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낯
오디세이아를 처음 읽어보면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은 그리스에는 정체를 전혀 모르는 나그네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 일단 누구인지를 묻지 않고 극진하게 대접하다가 먹고 마시는 욕망이 어느 정도 충족된 이후에, 나그네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전통이 있었다는 것이다.
텔레마코스가 오디세우스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 이타케를 떠나 생면부지의 네스토르를 불쑥 방문하자, 네스토르는 일단 텔레마코스에게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를 건네고, 살코기를 구워 꼬챙이에서 뺀 다음 각자에게 몫을 나누어 준다. 텔레마코스가 충분히 포도주를 마시고 구운 고기를 먹은 후에야 비로소 그에게 질문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빼곡하게 지어진 아파트 단지의 입구부터 철통 경비를 서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그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일단 아파트 입구를 통과하더라도, 각자의 아파트를 찾아가려면 대문의 벨을 눌러야만 한다. 팬데믹 전에는 누군가 대문의 벨을 누르면, 집의 내부는 보이지 않으면서 집 외부를 살필 수 있는 핍홀(Peephole)을 들여다보며 대문 밖으로 찾아온 손님의 정체를 파악했다.
코로나를 겪고 난 이후에는 대부분의 아파트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 대문의 벨을 누르는 순간 바로 대문 밖으로 찾아온 손님이 불청객인지, 지인인지, 환대받을 친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다. 언택트가 일상화된 요즘은 불청객이 찾아오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집주인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손님들은 돌아가는 것 이외는 다른 선택지는 없다.
사유 재산 제도를 자본주의의 가장 빛나는 도그마로 신봉하는 우리 사회에 살고 있는 나는, 그리스인들의 환대 문화가 너무도 낯설다. 이런 그리스 문화 코드는 ‘크세이나(Xenia)’라고 불린다. 나무위키를 찾아보니 크세니아를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함께 나누고 또 손님이 말할 때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각 개인은 개별적으로 파편화되어, 모르는 사람과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2025년 새해에, 그리스의 크세니아는 살짝 낭만적으로 보인다.
한편, 텔레마코스는 방문하는 곳마다 환대를 받지만, 오디세우스는 고난의 연속이다. 외눈박이 폴뤼페모스를 만나자, 그는 즉시 오디세우스의 정체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에 오디세우스는 폴뤼페모스에게 이러한 태도를 따진다.
“아가멤논의 백성인 우리로 말하면 혹시 그대가/환대해 주거나 아니면 손님의 당연한 권리인 그 밖에 다른 선물을/줄까 해서 이리로 와서 그대의 무릎을 잡는 것이오.” 오디세우스의 대사 중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손님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 당시에는 환대가 손님의 당연한 권리였나 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손님이 이렇게 말한다면, 주인은 ‘적선을 받는 주제에 더운밥, 찬밥을 가리네!’라고 핀잔을 주며, 집에서 쫓아낼 것이다.
매정한 폴뤼페모스는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을 잡아먹어 버린다. 이에 오디세우스는 포도주를 건네고, 폴뤼페모스는 달콤한 포도주에 크게 기뻐하며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묻지만, 오디세우스는 폴뤼페모스를 속인다. “내 이름은 ‘아무도아니(Nobody)’요. 사람들은 나를 ‘아무도아니(Nobody)’라고/부르지요.”
‘아무도아니(Nobody)’를 일본에서는 무숙자라고 번역했다. 거주하는 곳이 없는 자라는 뜻의 무숙자는 나에게는 생경하다. 일본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사는 곳으로 규정하나 보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아무도아니(Nobody)’라고 속이고, 벌겋게 달군 말뚝을 폴뤼페모스의 안구에 찌른다. 폴뤼페모스는 자신의 눈에서 피투성이가 된 말뚝을 뽑아서 괴로워하며 동료들을 큰 소리로 부른다. “오오, 친구들이여! 힘이 아니라 꾀로써 나를 죽이려는 자는 아무도아니(Nobody)요”라고 꼰지르자, 동료들은 폴뤼페모스의 하소연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아냥거린다.
결국 오디세우스는 폴뤼페모스의 동굴에서 탈출에 성공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퀴클롭스! 필명의 인간들 중에 누가/그대의 눈이 치욕스럽게 먼 것에 대해 묻거든/그대를 눈멀게 한 것은 이타케에 있는 집에서 사는/라에르스테의 아들 도시의 파괴자 오디세우스라고 말하시오!” 폴뤼페모스는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듣고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바로 꼰지르자,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에게 엄청난 고난을 겪게 하고서야 자신의 고향 이타케로 돌려보낸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이는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꼬불꼬불한 미로를 자신의 감각으로 찾아가는 여정을 드론으로 공중에서 바로 보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젊을 때를 회상해 보면 왜 그렇게 선택했을까 질문하지만, 그때는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단으로 점점 더 분열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공통된 가치는 오직 자본주의의 가장 빛나는 도그마, 사유 재산 제도뿐이다. 다들 악착같이 자신의 사유 재산을 늘리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자신의 사유 재산에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할 조짐이 보이면, 드러눕기 바쁘다. 이런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그리스의 환대 문화는 놀람을 넘어서 충격적이다.
지금의 양극단 체제에서 오디세이아처럼,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하거나 음식을 함께 나누고 또 손님이 말할 때 귀를 기울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서로의 간극은 조금씩 좁혀지지 않을까? 손님을 환대할지 적선할지는 전적으로 우리 사회 각 구성원이 선택할 몫이다.
우리가 서구적 가치를 받아들여 지금의 사회를 구성한 지 어언 70여 년이 흘렀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처음 도입할 때는 우리의 전통 가치가 존재하여 따뜻함이 곳곳에 배어 있었지만, 1997년 IMF 사태는 우리들의 뼛속까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도록 숨통을 조였다.
우리 사회는 서구사회보다 더 완벽하게 자본주의를 내면화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사유 재산 제도의 도그마로 예전보다 더 팍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렇게 멋진 그리스의 환대 문화는 이미 오래전에 우리 전통문화에 존재해 있었다. 환대 문화가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되길 기원한다.
오디세이아:호메로스 지음/천병희 옮김/도서출판숲/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