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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기 Oct 26. 2024

미국과 서방의 알바니아 체제 전복 시도

한국의 경상도 보다도 작은 나라를 체제전복 하려 했던 미국과 서방

동유럽 국가 중에 남부지역에 위치한 국가가 있다. 바로 알바니아(Albania)다. 알바니아는 유럽의 남서부, 발칸반도의 서북부에 위치했으며, 362km의 해안을 따라 약간의 초원이 있다. 그러나 국토의 76.6%가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수도는 티라나(Tirana)이며 알바니아는 행정구획 상 모두 12개의 행정구역을 지니고 있다. 현재 인구는 대략 300만 명 가까이 된다. 알바니아는 매우 작은 나라다. 나라 면적은 28,748㎢로 대한민국보다도 3.5배나 작은 나라이며, 한반도보다 8배나 작은 나라다.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보다도 조금 더 작은 나라다. 물론 인구 밀도는 경상도 보다 훨씬 낮다. 2024년 기준 경상도 인구가 1,250만 명 정도인데 반해, 알바니아는 인구가 284만 명이니 말이다. 다만 2003년 당시 한 추정치에 따르면, 알바니아 인구룰 358만 명이라 추정하기도 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경상도와 비교했을 때, 인구 밀도는 그리 높지 않다.     

유럽의 작은 국가 알바니아의 위치

알바니아를 한국에서 가는 방법은 튀르키예(터키)나 이탈리아를 경유해서 가는 방법이 있다. 지난여름 필자는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 들렸는데, 거기서 알바니아 티라나 행 비행기가 제법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알바니아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보니, 적잖은 한국인들이 이 나라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당연히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한국 사람들도 매우 많을 것이다. 비록 알바니아는 영토가 매우 작은 나라이지만,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세계사 시간에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요새를 함락시켜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인물이 바로 메흐메트 2세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자 자칭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메흐메트 2세가 정복하는데 무수히 많은 병력과 시간을 투입한 지역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알바니아였다.     

알바니아에 대한 소개: 출처는 걸어서 세계속으로다.

현재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 중심에는 이른바 스칸데르베그 광장(Skanderbeg Square)이 있다. 스칸데르베그는 앞서 언급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거세게 저항한 인물이다. 스칸데르베그는 25년이라는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대병력을 수차례에 걸쳐 격퇴시킨 인물이며, 이후 알바니아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비록 그가 사망한 이후 오스만 제국에게 400년이 넘게 지배를 받았지만, 민족주의적인 독립운동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거세게 일어났고, 1912년에 독립을 얻었다. 알바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5개월 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우두머리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알바니아를 점령했고, 알바니아에서는 침략자 이탈리아에 맞선 독립투쟁이 벌어졌다. 이 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역사학 교수 출신의 인물 엔베르 호자(Enver Hoxha)였다.     

엔베르 호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빨치산 투쟁을 이끈 인물이다. 이후 친스탈린 반수정주의 노선을 걸으며, 교조적인 공산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엔베르 호자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략하자 이에 맞서는 조직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투쟁에 나섰다. 단순한 대중시위를 넘어 무장 게릴라 활동을 벌였으며, 1941년에는 알바니아인민해방군을 창설했다. 엔베르 호자가 이끌던 알바니아인민해방군은 알바니아 전역에서 게릴라 투쟁을 벌였으며, 그리스 공산당(KKE)의 그리스인민해방군(ELAS)과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가 이끄는 빨치산 하고도 협력하는 관계를 구축하여 반파시즘 투쟁을 전개했다. 이들의 빨치산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으며, 알바니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군대의 병력은 1943년 말에 대략 2만 명을 넘겼다고 한다. 1944년 5월에는 병력 숫자가 더 증가하여 35,000명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알바니아 빨치산들의 무장투쟁을 그린 상상화: 알바니아의 빨치산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과 히틀러의 독일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43년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축출당하고 연합군이 접수한 이탈리아 남부에는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정부가 세워지면서, 알바니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보낸 나치 독일군이 들어왔다. 나치 독일 또한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학살과 방화 그리고 파괴를 알바니아에서 자행했으며, 적잖은 알바니아인들이 전쟁 기간 살해당했다.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인민해방군은 1944년 11월에 궁극적으로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수천 명의 독일군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놀랍게도 알바니아는 소련군이 진입하기도 전에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몰아낸 것이다. 물론 이런 역사적 사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1944년 11월 28일 수도 티라나에서 연설하는 엔베르 호자

Kristo Frasheri라는 인물이 1964년에 집필한 알바니아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알바니아민족해방전선은 총 26,594명이나 되는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그리고 협력자들을 사살했다고 한다. 또한, 차량과 전차 그리고 장갑차를 파괴 및 노획했는데, 그 수가 대략 2,100대 정도 된다. 반면에 전쟁으로 인한 알바니아인 사상자는 총 86,000명으로 그 당시 전체 인구의 7%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거나 불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알바니아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 수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엔베르 호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총선을 실시했으며, 1946년에 알바니아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호자는 알바니아 지역에서 대대적인 파시스트들 색출 작업을 하여 부역자들을 처단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엔베르 호자는 스탈린의 노선을 따르면서, 그 당시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주의자들도 숙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엔베르 호자가 알바니아의 총리가 된 이후 내무부 장관으로는 코시 죠제(Koci Xoxe)라는 인물이 임명되었다. 전쟁 직후, 죠제는 반대파와 반체제 인사 수천 명을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여기에서 숙청 대상자들 대다수는 파시스트에 협력한 인사들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숙청을 주도한 죠제는 친유고슬라비아주의자였는데, 티토-스탈린 분열 이후 1948년 알바니아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끊자 그 또한 1949년에 사형에 처했다. 그렇게 되면서 죠제의 빈 자리는 메흐메트 셰후(Mehmet Shehu)가 차지하게 됐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엔베르 호자: 사진에서 가장 왼쪽이 스탈린이고 가장 오른쪽이 호자다.

이처럼 알바니아는 전적으로 스탈린과 매우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따라서 소련에게 있어 소홀히 할 수 없는 동맹 국가였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친스탈린·친소 국가였던 알바니아는 소련에게 아드리하해에 있는 항구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지난번 그리스 내전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리스 내전이 우익과 미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소련의 선박들이 알바니아 항구에 들어와 그리스 민주군대의 잔존 병력을 태워 소련으로 데리고 왔던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즉,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 당시 알바니아가 소련의 동맹국이자 협조국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알바니아는 1953년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가 스탈린격하운동을 진행하면서, 스탈린 노선을 고수했고 1968년에는 아예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탈퇴했지만, 적어도 194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의 알바니아는 명명백백히 친소국가였다.     

1976년 알바니아 노동당 7차 당대회에서 연설하는호자: 뒤에 걸린 스탈린의 얼굴이 보여주듯이 호자는 사망하기 전까지 스탈린 노선을 고수하고자 했다.

앞서 언급한 그리스 내전에서 알바니아는 그리스 민주군대의 안전한 보급로와 주둔지 역할을 했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1948년 말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의 첩보 기관의 눈에 띄게 됐다. 서방 진영은 알바니아에 일련의 준군사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이 약소국을 자신들의 의재대로 통제하고자 했고, 실제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서방은 1945년에 실시된 알바니아 총선에서 파시스트 출신의 후보를 지지한 적이 있었다.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는 『워싱턴 불렛(Washington Bullet)』이라는 책에서 서구가 알바니아 선거에서 어떠한 인사를 지지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1945년 알바니아 총선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민주전선으로 출마해 전 의석을 획득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온 선거 감시단은 이것이 공정한 선거였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그들이 선호했던 알바니아 후보는 파시스트와 협력한 사람이었다. 그런 후보에게 표를 던지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거 감시단의 귀에는 젊은 빨치산의 목소리로 복수를 요구하는 <젊은이여, 복수해다오>라는 빨치산 노래가 들려왔다. 나치에 조력했던 알바니아인과의 계급 협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구는 1948년부터 알바니아를 전복할 계획을 세웠으며, 준군사작전을 동반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서구는 알바니아에서 침투 및 사보타주를 동반한 군사작전을 수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비지핀드 작전(Operation BGFIEND)과 벨류어블 작전(Operation VALUABLE)이다. 비지핀드 작전은 CIA의 부서 중 하나인 정책조정국(OPC, Office of Policy Coordination)이 수행했다. 이 계획의 첫 번째 핵심 부분은 실제로 조그 왕(King Zog)에 의해 구상되었다고 한다. 조그 왕은 알바니아의 국왕으로 1939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영국으로 도망쳤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파루크 1세의 도움으로 이집트에 정착했던 인물이다. 조그 왕은 1948년 12월 23일 자 편지를 카이로 주재 미군 무관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에는 “해외에 있는 알바니아 반체제 인사들을 이용하여 알바니아에 잠입한 뒤 공산주의 정권을 전복시키자는 제안”을 담고 있었다. 다만 조그는 이 제안이 불안정한 제안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벨류어블 작전과 관련된 서적

앞서 언급했듯이, 이와 같은 알바니아 체제 젠복 행위에는 이탈리아도 관여했는데, 이탈리아 해군 정보국은 조그 왕의 예상을 깨고 1948년 봄 알바니아에서 합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CIA의 또 다른 지부인 특수군사작전실(OSO, Office of Special Operation)과 접촉했다. 1948년 7월, OSO(특수군사작전실)는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모집한 알바니아 반공 반체제 단체가 침투에 성공하도록 하기 위해 이탈리아군에 C-47 항공기와 자금 및 물자를 제공하기로 합의했으며, 채리티 작전(Operation CHARITY)을 수행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알바니아 내의 반공 저항 세력과 연계하고 내부 정치 상황, 방어 시설, 전투 서열(부대의 편성과 편제, 단위부대 부호, 지휘 구조, 병력의 배치와 운용 및 장비, 보급 방법 등을 정리하여 계층 분포로 표현한 정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15일 알바니아 중부에 첫 시작으로 4명의 요원이 투입되었고, 이 중 3명은 4월 28일 그리스 카스토리아에 있는 기지로 살아서 돌아왔다. 이후 이탈리아는 두 번째 ‘쌍둥이’ 프로젝트인 폰타나 작전(Operation FONTANA)을 게시했다.     


1949년 6월 정책조정국(OPC)은 자체적인 체제 전복 프로그램인 비지핀드 작전을 추진하여 공식적인 승인을 얻었는데, 이 작전에서 최소한의 목표는 엔베르 호자 정권이 더 이상 그리스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을 지원할 여력이 없을 정도로 호자 정권 그 자체에 반대 및 반체제 행위를 선동하는 것이었다. 물론 작전의 최대 목표는 정권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것이었다. 다시 정리하자면, 1949년 말까지 알바니아에서는 세 개의 작전이 별도로 분리되어 진행되고 있었다. 즉, 미국·영국·이탈리아가 별도로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MI6로 더 잘 알려진 영국 정보기관이 자체 프로젝트인 벨류어블 작전(Operation VALUABLE)을 1949년에 실행했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미국이나 이탈리아의 작전과 비슷한 성격으로, MI6가 알바니아 반공 망명자들을 모집해 몰타에서 훈련시켜 알바니아에 침투시켰다. 앞서 언급한 비지핀드 작전과 벨류어블 작전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미국 CIA의 정책조정국(OPC)과 MI6, 미국 국무부, 그리고 영국 외무부는 알바니아에 대한 각국의 고위급 정책을 같이 조정했기 때문이다.     


알바니아에 대한 첫 번째 침투는 영국의 MI6가 감독했다. 각각 4명으로 구성된 두 팀이 1949년 10월 초 알바니아 남부해안에 상륙했으며, 이 작전은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그 당시 알바니아에는 비밀경찰조직인 시구리미가 있었는데, 이 시구리미가 침투한 요원들을 가로막았고 작전 중 4명이 죽으면서 실패로 끝났다. 1950년 1월, CIA 보고서에 따르면 비지핀드(BGFIEND)는 총 11개 팀을 알바니아에 침투시켜 군대와 공산당에 침투해 저항군을 조직하고 일부 목표물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이 작전에서는 지하신문을 창간하고 수백만 장의 선전물과 반체제 선전물, 전단지를 공중 투하하는 등 심리전을 수행했다. 이때 알바니아에 뿌려진 상당수의 선전물과 전단지에는 스탈린을 우스꽝스럽게 조롱하는 만화가 실렸다.     

CIA와 MI6의 알바니아 침투작전에 관해 다룬 서적

이와 같은 알바니아 침투 과정에서 작전으로서 경제전쟁도 실행됐다. 비지핀드 작전 요원들은 알바니아의 산업 및 농업생산 센터를 파괴하고, 공산당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위조 화폐와 가짜 식량 쿠폰을 유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서구는 알바니아의 국경 밖에서 정책조정국은 침투한 요원들에게 “알바니아의 수출 상품의 저질품들을 섞거나, 이를 파괴 및 방해 혹은 지연시키고, 트럭 및 트랙터용 예비부품들을 제외할 것을 촉구”했다. 물론 이와 같은 계획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고, 1950년 8월, 미 국무부와 영국 외무부는 정권전복 계획을 포기하고 저강도 게릴라 활동과 정보 수집에만 집중하기로 합의했다. 놀랍게도 CIA는 준군사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캠프를 마련했는데, 그 캠프가 서독에 있었다.     

몰타에 있던 알바니아 침투 요원의 훈련 기지

그러나 이와 같은 체제 전복 작전 또한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알바니아의 시구리미가 초기 단계에서부터 훈련 기지에 침투해 비지핀드(BGFIEND) 요원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침투 작전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1950년 12월과 1951년 5월, 상당한 규모의 채리티 작전팀이 알바니아 보안군과 두 차례의 대규모 총격전을 벌였다. 두 명의 이중 첩자에게 배신당한 8명의 반공 알바니아인으로 구성된 부대는 알바니아의 쿠케시(Kukes) 인근 제페(Zepe)에서 알바니아 정부군 450여 명과 충돌했고,  이탈리아 측의 전투 보고서에 따르면 “치명상을 입은 채리티 분대장이 자신의 아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지휘해 달라고 부탁했다”을 정도였다. 제페 전투에서 살아남은 네 명은 알바니아의 무넬라에서 다른 동료들과 합류했지만, 5월에 다른 두 명의 망명자에게 배신당하고 이번에는 최대 600명의 알바니아 정부군에게 포위당했다. 결국 이탈리아의 작전도 실패한 셈이다.     

벨류어블 작전관련 사진: 영문위키백과에서 가지고 왔다.

아무튼 비지핀드 작전으로 침투한 팀들은 종종 탈영병이나 이중첩자에게 배신당했고, 곧이어 마흐메트 셰후가 이끄는 시구리미에게 살해되거나 체포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1952년 1월에 작성된 작전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전년도에 54명이 훈련을 수료했으며 이 중 39명이 알바니아에 성공적으로 잠입했다. 그러나 이 중 6명이 사망하고 4명이 생포되었으며 6명은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했고 3명은 실종됐다. CIA의 정책조정국은 이와 같은 결과에도 인내심을 잃지 않고 더 많은 알바니아 이민자 팀을 훈련하여 파견했고, 결국 이들의 행동은 침투한 이들의 죽음이나 체포로 이어졌다. 결국 1955년 말 CIA는 수백만 달러가 투입된 작전에 알바니아의 공산주의 강화라는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은 것 외에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음을 결국 인정했으며, 알바니아 침투 작전은 약간의 기념식과 함께 궁극적으로 취소됐다.     

독일 뮌헨에서 준군사요원을 모집하고 있는 미군들
1950년 당시 알바니아 반공병사들을 사찰하는 미군 던(Dunn) 대령
알바니아에 침투한 CIA 요원을 체포한 비밀경찰 시구리미
알바니아 체제 전복에 대해 미국에게 동의 및 그린라이트를 보낸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해당 사진은 티토가 미 장성인 존 리랑 대화를 나누고 있다. 참고로 유고슬라비아도 협력했다.

흥미롭게도 이 알바니아 침투작전이 실패 원인이 영국의 소련 스파이로 유명한 킴 필비(Kim Philby)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킴 필비는 MI6 요원으로 소련을 위해 비밀리에 활동하는 영국 스파이 조직인 악명 높은 ‘케임브리지 파이브’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1963년 모스크바로 망명하기 전인 1949년 10월부터 1951년 6월까지 필비는 워싱턴에서 CIA의 연락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따라서 필비는 얼마든지 이를 소련 및 알바니아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필비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서술했지만, 필비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미국의 정책조정국과 영국의 MI6는 각자가 보유한 알바니아 임무에 대한 작전 및 전술적 세부 사항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킴 필비가 모스크바나 티라나에 정확한 정보를 보고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 알바니아에 건설된 벙커: 이때문에 엔베르 호자에 대해 벙커링이라는 밈이 있기도 하다.

실패 원인은 복합적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서방의 알바니아 체제 전복은 실패로 끝났다. 1940년대 후반부터 1955년까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는 요원들을 침투시켰다. 영국과 미국에서 보낸 요원만 500명이 넘고, 준군사요원의 경우 대략 2,000명 정도 된다. 미국은 이 작전에서 5대의 잠수함과 180대의 C-47 수송기 그리고 80대의 상륙정을 동원했다. 총 300명의 요원이 알바니아에 침투하여 사살됐고, 미국·영국·이탈리아가 보낸 준군사요원 중 961명이 사살되거나 체포됐다. 또한, 463명의 알바니아 민간인도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결과만 낸 채 작전은 끝났고,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견고해졌다. 인터넷 상에서 엔베르 호자가 알바니아 전국을 벙커로 요새화했다고 하는데, 그런 행위를 하게된 이유에는 바로 이와 같은 군사적 침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구의 알바니아 침투 관련 유튜브 영상: 상당히 수준 있는 영상이다. 이 글도 해당 유튜브 영상을 많이 참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국이 한국의 경상도 보다도 작은 나라를 전복하기 위해 이런 노력을 벌였다는 게 놀랍고 우습다. 결국 알바니아라는 나라를 만만하게 보았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국은 매우 작고 가난한 나라마져도 자신들의 체제와 반대된다고 판단하면 전복하려고 했다. 미국의 정치공작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는 한국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 알바니아를 체제 전복하려 했다는 데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이와 같은 정치공작행위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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