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 관련 내러티브에 대하여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1939년 9월 1일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폴란드를 침공한 날 히틀로는 제국 의회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리는 연설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독일 국민들은 전쟁 자체를 환호했지만, 폴란드 침공 당시에는 그런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당시 폴란드에는 40개 사단이 있었고, 독일은 52개 사단이 있었다. 52개 사단 중 6개 사단은 전차와 장갑차로 무장한 기갑병력이었다. 그에 반해 폴란드군은 구식이었다. 아직도 말을 타고 돌격하는 기병대가 있었고, 탱크나 장갑차는 숫자가 매우 부족했으며, 항공기들 또한 구식이었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전격전(BlitzKrieg)에 기반한 군사작전을 게시했고, 폴란드는 4주 만에 항복했다. 폴란드군 중 7만 명은 3척의 구축함과 2척의 잠수함을 이끌고 탈출하여 영국으로 갔고, 영국 런던에 폴란드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영토로 들어온 군대는 독일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쪽에서 독일군이 진격했지만,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진격했다. 지난번 시리즈 ‘5부’에서 다룬 것과 같이, 1939년 8월 23일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을 체결했고, 이 조항에 따라 소련은 동쪽에서 밀고 들어왔다. 사실 이 부분은 서구사회와 주류학계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이 동맹을 맺고 폴란드를 집어삼킨 것으로 화자 되고 있다. 특히나 폴란드 사회에선 이와 같은 역사 내러티브가 압도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폴란드에서 개봉한 영화 <카틴(Katyn)>을 보면, 소련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집어삼킨 동맹으로 묘사된다. 더 나아가 폴란드 정부와 사회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폴란드를 통치하고 싶어했던 야욕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러티브도 사실 문제가 많은 내러티브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소위 ‘소련의 폴란드 침공(?)’은 나치가 전쟁을 시작한 지 2주 뒤에 단행됐다. 소련군의 진군이 시작되자, 의외로 폴란드인들은 독일에 맞서 싸웠던 것에 비해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소련군은 총 737명이 사망했다. 실종자까지 포함하면 그 수치는 1,500명에서 3,000명이 되며, 부상자 또한 수천 명이었다. 반면 소련군을 연구한 미국의 군사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에 따르면, 그 당시 소련군 사상자는 전사자 996명 부상자 2,002명이라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독일군 사상자가 5만 명(그 중 16,000명이 전사)에서 7만 명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볼 때, 상대적으로 폴란드인들이 소련군에 크게 저항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A.J.P 테일러에 따르면, 폴란드군 20만 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 해서 소련에게 유리한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대표적인 사례가 카틴 숲 학살(Katyn Massacre)이다. 서방과 폴란드에 따르면, 1940년 소련의 NKVD(내무인민위원부)는 최소 수천 명에서 14,500명에 달하는 폴란드 장교와 사관생도, 그리고 부사관들이 스몰렌스크 지역에서 집단 처형당했다. 카틴 숲 학살의 경우 소련 정권 말기 고르바초프가 사실을 인정했고, 2010년대 초에 푸틴이 인정했지만,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이후 러시아의 입장은 다시 바뀌었다. 지난 2024년 4월 12일자 러시아 타스(TASS) 통신 기사를 보면, “나치가 카틴 숲 학살에 대해 소련이 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 키예프 정권이 부차 학살을 러시아가 저질렀다고 거짓으로 위장해내는 것과 매유 유사하다.”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러시아 측에 따르면, 러시아 연방정보국 스몰렌스크 지역 사무국이 기밀해제한 문서에는 “1943년 1월 독일 군대가 폴란드 병사와 장교들을 집단 총살한 다음 카틴 숲에 매장했다.”라고 나온다. 글쓴이가 보기에 카틴 숲 학살의 진상은 어느 한쪽이 했다고 단정 내리기 힘든 미스테리가 많다고 본다. 정권에 따라 입장이 지속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했다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검증과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주제를 다시 돌려 그 당시 소련군이 진군한 지역의 폴란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보자. 앞서 언급한 소련의 폴란드 진군의 경우 훗날 소련군 지휘관들에 따르면, “동부 폴란드의 소수 우크라이나계와 벨라루스계 주민들이 쌍수를 들고 소련군을 환영했다.”라고 한다. 소련의 폴란드 점령이 끝난 1939년 10월 하순 쯤, 점령지 일대에서 군중집회가 개최됐고, 그 군중집회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의 합병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이에 따라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가 소련 내에 있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라루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흡수됐다. 이것은 다른 얘기지만, 안타깝게도 몇 년 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편입된 폴란드 영토 일부의 경우 우크라이나 극우민족주의 집단인 UPA(우크라이나 봉기군)와 OUN(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에 의해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가 자행됐다. 무려 10만 명의 인명이 나치 성향의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소름이 끼치는 방식으로 학살당했다.
폴란드나 집단서방의 보편적인 역사의식과는 달리 그 당시 폴란드 동부인들은 소련군을 환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군사사학자인 데이비드 글랜츠는 저서 『독소전쟁사 – 붉은 군대는 어떻게 히틀러를 막았는가(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에서 “비록 폴란드군 지도부의 정서는 주민들과 다르기는 했지만, 적어도 일부 주민들은 독일의 지배보다 소련으로의 합병을 선호한 것이 확실했다.”라고 썼다. 그에 반해, “발트 3국 병합은 이런 복잡다단한 환영조차 받지 못했다.”라고도 서술했다. 쉴라 피츠패트릭에 따르면, 소련은 폴란드 동부지역을 점령한 뒤 곧바로 거주민들에게 자동으로 소련 시민권을 부여했고, 폴란드인 2,300만 명이 소련 인구로 흡수됐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부븐들을 보면, 소련으로 편입된 폴란드 동부 지역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이었고, 단순히 스탈린의 영토 야욕 제국의 야욕을 가지고 합병한 것이라는 내러티브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소련이 접수한 이 영토는 어떤 곳일까?
이 부분에 대해 알려면 레닌 시절 적백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점령한 폴란드 영토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서부 지역이다. 이 영토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스탈린에게 배당된 영토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영토는 소위 커즌선(Curzon Line)이 자리한 영토이기도 했다. 커즌선이란 1919년 파리 강회회의를 통해 결정된 라인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국경을 의미한다. 그러나 적백내전기 폴란드 정권이 당시 커즌선 밖에 있는 혁명 러시아 정부의 영토인 서벨라루스와 서우크라이나 지역을 침범 및 포위하여 먹으려 했고, 실제로 일부 편입시켜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일어났다. 즉, 인종적으로도 폴란드계가 아닌 커즌선 동쪽 지역으로 폴란드 군대가 진격했다. 2년간 전개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1921년 3월 리가 조약 체결로 마무리됐다. 리가 조약은 폴란드 동부 국경을 커즌선에서 대략 250km 넘게 동쪽으로 확장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3년 테헤란 회담과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커즌선을 기반으로 폴란드에 약근 유리하기 수정하여 폴란드와 소련의 국경선으로 정하는 데 동의했고, 1945년 8월 16일 소련과 폴란드 조약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양국의 국경은 1951년 상호 합의에 따라 추가 조정됐다. 일본의 역사학자 시바타 마사요시는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서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는 히틀러 독일이 동으로, 즉 소련을 향해 침략을 계속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폴란드는 유력한 동맹자를 사실상 갖지 못한 채 강력한 히틀러 독일의 공격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다. 그 사이 소련은 1920년에 부르주아지와 지주 지배하의 폴란드가 소비에트 정권으로부터 탈취한 서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벨라루스에 군대를 진주시켜, 이들 지역의 인민회의의 결의를 걸쳐 1940년 1월부터 이들 지역을 각기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시킨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소련이 1939년 폴란드 동부를 접수한 것은 지정학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에 따르면, 1930년대 모스크바에서는 폴란드에 살고 있는 비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들이 소련 내 동포들의 파괴활동을 위한 근거지로 이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실제로 1938년 나치 선전 요원과 스테판 반데라와 같은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의 재통일과 독립을 명분으로 언론 활동과 선전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보자면, 앞서 언급한 소련의 방어선을 보장하고 독일의 팽창을 경계하는 지정학적 근거뿐만 아니라 그 당시 소련이 가지고 있던 민족문제의 논리도 적용됐다.
그러나 그 어떠한 맥락을 보아도, 1939년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이 소련의 야욕적인 영토 팽창이라거나, 독재자 스탈린의 개인적인 정복 야욕 때문이라는 내러티브와는 전혀 무관한 것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면, 스탈린 정권의 폴란드 동부 영토 팽창은 히틀러와의 동맹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스탈린과 소련의 영토 야욕에 따른 것도 아니며, 접수한 영토의 사람들이 소련군에게 매우 적대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기에, 현재 서구와 폴란드 정부의 내러티브는 확실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런던에 세워진 폴란드 망명정부의 내러티브도 상당 부분 작동한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폴란드 망명정부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전까지, 침공을 당한 이후에도 소련에 대한 반공주의를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폴란드 망명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을 뒤통수 친 적이 있었다.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의 경우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군에게 포로로 붙잡하여 포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1941년 독소전쟁 개전 이후 소련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소련과 폴란드 망명정부가 체결한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에 따라 안데르스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폴란드군을 소련 내에서 창설했다. 폴란드군의 규모는 모스크바 공방전 이후인 1942년 2월 7만 명으로 증가했고, 최종적으로 11만 명으로 편성됐다. 그러나 안데르스는 자신의 군대가 동부전선에 배치되는 것을 반대하여 이란의 페르시아만을 거쳐 팔레스타인에서 재정비를 마친 뒤 폴란드 망명정부의 군대인 자유 폴란드군에 합류하여, 북아프리카 전투와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우게 됐다. 특히나 1944년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이들이 활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서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폴란드 분할 관련 내러티브는 상당히 편파적이고 왜곡된 내러티브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으 내러티브에서 벗어난 시각도 필요하다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