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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의 기원과 미국

미국은 우크라이나 나치 세력을 지원한 장본인이다

by 김남기

(잔혹함주의. 해당 글을 너무나도 잔혹한 내용과 사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조프 연대의 마크와 나치 깃발.

지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군이 대규모 진격을 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물론 전쟁의 기원은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나 2014년 돈바스 내전부터 잡을 수도 있겠으나, 전면전쟁이라는 측면에선 2월 24일이 맞긴 하다. 물론 글쓴이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는 주장은 지극히 서구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서 나온 관점이라고 본다. 2014년부터 2022년 사이 8년간 전개된 돈바스 내전은 우크라이나의 포로셴코 정부가 러시아 정체성을 가지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러시아인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과 범죄 그리고 학살의 과정이었다. 대략 15,000명의 돈바스인이 살해당했다. 그리고 파리올림픽 기간 우크라이나는 자신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쿠르스크를 공격했다.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공격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에서 글쓴이는 러우전쟁 내러티브가 명백히 서구 제국주의 시각으로 편향되었다고 생각한다.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러시아군에 의해 파괴된 M1 에이브람스 탱크.
우크라이나 측에서 제시한 북한군 특수부대 신분증: 놀랍게도 여기에는 이정재 얼굴이 들어가 있다. 심지어 러시아어로 이정재라 써있다.

러시아군의 개전 이후 3년이 지난 현재 러우전쟁은 명백히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독일 등 서방의 현대식 무기들은 이번 전쟁에서 무력화됐다. 지난 2023년 소위 걸프전쟁의 게임 체인저로 불리던 미제 M1 에이브람스 탱크가 우크라이나에 보내졌지만, 러시아 측에 따르면 해당 에이브람스 탱크는 무려 20대나 격파됐다. 아직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보통의 경우 러우전쟁에서 러시아 측 사상자를 10만 명으로 잡고, 우크라이나 측을 수십만 명으로 잡는다. 지난 21세기 다른 전쟁들에 비해 우크라이나 측 민간인 사망자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글쓴이는 이번 러우전쟁이 미제국주의의 몰락을 보여준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2021년 8월 20년간 전개되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탈레반의 승리로 끝난 지 6개월 만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났고, 미국과 집단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이번에 전쟁에서 패배자로 등극해 가는 중이다. 한국 언론은 우크라이나 전선에 북한군이 투입되었다는 우크라이나발 가짜뉴스들을 윤석열의 12.3 계엄사태 전까지 마구잡이로 뿌려댔는데, 글쓴이는 이것이 한국의 파병을 유도하려는 우크라이나와 미국 바이든 정부의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파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국 또한 패전국이 될 뻔한 일을 내부문제로 면하게 됐다. 불행 중 다행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코로트킨이 러시아에 있을 당시 했던 범죄행위: 2007년 코로트킨은 러시아 네오나치 막심 마르친케비치와 더불어 외국인 두명을 칼로 참수 및 총살한 혐의로 기소됐다.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세르게이 코로트킨: 현재 아조프 대대 간부로 러시아 네오나치였다가 우크라이나로 도망쳐 아조프에 합류했다.


세르게이 코로트킨이 2007년 참수영상의 참수자라는 증거: 해당 내용은 영문위키에서 찾았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이런 나치 살인마를 보호해주고 있는 중이다.

글쓴이는 이번 러우전쟁에서 가장 분노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크라이나 나치즘을 대하는 한국과 집단서방의 태도다. 이들은 마치 러시아에도 네오나치가 있다고 핑계를 댔다. 물론 이것은 엄청난 맥락 무시이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가 파시즘을 무찌른 주체라는 걸 집단 망각한 것이고, 푸틴 정부가 네오나치 청산 작업을 거쳤다는 것을 철저히 외면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다못해, ‘1일천하’를 일으킨 프리고진의 바그너 그룹에 대해서도 네오나치 조직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사실 해당 네오나치로 지목된 디미트리 우트킨의 경우 네오나치 이력으로 감방에 갔다 온 인물이었다. 즉,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달리 네오나치를 불법화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네오나치들을 소탕했다. 2007년 러시아의 네오나치가 다게스탄인과 타지키스탄인을 납치하여 참수한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 한 사람은 목이 칼로 썰렸고, 다른 이는 권총에 맞고 즉사했다. 그 영상은 모스크바 인근에 있는 숲 속에서 촬영되었으며, 영상은 나온 네오나치들은 하켄크로이츠를 배경에 두고 두 외국인을 죽인 다음 나치식 경례를 하며 끝난다. 해당 영상에서 민간인을 잔혹하게 죽인 네오나치는 푸틴 정부의 탄압으로 우크라이나로 도망처 네오나치 군대인 아조프 대대 간부가 됐다. 이런 사실들은 한국 언론과 서구 언론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과 독소전쟁을 조명한 책.

러시아는 80년 전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경험이 있다. 그 당시 소련은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2,700만 명이 죽었다. 군인이 1,000만 명 민간인이 1,700만 명이 죽었으며, 히틀러 홀로코스트 피해자 대다수는 소련에서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 측 사망자는 그 당시 러시아 인구의 1/8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런 역사를 가진 러시아에 대해 네오나치가 있다고 주장하는 서방은 말 그대로 역사적 망각과 허상 속에서 사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역사만 보러라도 집단 서방이 얼마나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집단서방의 역사적 망각은 2024년 국제여론조사기관인 레드필드 앤 윌턴(Redfield and Wilton)을 보아도 알 수 있다. 2024년 6월 5~6일에 실시한 이쪽 여론 조사에서는 “나치 독일을 무찌르는 데 가장 많이 기여한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의 42%가 영국, 12% 미국, 6% 프랑스로 대답했는데, 놀랍게도 소련은 프랑스와 같은 수치인 6%를 기록했고, 반면 모른다는 21%를 기록했다. 즉, 이 여론조사의 응답 비율을 보면, 집단서방의 일반사람들은 영국이나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승전에 가장 많이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나치 독일의 패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는지’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여론조사 결과
나치 부역자에게 박수를 보낸 캐나다 의회: 이것은 집단서방의 비뚤어진 역사관을 방증하는 증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서구의 역사왜곡은 심각한 수준이다. 앞서 언급한 소련 측 전사자만 보더라도 집단 서방이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이나 문제에서도 망상에 가까운 소리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정점을 찍는 것이 우크라이나 나치즘 문제다. 사실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은 단순히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그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러우전쟁과 집단 서방 얘기가 길어지면서 서론이 다소 길었다. 지금부터는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의 기원과 미국의 지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스테판 반데라: 나치 협력자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크라이나는 그를 영웅으로 모시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운동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략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 정권이 존재하던 때라고 보면 된다. 그 당시, 소련 영내의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민족주의자기구 즉 OUN이 창설되었는데, 이 운동을 이끈 인물이 바로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였다. 해당 조직은 1929년 나치당의 도움을 받아 결성됐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인종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조직이었다. 즉, 스테판 반데라와 해당 조직은 태생부터가 파시스트였다. 1934년 스테판 반데라와 OUN 일당들은 폴란드 측 내무장관 브로니스와프 피에라츠키와 고등학교 교장인 이반 바비를 살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이 OUN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교장선생의 경우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과 소비에트-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지휘한 사람이었다. 즉, 반공주의자라도 자신들과 노선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렇게 죽이던 게 스테판 반데라의 조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크게 3방향을 향해서 전개됐다. 하나는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고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그리고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키예프(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였다. 소위 전격전(Blitz Krieg)라 불리는 독일군의 전술로 우크라이나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선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다. 2016년 영화감독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올리버 스톤(Oliver Stone)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Ukraine On Fire’를 내용을 보도록 하자.


“소련에게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스트 침략자로부터 조국의 영토를 지키고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간단하지 않은 문제였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우크라이나가 그 당시까지 단 한 번도 통일된 국가였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만든 해방자로서 침략자 독일군을 환영했으며, 노골적으로 나치 독일에게 협력했다. 이 우크라이나인들의 협력 규모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는 전쟁이 끝난 이후 몇 년 동안만 하더라도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군대 사단 혹은 대대급 군사병력이 우크라이나 나치 협력자들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인들로 구성된 나치 무장 친위대원들.
우크라이나 나치군대를 사열하고 있는 무장 친위대 지도자인 하인리히 힘러.

1941년 독소전쟁 초기 1달도 안 되어 나치 친위대는 우크라이나에서 군 병력을 대규모 사단 급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1달도 안 된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 나치 친위대의 규모는 최소 8만 명을 돌파했으며, 이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나치의 목적은 당연히 인종청소 및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즉, 이걸 진두지휘한 것이 스테판 반데라의 OUN이었다. 1941년 9월 29일에서 30일 키예프 바비야르(Babi Yar)에서 33,771명의 유대인을 기관총으로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됐다. 충격적이게도 나치가 유대인 절멸 정책을 최종적으로 승인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1941년만 하더라도 무려 15~2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나치와 OUN과 같은 우크라이나 극우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무려 120~15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와 우크라이나 극우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볼린 대학살 당시 잔혹하게 죽은 민간인 시신-1.
볼린 대학살 당시 잔혹하게 죽은 민간인 시신-2: 헤당 사진은 폴란드 측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았다.
볼린 대학살 당시 잔혹하게 죽은 민간인 시신-3: 해당 사진은 우크라이나 봉기군이 목메달아 죽인 아이들의 시신이다.
볼린 대학살 당시 잔혹하게 죽은 민간인 시신-4: 우크라이나 봉기군이 학살한 아이로 가운데에 있는 아기는 산채로 내장을 적출당했다. 우크라이나 나치들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폴란드에 있는 볼린 학살 추모비.

우크라이나의 OUN과 더불어 스테판 반데라와 긴밀히 연결된 또 다른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 조직이 있었다. UPA로 불린 우크라이나 봉기군이 바로 그러했다. 우크라이나 봉기군은 1943년에서 1944년 사이 갈리치아 지방에서 인간으로서는 했다고 믿기 힘들 정도의 매우 잔혹하고 천인공노할 학살을 자행했다. 그게 바로 볼린 대학살(Volyn Massacre)이다. 볼린 대학살은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폴란드인 10만 명을 인종청소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해당 학살은 사진 자료도 많이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나치즘 역사를 연구한 대전대학교의 구자정 교수가 쓴 『우크라이나 문제의 기원을 찾아서』를 보면, 볼린 대학살 시기 우크라이나 봉기군에게 학살당한 아이의 시신이 나온다. 해당 사진에 나온 세 어린이 모두 우크라이나 봉기군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한 채 사망했는데, 해당 사진에 나온 중간의 아기는 산채로 내장을 적출당했다. 해당 글을 쓰며 고통스러울 정도로 너무 끔찍하다는 말이 나온다. 제주 4.3학살 당시 서북청년단이 보여준 그 이상의 잔혹함을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인 인종청소를 자행했던 미콜라 레베드: 전쟁 이후 미국이 그를 보호해줬고 미국에서 잘먹고 잘살았다.

해당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와 로만 슈케비치(Roman Shukhevych) 등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나치 독일이 소련에게 패망할 기미가 보이자, 소련과 독일에 맞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파시스트적인 사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8월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한때 동맹이었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다. 냉전 초기 우크라이나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이 우크라이나 나치들을 소련을 공격하는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이들은 분명 전범으로 처벌받아야 했지만 절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에게 있어 이들은 소련을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에는 앞서 언급한 미콜라 레베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레베드는 로마로 탈출해 연합국과 접촉했다. 미 육군 방첩대는 1947년 레베드와 손을 잡고 그를 뮌헨으로 빼돌렸다. 레베드는 이듬해부터 뮌헨에서 CIA와 협력하기 시작했다. 1949년 6월 CIA는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나중에 법무부가 레베드를 추방하려고 하자 후일 CIA 국장이 되는 앨런 덜레스는 그가 CIA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인물이며 핵심적인 작전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1945년부터 미국이 반데라의 존재를 인지했다는 근거: 해당 자료는 2016년에 나온 올리버 스톤의 다큐 Ukraine on Fire에서 가지고 왔다.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나치 전범 스테판 반데라를 구해줬다는 근거: 해당 자료도 Ukraine On Fire에서 가지고 왔다.

즉, 미국은 우크라이나 나치 협력자들을 냉전 시기 이렇게 이용하고 있었다. OUN의 지도자였던 대량 인종 학살자 스테판 반데라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뮌헨에서 활동했고 미국 CIA에 협력했다. 2022년 미국의 윌슨센터(Wilson Center)에 올라온 글인 “(Operation ANYFACE: How the US Army Shielded a Ukrainian Nationalist from Soviet Intelligence)”의 내용을 참고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6년 6월 8일 미군의 CIC(미군 방첩대) 소속 특수요원 로버트 리더(Robert R. Reeder)와 스티븐 로스탄(Stephen C. Rostan)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소련 정보요원 2명과 만났다. 이들은 미국인 배반자로 지명수배된 프레드 칼텐바흐(Fred Kaltenbach)를 체포하는 데 소련의 지원을 끌어내고자 했다. 칼텐바흐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의 선전을 담당했던 미국인으로 미국 입장에선 배반자였다. 즉, 미국은 그를 전쟁 이후 체포하기 위해 소련의 협조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2022년 미국 우드로 윌슨 센터에 올라온 스테판 반데라와 미국 관련 글: 해당 글은 미국이 스테판 반데라를 어떻게 도왔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소련 측은 미군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소련의 배반자들의 명단을 미국인들에게 건내주면서 맞교환을 제안했다. 그 당시 소련이 지목한 인물이 바로 앞서 얘기한 우크라이나 나치인 스테판 반데라였다. 스테판 반데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뮌헨으로 갔다. 미국은 수많은 전쟁범죄 용의자들을 소련에 인도했지만, 스테판 반데라는 예외였다. CIC는 이와 같은 소련의 요청을 묵살하며 반데라의 행방을 모르는 척했다. 이것은 소련을 속이기 위한 기만작전이었고, 이 암호명을 ‘Anyface’ 작전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즉, 이렇게 스테판 반데라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우크라이나를 대상으로 한 반소 공작에 동원됐다. 그러던 1959년 반데라는 소련 KGB가 보낸 자객에 의해 서독 뮌헨에서 암살당했다.


미국 CIA는 1948년 말부터 이들과 협력해 우크라이나 나치 스파이들을 소련에 침투시키는 계획에도 착수했으며, 1949년 9월 5일부터 낙하산으로 우크라이나 현지에 침투시켰다. 놀랍게도 이런 공작은 스탈린 사후인 1954년까지 지속됐다. 그 외에도 소련 치하의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던 일부 잔존 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벨라도나 작전(Operation Belladonna 1946), 스라소니 작전(Operation lynx, 1946) 그리고 삼지창 작전(Operation Trident, 1947)등을 전개했었다.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 따르면 미국과 이들의 관계는 1946년부터 협력관계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사실 미국의 이런 친나치파 이용은 단순히 우크라이나를 대상으로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46년부터 개입한 제2차 그리스 내전에서도 미국은 나치 협력자들인 그리스 왕당파 우익 세력들을 후원했고, 내전을 우파의 승리로 이끌었다. 그 결과 10~15만 명의 그리스 민간인이 사망하고, 80만 명이 난민이 됐으며 그리스에는 우익 군사독재 정부가 세워졌다.

2022년 러시아 연방 공산당 전 두마의원이자 역사학자가 쓴 글 내용: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소련 사람 5만 명을 죽였다.

1945년에서 1953년까지 대략 8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국과 영국이 지원하는 우크라이나 나치들은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했고, 대략 3만 5,000명에서 5만 명의 소련 민간인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인 학살을 자행했던 미콜라 레베드는 스테판 반데라와는 달리 살아남았다. 그는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았으며, 뉴욕에서 여생을 마쳤다. 소련사에 대해 깊이 연구한 미국의 몽클레어 주립대학교 교수인 그로버 퍼(Grover Furr)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볼린과 갈리치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미콜라 레베드는 1990년대까지 뉴욕시 퀸즈에서 살았으며 CIA와 미국무부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았다.”


따라서 미국은 우크라이나 나치들을 이렇게 보호해줬다. 현재 서구에 퍼진 홀로도모르 관련한 이야기들의 출처도 따지고 보면, 이런 나치들이 주장한 것들이 제법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은 항상 서구사회에서 외면받는다. 소련 공산당은 스탈린 시절부터 우크라이나 나치세력들을 탄압했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결국 1950년대 우크라이나 나치 세력들은 지하로 숨게 됐다. 그러나 1980년대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하고, 소련 연방이 해체될 기미가 보이자, 우크라이나에서는 1980년대 후반 전후로 다시 이 나치 세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1991년 소련 해체를 전후로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자, 우크라이나 나치 세력들이 다시 등장했다. 대표적으로 우크라이나 극우정치 조직인 스보보다(Svovoda)의 대표 올레크 타니북(Oleh Tyahnybok) 같은 우크라이나 나치들이 그 당시 등장했다.

우크라이나 스보보다의 대표인 네오나치 올레크 타니북의 나치식 경례 사진.

이후 우크라이나의 정권들은 스테판 반데라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나치 세력들을 소련에 맞선 민족영웅으로 추앙했다. 그러나 2010년에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의 지지를 통해 당선된 빅토르 야누코비치 정권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2013년 유로마이단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야누코비치 정권을 전복했다. 유로마이단이 서구의 정치공작이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한신대학교 이해영 교수가 쓴 저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라는 책에는 미국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해당 내용을 통해 미국 네오콘인 빅토리아 눌런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해영 교수의 러우전쟁 관련 저서: 해당 저서는 러우전쟁과 우크라이나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알린 국내 서적이다.

“2014년 유로마이단 당시에 미국 국무부 빅토리아 눌런드 차관보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대사의 통화 내용이 유출되면서 쿠데타의 배후로 눌런드가 지목됐다. 특히 ‘F**k the EU’ 발언에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이 격분했지만,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이 우크라이나 야권의 ‘빅3’ 중 하나로 올레크 타니북을 거명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당시 미국의 구도는 우크라이나 정부 내부에 미국이 후원하는 야세뉵을 총리로 세우고, 외부에서 서우크라이나 리보프에 근거를 둔 네오나치 조직 스보보다당을 동맹 파트너로 동원하는 것이었다.”


이러다 보니, 러우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은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이나 한신대학교의 이해영 교수 등은 유로마이단 자체를 미국이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를 동원한 뻔뻔한 색깔혁명으로 보고 있다. 글쓴이 또한 해당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이 맥락은 미국이 과거 냉전시기부터 우크라이나 나치들을 소련에 맞서는 무기로 지원해왔다는 점에서 명백해진다고 본다.


유로마이단 이후 등장한 포로셴코 정부는 2014년부터 국가의 예산 지출 방향을 복지로부터 군사력 강화로 바꿨다. 2015년에서 2019년까지 우크라이나의 국방비는 17억 달러에서 89억 달러로 증가했으며, 2019년에는 GDP의 6%를 차지하는 수준에 달했다. GDP 비율로 비교해보자면 우크라이나는 서방 선진국에 비해 3배나 더 많은 금액을 군대에 투자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네오나치 세력들을 군사화했다. 2013년 유로마이단 이후 돈바스 내전이 터지자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은 여기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심지어 그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국회의장으로 네오나치 출신인 안드리 파루비(Andriy Parubiy)가 됐다. 파루비는 그 유명한 극우 네오나치 조직인 아조프(Azov)의 수장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미국이 세운 정권 하에서 국회의장이 된 것이다.

아조프 대대 병사들.

놀랍게도 개전 초기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세력들은 한국 언론과 서구 언론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개전 초기 러시아군은 마리우폴을 함락하기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사실 마리우폴 포위전이 길게 끈 것은 아조프 부대가 민간인들을 아조프 제철소에 인질로 잡고 버텼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조프 제철소 지하로 대피했던 우크라이나 주민인 나탈리아 우스마노프는 독일언론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고, 아조프 네오나치들이 한 짓을 고발했다. 놀랍게도 독일의 슈피겔은 내용상의 불일치를 이유로 해당 기사 내용을 삭제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생각대로 러시아군이 인도적 회랑으로 나오는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괴롭힌다는 증언이 필요했는데, 그와 정 반대되는 증언이 아조프스탈에 있던 민간인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해당 증언을 보면, 아조프가 민간 시설과 직장건물에서 민간인을 인질로 잡고 러시아군에 맞섰던 것이다.

스테판 반데라를 찬양하는 우크라이나인들.

러시아군은 개전 초기 마리우폴을 함락한 이후 아조프 대대 본부에 진입했다. 충격적이게도 아조프 연대 본부에는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비롯한 나치 상징물이 다수 나왔고, 그 가운데 미국 육군본부가 2008년에 편찬한 『야전교범』과 미군만 사용하는 저격용 탄환이 발견됐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군대가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물 중 하나다. 따라서 이와 같은 증거들은 아조프의 네오나치 세력들이 미국에게 지원받아 창설된 조직임을 보여준다. 미국은 2014년부터 수백 명에 달하는 교관을 파견하여 우크라이나군을 훈련시켰다. 즉, 아조프와 같은 네오나치들도 미국에게 군사훈련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숨긴 채, 한국의 언론과 서방 언론은 마리우폴에서 싸운 우크라이나 나치들을 영웅적인 전사들로 묘사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는 네오나치를 정규군으로 편성한 나라다. 심지어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포병대까지 있는 나라다. 즉, 이런 나라의 네오나치 군대를 우크라이나 민족의 영웅으로 둔갑시킨 것은 영미 언론들이다.

나치 깃발을 축구 경기장에서 흔드는 우크라이나인들.

이처럼 우크라이나 문제는 보면 볼수록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추악한 면모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러시아의 침공이라는 내러티브에 빠진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관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철저히 외면한다. 거기다 이번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은 명백히 NATO의 동진과 우크라이나 파시스트들의 탄압과 학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제 전쟁은 명백히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다. 이를 두고 다극화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표현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시대에 맞추어 우리는 러우전쟁의 진실과 그 진실 중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문제를 바르게 알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글쓴이의 입장을 밝히며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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