아니고 가오리라고 말한다. 분명히 홍언데. 하지만 맛은 없어 보인다.

마름모 물고기들 위로 007 뷰투어킬의 비행체처럼 거대한 물고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제왕의 풍모를 보이는 물고기는 상어다. 제왕 상어가 등장하니 마름모 물고기들은 그 아래에서만 헤엄을 친다. 그리고 제왕 상어 보라는 듯 연신 덤블링을 돌며, 재롱을 떤다.

마름모 물고기들이 불쌍하게 여겨져 자리를 뜬다. 수족관을 나오니 아침에 내린 비로 탁 트인 바다가 활짝 펼쳐진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바로 해안가 계단으로 내려간다. 반원의 절벽으로 고립된 해안이 수족관과는 단절된 별천지를 만들어 낸다.

바로 내려가 반원의 별천지를 누빈다. 그 한가운데 파도에 떠내려온 그루터기 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루터기 나무는 이 별천지를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된 미지의 무인도로 탈바꿈하는 영물이다. 이 반원의 별천지를 둘러싸는 절벽과 수족관 광장 사이에는 열대 우림이 무성하게 조성되어 있다.

영물의 그루터기 나무가 놓인 곳에서 위를 바라보면 수족관은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누워서 보면 완전히 고립된 무인도 해변이다. 순간 이 반원의 별천지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되기도 하고, 이타케를 향해서 항해하다가 역풍을 만나 이오니아 해 어디론가 정박하는 오디세우스가 되기도 한다.

한동안 그 반원의 별천지에는 아내와 아들만 있어, 항해 도중에 풍랑을 만나, 태평양의 이름 모를 섬으로 밀려가게 되는 가족 모험을 상상한다. 영물 근처에서 움직이지 않으니, 아내는 상상의 나래를 눈치채고, 꿈꾸는 로망의 풍선을 날카로운 멘트로 확 터트린다.

이 반원의 별천지와 그루터기 나무는, 시장 거리를 헤매다가 버려진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보배다. 유산을 우연히 찾아낸 것 같기도 하다. 더욱 기분 째지는 것은 우리가 점령하고 있던 별천지에 일군의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슬쩍 반원의 절벽과 해안을 훑어보다가 이내 수족관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는 것이다. “기쁨의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는 프롬의 가르침과는 달리, 이 반원의 별천지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기쁨의 경험을 다행히도 알아채지 못한다.

너무 흥분해서 좀처럼 이 반원의 별천지를 떠나지 않으려 하지만, 아내와 아들은 다음 일정을 위해서 이 반원의 별천지를 미련 없이 떠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렌터카에 오르지만, 이 반원의 별천지는 이번 첫키나와 여정에서 가장 흥분된 장소로 자리매김한다.

우리는 코우리 섬으로 달린다. 코우리 섬은 달과 같이, 오키나와 본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다른 점은 달은 우주선을 타야만 갈 수 있지만, 코우리 섬은 연륙교를 통해서 차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시간 즈음 달리다가 바다가 보이는 호젓한 카페에 들른다. 거기에서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일본식 단팥죽을 주문한다. 단팥죽이 나올 동안 테라스 아래에 조성된 정원을 바라본다. 야자수와 열대 식물이 이 정원을 듬성듬성 점유하고 있다.

드디어 일본식 단팥죽이 나온다. 2년 전에 교토에서 먹은 일본식 단팥죽에는 따뜻한 녹차랑 팥알과 살짝 구운 찹쌀떡이 들어 있었지만, 이번에는 대두의 팥이 통째로 있고, 그 사이에 새알 찹쌀떡 3알이 놓여 있다. 교토의 단팥죽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어, 오키나와와 교토의 간극이 얼마나 깊은지를 말해준다.

이제는 오키나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로질러 달린다. 계속 왼쪽으로 쏠려 운전하니, 아들과 아내는 오른쪽 운전 실력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다가, 운전석에서 쫓겨난다. 운전석 뒷자리에 자리 잡으니, 눈꺼풀이 연신 내려오다가 대 놓고 자기 시작한다. 한 시간 반 이상을 달리니 우리의 목적지 나하에 도착한다.

나하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다. 이미 지쳐, 아들과 아내가 쇼핑하는 동안에 카페에서 첫키나와 기행문을 정리한다. 노트북을 켜니, 친구들의 카톡이 쉬지 않고 전달된다. 기행문을 쓰는 둥 마는 둥, 아내와 아들은 벌써 쇼핑을 마치고 나온다.

아들은 국제거리로 안내한다. 국제거리는 일본의 평범한 시장과 비슷해 보이지만, 백종원의 홍콩반점이 입구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아들에게 국제거리에서만 판매하는 제품을 선물한다. 이제 거의 그로기 수준으로 배터리가 방전되기 일보 직전이다. 서둘러 호텔로 들어가서 짐을 푼다.

둘째 날에도 새벽 2시 45분 즈음에 깬다. 아내는 이미 일어나 있다. 노트북을 챙겨 호텔 로비로 간다. 두 번째 호텔 로비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지만 그리 넓지 않고 소파가 놓인 공간과 프런트에만 켜져 있는 조명 덕분에 을씨년스럽지 않아서 좋다.

다만 테이블에 놓여 있는 음료 금지 경고 픽토그램이 압박으로 작용한다. 호텔 로비에서 기행문을 쓰는 동안에 마실 커피를 준비해 왔기 때문이다. 커피가 들어 있는 병을 테이블과 스탠드 사이의 아래쪽에 숨긴다. 꿩이 눈 쌓인 숲에서 눈 속으로 고개를 처박고 있지만, 금세 사람들 눈에 띄는 것처럼, 숨긴 커피 병도 바로 누군가의 눈에 띌 것 같다.

4시 즈음에 컨시어지가 소파로 와서 신문을 교환해 주지만, 다행히도 컨시어지는 숨긴 커피 병을 보지 못한다. 첫키나와 여행은 대만족이다. 오늘은 렌터카를 반납한 후에 나하 공항으로 가야 되기 때문에 아침 일정이 빡빡하다. 6시에 호텔 방으로 돌아간다.

피로감이 확 밀려와 조용히 침대로 들어간다. 6시 반쯤 아내의 기상 알람이 정적을 깨뜨린다. 아들은 눈을 비비며 겨우 일어난다. 짐을 정리해서 차에 먼저 싣는다. 부랴부랴 조식을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간다. 첫 번째 북쪽 호텔의 투숙객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지만, 두 번째 남쪽 호텔 투숙객의 목소리에는 귀에 익숙한 우리말이 많이 들려온다. 두 번째 호텔에는 주로 일본 음식이 비치되어 있다.

평소에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식을 먹지만, 오늘은 30분 이내에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 짐 정리를 마무리한다. 나하 공항까지의 운전 시간을 체크하니, 예상보다 20분이 추가된다. 일단 마음만 바쁘다.

여행에서는 언제나 돌발 상황이 발생되기 마련이어서, 이러한 돌발 상황마저도 즐기면 좋으련만, 아직도 내공이 부족해, 이번 돌발 상황에 여유 있게 대처하지 못하며, 오키나와를 떠나는 아쉬움을 묻을 틈도 없이 바로 체크아웃한다.

아내가 오른쪽 핸들을 잡는다. 아들은 구글맵 네비를 켜서 렌터카 회사로 출발시킨다. 구글맵은 이틀간 한 번도 안내하지 않은 시골길로 안내한다. 비닐하우스도 보이고, 비탈길의 차 한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길까지도 가이드한다. 아내는 좌충우돌하며 겨우 렌터카 회사에 도착한다.

조바심을 태우지 않았을 만큼 충분히 이른 시각에 렌터카 회사에 도착한다. 이렇게 조바심을 태우다가 무사히 시간을 맞추면 남는 시간 동안은 살짝 허탈해진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며, 절대로 피드백되지 않으므로, 콜럼버스 달걀처럼 사후의 관점에서 사건 전의 결정을 재단하면 안 된다. 그때는 그 결정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자!

렌터카 회사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나하 공항으로 출발한다. 새삼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 이틀 동안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아내와 아들도 첫키나와의 여행이 멋졌고, 다시 방문할 의사가 있다고 외친다. 오키나와의 매력에 흠뻑 절여지며, 앞으로 네 차례 더 방문해서 오키나와의 전설을 완성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첫키나와의 벅찬 여정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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