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남북관계가 더더욱 악화되어가고 있다. 북한에서는 남한이나 미국과의 대화가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고 실제로 그 말을 행동으로 보이고 있는 중이다. 과거 김일성 시기부터 북한은 '외세에 간섭 없는 자주적인 평화통일'을 주장했지만, 올해 초부터는 이러한 입장을 전면 수정하여 미국이나 한국에게 자신들에게 도발하지 말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가고 있다. 거기다 작년부터 해외에서 운영하던 북한 식당의 경우 특히 중국이나 러시아를 중심으로 남한 손님들을 받지 않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남북관계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2024년 10월 12일 JTBC의 보도
2024년 10월 11일 북한은 "남한 측 무인기가 평양 상공에 침투하여 삐라를 살포했으며, 사건 재발시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 엄중히 경고했다. 필자는 지금 이 상황이 남북관계에 있어서 한국전쟁 정전 협정 이후 역사적으로 보였던 전쟁위기 수준의 긴장관계라 보고 있다. 북한의 이와 같은 주장을 엄중한 경고라 본다. 필자는 현 정권의 경우 아마 북한을 자극하려는 행위를 할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물론 한반도에서의 전쟁 긴장관계는 항상 있어왔던 일이었고, 한국전쟁 이후 전면전쟁으로 확산된 적은 아직 없다. 따라서 이번 사태가 전면전으로 확장되기보다는 2010년 연평도 포격과 같은 초긴장 상태의 국지전 혹은 그 이상의 국지전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본다.
미국의 핵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 한미군사연합훈련이 있을 당시 한반도에 진입하는 미 해군 전력이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생각보다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처럼 전면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답하지는 못하겠다. 비록 한반도의 경우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고 미국이 핵을 가지고 있기에 전면적인 충돌을 양측의 원하지 않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남북관계가 매우 악화되어가고 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중동전쟁 그리고 중국-대만 대립이 전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네이버나 유튜브에 있는 댓글러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마찬가지로 국내 언론의 보도들도 그렇다. 이들은 그저 미국이나 서방이 쓰는 보도를 액면 그대로 복사하고 있고, 현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이기에 나라도 정신 차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하루빨리 윤석열을 탄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1974년 대한뉴스 제 990호: 반공관제데모에 동원된 한국 사람들
현 남북 정세에 관한 얘기가 조금 길어졌다. 최근 남북관계가 악화되어가고 있는 상황이고, 그만큼 한반도가 초긴장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한번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미국의 대립을 다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 시절 한국 사회는 "북한 괴뢰가 우리를 침략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선전을 많이 했다. 애석하게도 이와 같은 주장은 프로파간다에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해 한번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우리가 보통 6.25 전쟁이라 불리는 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300~400만 명이나 되는 한반도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100~150만 명은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양민 학살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 비슷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로버트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다. 노엄 촘스키는 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 보다 3배 이상 기간이 더 길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폭격하는 미국의 B-29 폭격기
특히 미군의 폭격이 가장 극심했는데, 그 당시 북한이 겪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북한 사람들은 미군의 폭격으로 부모·형제·친구·이웃·동료가 죽어 나가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미 공군에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폭격의 대상이었지만, 그 폭격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불지옥이 펼쳐졌다. 그리고 폭격은 북한에 생존한 모든 이들을 가리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의 북한 폭격은 북한 인구의 20%를 살해한 것으로 악명 높다. 무려 100~200만 명의 인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니, 그 당시 전쟁으로 북한이 겪은 인명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현재 조선(북한)이 철두철미한 반미 국가가 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에 저지른 무차별 초토화 포격이라는 전쟁범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은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계기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사지가 불타고 찢기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반미교육을 강화한 데에는 전쟁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트라우마는 결과적으로 전후재건기 방공망 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대 당시 북한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소련의 S-25(장거리 지대공미사일)가 배치된 유일한 도시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최신식 지대공 무기들이 북한 전역에 배치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존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한반도에 배치됐던 전술핵무기 종류: 이처럼 한반도에 미국이 배치한 핵무기는 매우 다양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 공격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고조시켰다. 1958년 1월부터 미국은 남한에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 결과 대략 950개나 되는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됐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핵무력으로 파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의 무력이면 당시 북한과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 초중반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탄투는 대략 수백 개 정도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물려받아 북한의 위협을 정치 및 사회적으로 항상 내세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는 현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시 북한이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를 가질만했다.
한반도 전술핵 관련한 뉴스웨이 자료
이를 보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1958년 1월 말까지 미국은 대한민국 내 4곳의 각기 다른 무기 플랫폼에 대략 150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MGR-1 어네스트 존 로켓포 시스템, 280mm 대포와 203mm 핵 곡사포, ADM 핵지뢰가 여기에 포함됐다. 3월에는 미국의 타격 전투기들이 자체 핵탄두를 장착했고,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MGM-18 라크로스와 MGM-19 서전트, M-28 데이비드 크로켓 활강포를 포함한 전술핵무기를 위한 발사 장치가 즉각 뒤를 이어 배치됐다.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 비행 편대를 무력화하기 위해 기획된 허큘레스 핵무장 지대공미사일을 포함하여 각기 다른 8가지 이상의 미국 핵탄두들이 남한에 배치되었다. 1970년대까지 총 900개의 핵탄두가 한반도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 한국에서 나온 북한방문기인 『분단을 뛰어넘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분단의 장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땀이 흘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서민의 혈세가 소비되었을까? 또 한편 저 분단의 공사를 함으로써 높은 분과 군 장성 그리고 청부업자들의 배를 얼마나 부르게 했을까.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2배나 되는 인구를 갖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 그리고 최신의 미제무기를 장비로 갖춘 국군, 그 뒤에 미 지상군 4만과 해공군의 지원, 핵탄두 700개, 그것을 갖고도 현대판 만리장성까지 쌓았다. 그리고도 계속 남침의 위협을 고창하면서 국민을 억압한다."
평양의 지하철: 사실 이 지하철은 미국의 핵공격을 대비해서 만들어졌다. 사진은 국내기사에서 퍼왔다.
이런 사실은 생각보다 한국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이 한반도에 배치한 핵무력을 생각해 보자면, 북한이 미국에 느낀 공포는 당연할 것이다. 거기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초토화 폭격을 겪었기에, 그 공포심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북한)이 미국의 핵 공격에 맞서 그 대응으로 잠재적 공격 목표들을 요새화하는 데 상당한 투자를 했다. 따라서 북한은 이 부분에 상당한 투자를 하여 세계 최고로 터널이 가장 발달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 당시 북한의 김일성은 중국과 북베트남에 전투기 32대를 수용할 수 있는 요새화된 지하 비행장을 건설하는 전물 기술을 제공했다. 북한이 미국의 핵공격을 대비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바로 평양에 건설된 지하철이다. 북한은 1965년부터 지하철 건설에 나섰는데, 처음부터 그 목적이 미국의 공습과 핵 공격을 피하기 위한 대피소 용도였다. 이 지하철은 110m 이상 내려가 있어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철이다. 미국 또한 북한이 이런 방공시설을 잘 갖춘 것을 잘 알고 있다. 오죽하면, 미국 네오콘 세력의 상징이자 이라크 전쟁의 원흉인 도널드 럼즈펠드도 이에 대해, "북한은 어떤 나라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온 나라 전역이 지하로 들어갔고, 지하에는 어마어마한 수량의 무기가 설치된 곳들이 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남한에서 보낸 북파 공작원: 사실 간첩은 북한보다 남한이 더 많이 보냈다.
또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성사됐음에도 불구하고, DMZ를 중심으로 양측의 교전행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60년부터 1972년까지 대략 13년 동안 북파 공작원 약 2,150명이 실정 되었는데, 실제 파견한 숫자는 대략 2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즉, 한국전쟁 이후 10년이 지났음에도 남한은 북한에 엄청난 수의 간첩을 침투시켰다. 이는 북한이 남한에 보낸 남파 공작원 보다 많은 숫자다. 1950년이래로 1999년까지 남파 공작원의 숫자는 6,446명이고, 그중 생포자 3,177명, 사살자 1,644명, 자수자 275명이다. 즉, 보낸 공작원의 숫자만 보더라도 남한과 미국이 북한보다 더 많이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북미관계를 연구한 학자 A.B 에이브람스에 따르면, 1966년 10월부터 1969년 12월까지 비무장 지대에서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그 기간 동안 남한의 군과 경찰부대에서 1,0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고, 미군은 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중, 미군과 한국군 병력 374명이 사망했다. 거기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19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더 달라졌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급속도의 경제성장과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전망을 내세웠다. 그리고 그런 전략은 1960년대 한국 사회에 먹혀 들어갔다. A.B 에이브람스가 인정하듯이,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남한 안에서 북한이 대규모 폭동을 점화시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을 보도한 그 당시 국내 기사
북한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푸에블로호 선원들
현재 대동강에 전시된 푸에블로호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도발을 멈추지 않았었다. 1967년 8월 31일 미국의 RF-4C 팬텀기가, 5개월 후인 1968년 1월 14일 F-105D가, 다음 달인 2월 12일 F-4B 팬텀기가 북한 상공에서 격추됐다. 그리고 1968년 1월 23일 조선인민군 해군이 북한 영해를 침범한 USS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승조원 82명을 억류하는 일도 벌어졌다. 놀랍게도 그로부터 7일 뒤 베트남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뒤바꿀 구정 대공세가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북한이 북베트남을 도운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 승조원들은 11개월 후에 석방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1969년 4월 5일 미 해군의 EC-121 워닝스타 정찰 비행기 한 대가 북한 영해에서 격추됐다. 사망한 미군의 숫자는 31명으로, 냉전 시기 미 공군의 단일 손실로는 가장 큰 피해이기도 했다. 또한 미군의 OH-23 레이븐 헬리콥터가 북한 영공에서 격추당한 사건도 있었다. 1969년 8월 17일에 발생했으며, 북한은 미군 병사 3명을 포로로 잡았었다. 이 사건은 1969년 12월 이들이 석방되면서 해결됐다.
북한에게 격추된 미군의 EC-121
북한 공격으로 추락한 OH-58 헬기 조종사: 1969년 사진은 아니고 1994년 12월 17일 강원도에서 격추된 미군 헬기 조종사다.
이러한 분쟁은 1969년부터 남한에 주둔한 미군 주둔군이 본격적인 감축을 시작하면서 종료되었고,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기 시작하면서 종료되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분쟁을 도발한 주체가 미국이었다는 사실이다.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앞서 언급한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10대의 미군 항공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됐다. 격추된 이유는 이들이 북한 영토를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미국은 압도적인 핵무력으로 사실상 북한을 위협하는 수준의 무력을 보여 왔다. 거기다 1976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은 대개 1년에 최소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군사훈련인 팀 스피리트 작전을 항상 해왔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국이 한반도에 배치했던 전술핵은 1990년대가 되면서 모두 철수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반도는 긴장상태고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여전히 최신식 군함을 동원한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실행되고 있다. 사실 북한이 핵개발에 나선 이유를 보면, 이와 같은 긴장상태의 한반도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1985년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었다. 그리고 1991년 북한의 김일성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했고, 당시 대통령이던 아버지 부시는 9월 27일 주한미군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북한과 미국 둘 다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일성과 카터: 1994년 카터는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에 갔었다. 북한도 이를 긍정적으로 보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제는 1992년에 비정기시찰 진행 중 미국이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북한에게 요구하면서부터였다. 당연히 북한은 주권침해라 여기고 이를 거부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미국은 1993년 2월 25일 원자력기구관리이사회를 통해 특별 사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하고 북한이 끝까지 거부할 경우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갑자기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나빠진 건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클린턴 정부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다. 팀스피리트 훈련엔 미군과 한국군 20만이 동원되었고, 평양에 대한 핵폭격 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대규모 상륙훈련 등이 진행되었다. 1994년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실제로 북폭 계획과 북한을 상대로 한 전쟁까지 실제로 계획했었다. 즉 북한을 군사적으로 전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북한은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로 미국으로부터 극심한 제재를 받게 됐다.
리비아식 핵모델을 주장한 볼튼: 기사는 2020년 동아일보 기사다.
북한이 핵무장을 한 이유에는 미국이 보인 행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은 핵이 없는 나라 아프가니스탄을 2001년에 침공했고, 2003년에는 핵포기를 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침공했다. 더 나아가 미국은 2011년 과거 핵포기를 한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색깔혁명으로 전복했다. 과거 2018년 남북관계가 다시 화해무드로 갔을 때, 북한이 트럼프 행정부 인사 존 볼튼이 주장한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에 강한 반감을 드러낸 이유에는 이와 같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한국 정부가 주장하는 비핵화 모델은 현실 가능성도 없으며 현 한반도 상황을 너무나 잘못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미국의 국제정치학의 대가로 알려지며 한국의 우익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는 존 미어샤이머 교수는 "북한의 핵무장 때문에 한반도에 장기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 부분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 생각한다.
2024년 10월 7일 남침의사가 전혀 없다고 입장을 밝힌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
이제 다시 현재의 남북긴장 대치에 대해 얘기하겠다. 2024년 10월 8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한 얘기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라며,"남녘해방이나 무력통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먼저 침공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를 북한에서 밝힌 것이다. 또한, 김정은은 "대한민국이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북조선을 건드리지 말고 힘자랑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도 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을 보았을 때, 결국 남북관계 문제에서 잘해야 하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현 한반도 상황과 북한과 미국의 대결 그리고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이와 같은 역사를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주제를 글로 써본 것이다. 북한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핵위협을 받아왔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커밍스에 따르면, 미국은 한반도 분단을 획책했고, 북한의 지도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력으로 위협해 왔으며 그 결과 북한의 핵무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커밍스가 하는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 글의 목적은 북한을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작금의 처한 상황 속에서 있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역사를 바탕으로 본다면 분명 현재 북한과 미국 그리고 남북대치를 보다 넓은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