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될 무렵 이란에서는 무슨 일이?
2008년에 개봉한 독일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는 1960년대 68혁명 시기 서독에서 극좌 무장투쟁 및 테러도 서슴지 않았던 조직 바더 마인호프를 심층적으로 다뤘다. 영화는 68혁명 시기 서독의 좌파 청년들이 왜 극단적인 무장투쟁의 길로 들어섰는지를 상당히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명한다. 그 당시 미국이 진행하고 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환멸과 친서방 국가 이란에 대한 지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등과 같은 세계적으로 미국이 일으키는 폭력행위는 독일의 청년들을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화 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바더 마인호프와 같이 무장투쟁을 독일내에서 벌이는 수준까지 간 것이었다.
영화의 초반부를 보면, 서독의 학생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독의 젊은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고, 경찰은 이를 강경진압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경찰이 쏜 총탄에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에서는 급진적인 무장투쟁 조직인 바더 마인호프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당시 서독의 젊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한 이유는 바로 이란의 전제군주 팔레비 샤(Pahlavi Shah)가 서독을 방문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란의 샤가 도데체 어떤 인물이기에, 서독의 좌파 대학생들은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했던 것일까?
이란은 서남아시아와 중동에 위치한 나라다. 상당히 넓은 국토를 가지고 있으며, 인구 또한 2024년 기준 9,000만 명 가까이 된다. 이란은 레바논 보다 훨씬 더 냉전의 외곽 변경 지역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석유가 많이 생산되는 나라이기도 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이란 중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봉우리가 눈으로 덮인 산들의 산등성이 아래 평원에 자리해 있다. 따라서 테헤란의 경우 페르시아 만 보다 카스피해가 더 가까이 있다. 수도 테헤란의 경우 1795년 카자르 왕조에 의해 수도로 결정됐다. 즉, 테헤란은 한국으로 치면 정조대왕 시기부터 수도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0년대에도 이란은 왕조가 통치했다.
독소전쟁이 한참이던 1941년 9월 영국과 소련은 레자 샤 팔레비 국왕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 이란을 침공해 강점한 뒤 레자 샤를 해외로 쫓아내고 당시 22살 밖에 안 된 아들 샤를 이란의 왕으로 앉혔다. 대다수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이, 이란은 원유가 풍부한 나라였다. 사실 미국은 1920년대부터 이란의 원유에 눈독을 들여왔고, 영향력을 확대했었다. 영국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브리티시 퍼트롤리엄(British Petroleum/PD)의 전신인 영국-이란 석유회사를 통해 레자 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은 이란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미국 회사들이 이란의 원유에 눈을 들였다면, 소련의 스탈린은 이란 북부지역의 유전을 개발하고자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은 이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두려워했다. 일단 이란의 국경은 소련으로부터 북쪽으로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물론 스탈린은 이란에 영국 및 미국에 허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원유 관련 이권을 달라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들어간 군대를 이란에 주둔시켰다. 반공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소련과 대결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칠은 1946년 3월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 소위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여, 소련을 자극했다. 이는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이란 석유회사 브리티시 퍼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은 수익의 84%를 차지하며, 이란인들에게는 기껏 16%만을 돌려주었다. 놀랍게도 관련 세금도 이란이 아닌 영국에 납부했으며, 실제로 이 화사가 본국에 납부한 세금이 이란의 로열티로 가져간 액수의 2배가 넘었다. 즉 영국이 이란 원유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대다수의 이란인들은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 유전 노동자들은 일당이 50센트도 안 되었으며, 다른 혜택이나 유급 휴가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말 그대로 그 당시 이란 노동자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착취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이란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1950년이었다. 이란에 진출한 미국 석유회사 아람코가 사우디 원유에서 얻는 수익의 50%를 주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랑 계약을 맺으면서였다. 당시 미국은 이란이 중동 원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기 때문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이란의 총리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는 영국 이란 석유회사의 석유 독점권을 박탈하고자 했다. 그 외에도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모사데크는 대다수의 이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이란 주대 미국 대사는 본국에 “모사데크는 이 나라 국민 95~98%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보고를 올렸을 정도였다. 그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란 민중은 이에 열광했던 것이다.
사실 모사데크와 영국 소유의 영국-이란 석유회사는 매우 냉담한 관계에 있었다. 모사데크는 이란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국가를 근대 세계로 편입시키려면 정부가 자국의 천연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모사데크는 이란 석유 산업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이란의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국이 자신들의 부의원천을 청산할 생각을 가질 리가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모사데크가 강경하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 했지만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1951년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모사데크는 영국-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사데크에 대한 이란인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모사데크는 국제적으로도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모사데크는 이란인들 중 최초로 유럽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비록 성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베르사유 회의에 참석해 영국의 이란 지배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수십 년간 이란에서 반식민주의 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모사데크를 1951년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정도였다.
모사데크가 반기를 들자 역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을 금지하고 이란으로 들어가는 물품을 막았다. 미국 용인하에 잉글랜드 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이란에 대한 대출 및 거래를 중단했으며, 이란의 경제는 점차 어려워졌다. 1951년 10월 윈스턴 처칠과 보수당은 선거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처칠은 이란에 대한 군사개입 압력을 높여갔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모사데크는 영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추방했다. 그 당시 보수당 출신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트루먼에게 보낸 서한에서 모사데크를 늙은 미치광이 머시더크(Mussy Duck)라고 조롱하며 그가 나라를 공산주의에 넘겨준다고 비난했다. 즉, 이와 같은 과정속에서 또 다른 나라가 이란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는 CIA를 통해 모사데크를 제거할 방안을 논의했다. 모사데크는 사회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좌파 조직인 이란 대중당(Tudeh party)와 관계가 좋았다. 따라서 미국의 아이젠 하워 행정부는 모사데크를 극단주의자로 봤으며, 막후에서는 CIA가 비밀공작에 들어갔다. CIA는 이른바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을 실행했다. 놀랍게도 이 작전의 지휘자는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커밋 루스벨트였다. 영국 정보부 MI6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 이란의 왕 샤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 미국의 이란 쿠데타 공작이 시작된 것을 안 모사데크는 샤가 쿠데타 음모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외로 추방했다.
1952년 5월 1일 모사데크는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발표했고, 이란인들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시도했다. 그러나 1953년부터 이란은 영국과 미국의 제재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란에서는 물가가 폭등하고 생필품 부족해졌다. 모사데크 총리가 대중당과의 연합을 추구하여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3년 미국에서는 공화당 후보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아이젠하워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장군으로 유명하지만, 그 또한 이란에서의 민주적인 정권을 교체시키는 데에 열정적이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모사데크가 대중당과 연합할 경우 이란이 공산화될 것이라 생각했으며, 중동 전체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일 것이라 본 것이다. 이는 아이젠하워 정부가 1954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시아와 아시아 전체가 공산주의화 된다고 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테헤란 정권을 전복할 쿠데타를 CIA 요원에게 맡겼다. 그 당시 CIA의 쿠데타를 지휘한 사람은 커밋 루스벨트(Kermit Roosevelt Jr.)였다. 커밋 루스벨트는 미국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의 손자였다. 그의 할아버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전형적인 미국 제국주의자였던 인물로 1898년 미서전쟁에서 흑인 부대에게 인종차별로 악명을 떨쳤던 인물이다. 또한, 재임 기간 동안 필리핀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최소 60~100만 명의 필리핀인들을 학살한 장본이기도 하다. 커밋 루스벨트의 할아버지는 우리 역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인물로 1905년 가츠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자신들의 필리핀 지배를 선택한 대신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할 수 있도록 했던 인물이다. 즉, 한국 역사에서도 전혀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놀랍게도 이런 미국 제국주의자의 손자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CIA에 복무하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 정부를 전복하는 계획에 착수했던 것이다. 루스벨트와 CIA 동료 관리들은 영국 정보기관과 협력해 정권이 반체제 인사들을 강력히 탄압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종교 및 반대파 지도자들을 겨냥한 허위 선전을 유포하고, 또 수도에서 반정부 시위를 선동함으로써 위기상황을 조성했다. 영국 정보당국이 이미 검토해 놓은 안을 토대로 CIA는 작전을 진행했다. 1953년 6월 25일 국무장관, 국방장관, CIA 국장 등이 모여 에이잭스 작전을 확정했고, 7월 1일 윈스턴 처칠 총리의 동의와 7월 11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최종승인을 얻어 즉각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 CIA의 공작은 치밀하고도 사악했다. CIA는 이란의 언론인, 종교인, 군경 간부, 국회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한 뒤, 이들을 통해 CIA의 지시에 따라 반정부 여론을 조장했다. 심지어 CIA는 ‘이슬람 전사들(Warriors of Islam)’의 폭력까지 돈을 주고 동원했다. CIA가 공작한 쿠데타 역사를 정리한 한 연구서에 따르면 이들은 극렬 테러리스트 깡패 집단이었다. 1953년 8월 루스벨트는 수도 테헤란에 폭도를 풀어 혼란 상태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우선적으로 모사데크가 공산주의자이며 유대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가 동원한 깡패들은 대중당 당원인 척하면서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이슬람 사원 한 곳을 파괴했다. 폭도들 중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모사비 호메이니(Ruhollah Khomeini)도 있었다. 나중에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그 호메이니다. 1953년 8월 19일 이란의 테헤란은 무정부 상태가 극에 달했다. 루스벨트는 파즈롤라 자헤이 장군을 CIA가 마련한 은신처에서 빼냈으며, 자헤디는 당시 이탈리아에 가 있던 샤가 자신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고 선언했다. 총격전 끝에 쿠데타 음모 세력은 모사데크를 포함한 모사데크 지지자 수천 명을 체포했고, 일부는 처형했다. 결국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됐다. 이후 샤는 테헤란으로 돌아왔으며, 커밋 루스벨트와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왕좌는 신과 나의 백성, 나의 군대 덕이오. 그리고 선생 덕이기도 합니다.”
이란의 지배자가 된 샤는 이후 25년간 이란을 통치했다. 샤의 통치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과 선거 조작이 있었으며, 1957년에는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의 반대파 탄압 책동이 있었다. 샤가 이란의 통치자가 되자, 미국은 이 부패한 동맹세력을 위해 돈을 풀었다. 미국 석유회사들은 이란 원유개발을 위한 컨소시엄 지분의 40%를 차지했다. 미국은 샤에게 금고도 열어줬다. 즉, 워싱턴과 런던은 이란의 석유 산업을 구조 조정하여 미국 회사 5개, 영국 회사 1개와 프랑스 회사 1개를 쪼개 나눠 주었다.
쿠데타 성공 2주 만에 미국은 샤에게 긴급원조 6,800만 달러를 제공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쿠데타를 통한 미국의 친미정부 건설 과정이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와 CIA는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지역에서 동맹자를 얻었다. 4반세기 동안 팔레비 샤는 중동에서 친미국가의 보루 역할을 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 사기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중동에서 미국의 쌍둥이 기둥 중 하나로 등장했다. 이 기둥들은 워싱턴이 폭넓은 지역 정책의 기반으로 삼기를 원했던 친서방적인 동맹국이었다.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같은 국가들이 소련으로 기울고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한 반면, 샤는 이 지역에서 미국의 힘을 뒷받침할 것으로 기대됐다. 샤가 사우디아라비아와 더불어 값싼 석유를 세계시장과 미국에 공급해주었으니 미국에게는 이용해먹기 좋은 나라였다. 미국은 독재정치를 유지하는 샤 정권에게 군사기술동 제공해줬다. 미국 정부는 샤 정권과 500억 달러로 추산되는 무기를 거래했고, 닉슨 정부와 포드 정부는 이 정권에게 F-14 및 F-16 전투기를 비롯한 최신식 군사 무기를 지원해줬다.
모사데크를 전복시킨 이후 앞서 언급했듯이 샤 정권은 사비크라는 비밀경찰 조직을 운영했다. 샤비크의 규모는 전국적으로 약 6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란 시민들은 사비크의 악랄한 고문 기술 때문에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수감자들이 일반적인 구타를 당하거나 담뱃불로 지져지거나 전기 고문을 받는 것은 이들이 한 고문 보고서에서 매우 시시한 보고 중 일부였다. 심지어 어떤 서방 언론인은 경찰 시설 안에서 수감자들의 손을 식품용 고기 슬라이서를 사용해 써는 기계를 발견했다. 심지어 이 언론인은 잘린 팔들도 발견했다.
이런 악랄한 경찰 조직을 훈련시킨건 미국이었다. 사비크를 운영한 장교들은 미국 CIA 본부에서 오리엔테이션까지 받았다. 사바크는 7,000여명이 넘는 전문 요원들이 있었고, 앞서 언급했듯이 알려지지 않은 시간제 정보원들까지 합치면 수만 명에 달한다. 이들의 고문은 세계 최악의 인권탄압 국가로 지목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결국, 이 친미 정부는 1978년 극단적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유지됐다. 1978년에 일어난 이슬람 혁명으로 1979년 팔레비 샤는 축출됐고, 앞서 언급한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호메이니는 극단적인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그와 동시에 반미주의를 표방했다.
그 결과 1979년 10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분노한 이란인들이 미대사관에 침입해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이들이 요구한건 미국으로 도망친 팔레비 샤를 이란으로 데려 오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풀려나지 않은 인질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석방되지 않자 인질구출 작전을 위한 군사작전을 승인했다. 그러나 그 작전은 헬리콥터 사고로 8명의 사망자만 내고 실패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과 이란의 적대적인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이 이런 비민주적이고 주권침탈적인 행위는 한국전쟁이 정전으로 끝나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정전으로 끝난 이후에 전개됐다. 미국이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켜주었다는 주장은 “한국전쟁 시기에 벌어졌던 미국의 이란 체제전복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