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유럽 전선에 행한 무차별 폭격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전쟁이었다. 많은 학자들이 추산하기를 이 전쟁으로 죽은 인명이 무려 7,00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 참혹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체는 명백히 독일이었다. 독일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집권한 이래로 독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실질적인 전쟁 준비에도 착수했었다. 1936년 나치 독일은 라인란트 합병했고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으며, 193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더 나아가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를 3주 만에 함락시킨 나치 독일은 1940년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서부로 진격하여 네덜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1941년에는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남유럽과 동유럽을 점령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독일은 최소 1941년에서 1942년까지 전선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1936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당시 히틀러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더불어 프랑코 정권을 지원했으며, 그 과정에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유명한 그림의 배경인 게르니카 폭격은 1937년 4월 26일에 발생했다.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1,654명의 민간인이 그날 사망했다. 사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들은 침략한 나라의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자주 했다. 1940년 추축국을 형성하게 될 독일·이탈리아·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혹은 이후에 전쟁범죄를 숱하게 자행했다.
많이 알려진 것과 같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1937년 난징에서 2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일제가 난징 대학살을 벌이기 2년 전에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1935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적잖은 에티오피아인을 죽였다. 에티오피아인 40만 명이 이 전쟁에서 죽었는데, 이 중 30만 명은 아사자였고 3만 5,000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그 당시 이탈리아는 무차별 폭격과 더불어 독가스 살포도 감행하여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했다. 즉, 앞서 언급한 게르니카 폭격은 이미 에티오피아에서도 일어난 셈이다.
세 나라 모두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경험이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게르니카 폭격과 에티오피아 침공에서 그렇게 했고, 일본의 경우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충칭을 공습하여 대략 11,000명의 중국 민간인을 학살했다. 독일의 경우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 인구 60만 명이 살던 스탈린그라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48시간 동안 최소 2만 5,000명에서 많게는 4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거기다 1940년에서 1941년 당시 독일은 영국을 무차별 폭격하며 5만 명의 영국 민간인이 사망했다.
물론 나치 독일의 경우 공습으로 죽인 타국 민간인 보다, 직접적인 학살로 죽인 민간인이 더 많았다. 유대인 600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대량 학살 당한 것과 그중 절대다수가 폴란드와 소련의 유대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소련 측 사망자 2,700만 명 중 1,70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은 나치 독일이 무자비하게 소련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거다. 이처럼 나치 독일은 무수히 많은 인명을 학살했다. 1944년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 2달 동안 나치 독일이 폴란드 민간인 최소 20만 명을 학살한 것과 1941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의 바비야르에서 2~3일 동안 3만 3,000명 이상의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을 OUN(우크라이나 극우민족주의자 기구) 지지자들과 함께 협조하여 학살한 사실은 나치 독일의 파시스트적 전쟁범죄가 얼마나 추악했는지를 입증해준다.
얘기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대한 내용을 많이 설명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얘기를 상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 글에선 서방 연합군의 전쟁범죄 그것도 미군이 주도한 무차별 공습으로 죽은 추축국 민간인과 그 대표적 사례인 드레스덴 공습을 보다 상세히 보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서방 연합국 무엇보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떻게 공습을 감행했고, 또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를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경우 군인 사망자가 40만 명이며, 이 중 28만 명은 유럽 전선, 12만 명은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했다. 민간인 사망자의 경우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일본군의 공습으로 사망하게 된 1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가장 강력한 힘을 보여준 부분은 바로 대량생산 체제였다. 1941년 7월부터 1945년 7월까지 미국에서 생산한 탱크는 총 86,338대, 항공기는 29만 7,000대 함정은 64,500척으로 군함과 운송선은 합쳐서 수천 척이 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당시 미국이 생산한 항공기의 숫자다. 이 숫자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를 통틀어 보자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은 총 32만 4,750대의 항공기를 생산했다. 이를 당시 연합국이나 추축국과 비교해보면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다. 당시 소련은 15만 7,261대를 생산했고, 영국은 13만 1,549대를 생산했다. 독일은 11만 9,371대고 일본은 76,320대였다. 즉, 미국은 독일보다 2.7배 일본보다 4.2배나 더 많은 항공기를 생산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미국이 상륙작전에 동원한 항공기가 12,000대나 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당시 미국의 항공기 동원력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전사자 수치와 항공기 생산 수치를 언급한 이유는 미국이 가장 적은 피해를 받으며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물론 이것이 미국의 군사력이 천하무적임을 얘기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다. 사실 미국은 대량생산에는 성공했지만, 지상군 부대가 강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지상군 병력은 독일과 맞붙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전쟁에서 지상군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 주체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군사력이 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당시 미국이 보유한 공군력에 있었다. 미국의 공군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는 미국이 독일을 어떻게 폭격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영미 연합군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여러 지역을 폭격했다. 여기에 동원된 폭탄의 양이 대략 150~200만 톤인데, 이러한 공습으로 독일은 말 그대로 파괴됐다. 1942년 3월 영국 공군은 파리 르노의 공장공습에 성공한 데 고무받아 3월 28일부터 29일까지 발트 해의 유서 깊은 한자 동맹 도시 뤼백에 공습을 가했다. 그리고 4월에는 발트 해의 또 다른 중세도시인 로스톡에 나흘 밤 연속으로 소이탄을 쏟아 붓는 공습에 다시 성공했으며, 5월에는 폭격기 1,000대를 동원하여 쾰른을 공습했다. 6월에는 에센과 브레멘에 공습을 가했으며, 1942년 8월에는 영국에 도착한 미 육군 제8항공군이 루앙에 있는 조차장을 공습해서 첫 공습임무를 수행했다.
미 공군과 영국공군은 주간과 야간에 독일 본토에 대한 폭격을 실행했다. 특히나 미군은 B-17 폭격기를 유럽전선에 많이 투입했으며, 그로 인한 군사적 효과는 극대화됐다. 1948년 8월 17일 미공군(제8항공군)은 독일 한복판에 있는 슈바인푸르트를 폭격했다. B-17 229대 가운데 36대가 격추되어 소모율이 16%였을 정도로 공군의 피해가 컸다. 주간공습이었던 것과 독일의 촘촘한 대공망이 이러한 피해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1943년 7월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를 폭격했다. 주간에는 미군이 야간에는 영국군이 몇일간 함부르크를 공습했고, 그 결과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는 함부르크 시민들이 사망했다. 시의 몇몇 구에서는 주민의 치명적 사상자 수가 30%를 넘어섰고, 여성사망자가 남성 사망자보다 40% 더 많았다.
미군과 영국국은 뷔르츠부르크에서 7,000명, 다름슈타트에서 6,000명, 하일브론에서 7,000명, 부퍼탈에서 7,000명, 베저에서 9,000명, 마그데부르크에서 12,000명의 민간인을 공습을 가해 사망하게 만들었다.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1943년부터 미군과 영국군의 공습을 받았다. 베를린에 대한 공습은 1943년 8월부터 1945년까지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미 공군과 영국 공군의 베를린 공습으로 최소 2만 명에서 많게는 5만 명의 독일 민간인이 희생됐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군의 공습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은 최소 30만 명에서 보통 60만 명으로 추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 당시 희생된 독일 민간인 수치를 100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을 통틀어 가장 참혹한 공습은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에서 일어났다. 미 공군은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대략 2일간 드레스덴을 무차별 폭격했다. 드레스덴은 동부 작센 주의 주도로 르네상스 이래의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문화도시였다. 이 곳을 미국과 영국의 항공기들이 무차별적으로 포격했다. 영국 공군에 따르면, 드레스덴 폭격으로 공업 건조물의 23%와 민가 의외의 일반 건조물의 56%가 중대한 피해를 받았다. 7만 8,000채의 가옥이 완전히 무너졌고, 최소 2만 7,000명이 주거를 잃었다. 총 3,900톤의 폭탄이 투하됐고 1,200대 이상의 항공기가 이 작전에 참여했으며, 그 당시 미 공군이 투하한 폭탄의 최소 40%는 소이탄이었다.
이에 따라 엄청난 희생자가 속출했다. 드레스덴 공습 이후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는 이 공습으로 20만 명의 독일 민간인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와 같은 괴벨스의 주장에 대해선 의도적으로 과장한 것이라는 반론도 많이 있다. 반면 미국의 반전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종합적으로 10만 명이 죽었다고 여러 저서에서 주장했다. 최소 추정치의 경우 2만 5,000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1989년 동독 시절 추가로 1만 구에 달하는 공습 사망자 시신이 발견되면서 이걸 추가하여 3만 5,000명으로 추산하기도 한다. 반면에 폭격의 역사를 연구한 일본의 역사학자 아라이 신이치는 사망자 추산치를 2만 5000명에서 4만 5,000명으로 잡았다.
숫자가 2만 명이든, 10만 명이든 혹은 20만 명이든 간에,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었다. 사실 드레스덴에는 제대로 된 대공 방어 시설이 전무했으며, 역사 유적이 보존된 도시였다. 즉, 그런 도시를 무차별 공습으로 서방 연합군이 파괴한 것이다. 폭격 현장에 펼쳐진 광경은 지옥도였다. 그 당시 드레스덴 공습을 직접 경험했던 시민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어보자.
“무서운 광경을 보았다. 불에 탄 어른이 어린아이 크기로 줄어들었다. 손발의 파편, 죽은 사람, 가족 전부가 불에 타 죽기도 했다. 불이 붙은 채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불에탄 자동차는 난민, 죽은 구호대원, 군인들로 가득했다. 아이,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니는 사람도 많았고 가는 곳마다 불, 불뿐이었다. 화염 폭풍의 열풍이 불타고 있는 사람들을 화염에 휩싸인 집으로 밀어 넣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했다.”
이어서 또 다른 목격담도 보도록 하자.
“내 앞에 아마도 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거기에 무시무시한 불꽆 비가 내리는데, 그 비가 땅에 닿으면 엄청난 불의 고리 같은 것들이 보인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뚫고 나가야 한다. 나는 또 다른 젖은 손수건을 입에 대고 거의 뚫고 나가다 넘어졌다. 그러고는 더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뜨겁다, 뜨거워! 내 손이 불처럼 타고 있다. 어두운 곳을 향해 비틀대며 나아갔다. 갑자기, 내 코앞에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격럴히 손짓을 한다. 그러고는 너무나도 무섭고 놀랍게도, 나는 그들이 하나씩 제플에 땅으로 넘어지는 것 같은 모습을 본다. 나는 그들이 총에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추정할 정신이 없었다. 이제 나는 그 불쌍한 사람들이 산소 부족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기절했고, 그런 뒤에 불에 타서 재로 변했다. 그때 나는 쓰러진 여자에 걸려 넘어진다. 그리고 그녀 옆에 누워, 그녀의 옷이 타서 없어지는 모습을 본다. 미칠 듯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다. 그 후로 나는 계속해서 하나의 간단한 문장을 되뇐다. 나는 불에타 죽고 싶지 않아. 절대, 절대로 불에 탈 수 없어. 나는 불에 타고 싶지 않아.(중략....) 내가 본 모습은 너무나 처참해서 그것을 묘사훌 수도 없다. 죽음, 죽음, 모든 곳에 죽음 뿐이었다. 어떤 시신은 숯처럼 완전히 새까맸다. 또 다른 시신들은 마치 잠들어 누워 있는 것처럼 전혀 손상되지 않기도 했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 아이들과 함께 전차 칸에 앉아 이제 막 졸음에 빠진 것 같은 여자들, 여러 여인네들, 여러 아가씨들, 여러 어린이들, 허리띠의 금속 버클로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군인들, 이들 중 대부분은 벌거벗은 시신이었다.”
이와 같은 증언들에서 드레스덴에 말 그대로 지옥도가 펼쳐졌음을 알 수 있다. 독일 드레스덴 공습 관련하여 또 다른 논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렇게 맹폭을 받을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사실 드레스덴의 경우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 군사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한국으로 치자면 경주와 같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드레스덴 공습 시기 주로 시내 주거지에 공습이 집중됐고, 놀랍게도 도시 변두리에 자리 잡은 독일군 비행장과 군수공장들은 전혀 공격을 받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듯, 공습 당시 연합군의 손실은 영국군 폭격기인 랭커스터 6기와 미군의 B-17 폭격기 1기로 총 7대에 그쳤다. 투입한 폭격기가 1,200대가 넘고, 780대 이상의 전투기가 투입되는 대 공습이었는데도 말이다.
따라서 이렇게 보자면, 영미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은 일방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이보다 더 참혹하고 끔찍한 폭격 학살은 1945년 3월 10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했다. 거기다 도쿄의 경우 건물들이 목재라 드레스덴 보다 건물에 불이 더 잘 붙었다. 이 공습에서도 무차별적으로 소이탄이 투하됐다. 이 당시 투하된 소이탄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반복적으로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사용됐다. 드레스덴 공습 8주 후 나치 독일은 항복했다. 이후 미국은 이와 같은 전쟁범죄에 대해 침묵하거나 합리화했다. 드레스덴 공습은 도쿄 대공습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방 연합국이 저지른 전쟁범죄라는 것이 내 생각임을 밝히며 글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