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정말로 5.18 학살에 책임이 있다!
5월이 오면 항상 마음이 무거워진다.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고 또 전공으로 선택한 나로서는 5월이 되면 항상 광주가 생각난다. 우리 역사에 있어 5월의 광주는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적잖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가 고초를 치르고 또 목숨을 잃었지만, 5월의 광주는 정말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역사에서 5월의 광주가 있었기에 민주화 전후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린 걸지도 모르겠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내란수괴 윤석열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대한민국과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윤석열의 내란은 새벽 시간 천하로 끝났고, 다행히도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윤석열의 명령을 받고 투입된 군인들도 시민들과 대처하는 것을 주저했었다. 이들은 44년 전과는 달리 시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글쓴이가 보기에 제2의 광주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계엄군으로 투입된 이들도 5.18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5월의 광주는 지난 비상계엄 사태 때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렸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광주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군인들이 대도시 광주 전역을 봉쇄했다. 그리고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광주 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투입했다. 전두환 일당들은 공수부대를 전방이나 적진에 침투시키지 않고, 이들을 충정부대라는 이름을 붙여 광주시민을 학살하게 했다. 투입된 공수부대 병력만 해도 최소 3,000명이 넘었다. 그 외에 광주를 봉쇄하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총 병력은 최소 2만 명이다. 여기에 탱크와 장갑차가 동원됐고, 심지어 민간인을 향해 헬기 기총사격도 있었다. 헬기 사격의 경우 40년 만에 진상이 규명됐다.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에 의한 무차별 총격난사가 있던 날, 광주 전일빌딩에서는 M-60 기관총으로 무장한 UH-1 헬기가 수백 발을 사격했다고 한다. 이처럼 말이 안되는 일이 벌어진 역사가 바로 1980년 5.18 광주학살이다.
이제 광주에서의 비극이 벌어진지 45년이나 지났다. 글쓴이는 이번 5월 광주를 들렸다. 사실 작년에도 광주를 들렸지만, 이번에는 정말 의식있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 가서 너무나도 의미있고 보람찼다. 5.18 광주는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에 대해 다시한번 돌아보게 만들었고, 이는 80년대 사회운동에서 반미주의가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광주는 미국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잔혹하고 폭력적인 학살자와 독재자를 지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있어 미국은 6.25 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도움을 준 인권의 나라이자 훌륭한 동맹국 내지는 친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5.18 광주를 겪으면서 이것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학생운동 내에서는 반미운동이 확산됐다. 1982년 광주와 부산의 미 문화원이 학생들의 방화로 공격을 당했고, 1985년 5월 23일 서울의 미국문화원 도서관이 학생 73명 전원이 체포될 때까지 3일 동안 점거됐다. 1986년 5월 20일에는 서울대학교 학생인 이동수가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자!”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이와 같은 80년대 대학생들의 노골적인 반미 시위는 박정희 시대 때는 민주화 운동 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그런 점에서 1980년 광주가 미국에 대한 신화를 깨는데 일조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반미시위를 하던 학생들은 전두환 신군부 독재정권과 미국이 가진 커낵션과 광주학살 당시 이들의 협력 및 협조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이들의 생각은 이후 발굴된 문서를 통해 합당한 부분이 있음이 결과적으로 드러났다. 아직도 광주에 대해 연구되어야할 부분들이 많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국이 신군부의 학살을 사실상 도운 주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간략하게 5.18 민주화 운동의 배경과 전개를 보고, 미국의 개입과 관여 그리고 책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집권했던 박정희가 자신의 수하였던 김재규에게 권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해 10월 한국에서는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부마항쟁이라 불린 이 투쟁은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계엄령과 위수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비롯한 군부대를 투입하면서 종료됐다. 이 시위의 양상을 보면 10월 18월 경남 마산에서는 무려 1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단순히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 그리고 노동자들이 가세했다. 부마항쟁 과정에서 총 1,563명이 연행되었고, 그중 학생 37명과 일반인 50명 등 87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중정부장 김재규와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은 1970년대 대립을 보이는 구도였는데, 부마항쟁에 대한 대응책을 놓고 그 갈등은 증폭됐다. 이 맥락 속에서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권총을 쐈다. 김재규가 거사 이후 미국으로부터 소식을 얘기했다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는 박정희 또한 미국에 의해 암살된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이 부분에 대해선 앞으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김재규에 따르면, 박정희의 최측근인 차지철이 다음과 같은 망언을 했다고 한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만약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상상하기 조차 무서운일을 꾸미려고 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 시기 정말로 캄보디아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났다. 1980년대 개봉한 영화 <킬링필드>의 장면은 비록 반공주의 성향이 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거짓은 아니었다. 물론 정말 차지철이 이 말을 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박정희가 직접 발포명령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10월 26일 김재규는 박정희의 심장에 독일제 권총인 발터 PPK를 발사했다. 그렇게 박정희는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총 18년 5개월 10일 동안 사실상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해 왔었다. 즉, 10.26 사건은 앞서 언급한 박정희 유신독재의 종말을 의미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이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직을 맡게 됐다. 이 시기 최규하 권한대행은 민주화의 열망을 식히기 위한 차원에서 1975년 베트남 전쟁 종전 이후 발포한 긴급조치를 해제했고, 유신체제에 항거하다 구속 수감되었던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79년 11월 24일 함석헌·윤보선·백기완 등을 포함한 인사들이 YWCA 건물에서 결혼식을 가장하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그것은 150명 이상의 경찰이 동원되어 참여했던 인사들이 체포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2주 뒤인 1979년 12월 12일 결국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12.12 쿠데타였다. 12.12 쿠데타의 성공으로 한국에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이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군사 독재체제가 건설됐다.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정권들을 용인한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Vijay Prashad)는 저서 『워싱턴 불렛(Washington Bullet)』에서 미국의 한국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1961년 한국의 첫 쿠데타는 냉전에서 한국을 동맹으로 남기려는 미국의 요구와 노동을 탄압하고 노동자 계급을 극도로 착취해 경제를 성장시키려는 한국 자본가 계급의 이해가 맞물려 발생했다. 이렇듯 매우 국지적인 쿠데타의 배경에는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아시아는 물론 유라시아까지 확대되는 것을 둘러싼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우려가 있었다.(중략....) 1980년 11월에 한국을 방문한 브레진스키는 한미 관계를 유럽과 페르시아만 지역의 상황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경원에게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은 더 이상 중동의 완충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1961년부터 1979년 10월 박정희가 자신의 수하였던 중앙정보부장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유지되었던 군사정권은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고, 이미 노동자계급과 학생들의 투쟁으로 광범위한 혁명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김경원은 바로 이 점을 브레진스키에게 말했다. 이러한 혁명의 가능성은 전두환 장군을 주축으로 하는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해결되었다. 쿠데타 후,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에 기반하고, 경찰과 국내 공안으로 제도화된 전두환의 광적인 반공주의는 활동가 수백 명의 체포와 고문으로 이어졌다. 김경원은 이런 덕분으로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23년 개봉하여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은 앞서 언급한 12.12 쿠데타의 과정을 매우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5.18 광주가 발생하게 되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12.12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 정권은 당연히 박정희 암살로 시작된 이른바 ‘서울의 봄’을 용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960년 이승만 독재 정권을 몰아낸 4.19 혁명으로 한국 사회는 잠시나마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이 대두할 토대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결국 장면 정권의 친미반공 정권의 토대와 박정희의 5.16으로 무너졌다. 마찬가지로 서울의 봄도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1980년 3월부터 각 대학에서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박정희 시절 긴급조치로 해직 또는 제적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학원으로 돌아옴에 따라 학원민주화를 외치는 교내 시위가 발생했다. 더 나아가 5월 2일 1만 명이 학생이 참가한 서울대 ‘민주화대총회’를 시발로 각 대학이 민주화대행진에 돌입했다. 1980년 서울의 봄 기간 대규모 시위는 이렇게 진행됐다. 이러한 시위는 5월 15일 전국 대학생의 계엄해제 요구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는 15일에 서울역 광장에 학생 10만, 시민 5만이 집결, 계엄철폐와 유신잔당 퇴진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러한 시위는 서울을 비롯한 각 도시의 대학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일원으로 변경할 것을 발표했다. 비상계엄이 확대되자,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들의 시위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전라도 광주만은 달랐다. 광주에서는 오히려 역으로 시위가 격해졌다. 비상계엄이 확대됨에 따라 계엄군이 전국적으로 배치됐다. 호남과 광주지역에도 전북 14개교와 전남 20개교에 계엄군이 배치됐다. 광주의 전남대학교 또한 계엄군이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완전히 장악했다.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날 오전 10시에 모인 학생들의 수는 대략 200명 정도였다. 학생들은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향해 돌격했고, 도망치던 이들 중 일부가 붙잡혀 공수부대의 곤봉에 무참하게 얻어맞았다. 이를 본 시민이 말리려고 하자,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 소식이 전해지자, 광주 시민 수천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그날 오후 3시 30분쯤 신군부 세력은 광주에 7여단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시위 진압에 나섰다. 공수부대는 진압봉, 개머리판, 군홧발로 시위하는 광주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들은 시위대를 잡는다는 이유로 가택수색은 물론이고, 나이를 불문하고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여학생과 주부 등 여자들에게조차 옷을 벗기고 구타했는데, 이런 시위 진압은 18일 저녁 늦도록 이어졌다.
다음날인 19일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이날 등장한 부대는 서울 동국대를 떠나 밤새 광주에 도착한 11여단 소속이었다. 장갑차까지 앞세워 출동한 그들은 지역대 단위로 시위대를 추적하여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공격하고, 일부 대원은 대검까지 사용했다. 이들은 다방, 여관, 민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며 걸리는 사람마다 구타하고 연행했다. 이날 오후에는 11여단과 7여단의 5개 대대 병력 모두가 투입됐다. 물론 공수부대의 잔인한 구타에 광주시민들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광주시민들은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하며 맞섰다. 이에 더 악을 쓰게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 뿐만 아니라 시내버스나 택시를 세워 운전기사까지 구타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때 시위대는 화염병, 벽돌, 각목 등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시위는 더더욱 확산됐다. 이때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학생 청년뿐 아니라 노인 부녀자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죽게 되는 경우가 벌어졌다.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M-16 소총에 대검을 착검한 채로 시민들을 향해 돌진했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자국 군인이 자국 민간인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무차별 폭력을 행했다.
20일 오후 시위대의 규모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데모는 민중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오후 7시에는 대형 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와 택시 200여 대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규모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광주에서의 시위양상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특히나 KBS나 MBC같은 매체는 마치 공산주의자나 폭도들이 일으킨 것처럼 사건을 왜곡해서 보도했다. 그 결과 20일 저녁 광주의 MBC와 KBS가 불탔다. 5월 21일 도청을 중심으로 30만 명이 모여들어 투쟁의 정점을 이뤘다. 당시 시위대가 대규모로 확산되니까, 공수부대가 물러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도 나왔었다. 그러나 정오가 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공수부대 병사들의 M-16 소총은 불을 뿜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조준 사격으로 광주 시민을 하나둘씩 쏴 죽였다. 이렇게 최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 학살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최소 50명을 넘겼다. 이걸 직접 목격하게 된 광주시민들은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공수부대에 무장으로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들 중에는 경찰서에 있는 무기고를 접수하여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해 계엄군에 저항했다. 이렇게 하여 시민군이 형성된 것이다. 시민군은 저항으로 21일 저녁 계엄군을 몰아내고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5월 22일 광주는 시민군이 잔인한 공수부대에 맞서는 해방구가 됐다. 시민군은 자체 조직을 정비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헌혈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했다. 시민군 측 차량들은 구호·연락·수송·보급·순찰·전투 등의 임무를 나눠 조직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은행이나 신용금고에서의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110년 전 지구 반대편에 있는 프랑스 파리에선 지배계급에 맞서 민중들이 파리 코뮌을 조직하여 싸웠다. 그리고 프랑스 진압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시민들이 무참히 학살당했다. 5월의 광주는 파리코뮌과도 너무나 유사했다. 민주화운동가 리영희 교수가 표현한 것처럼, 5.18 광주는 한국판 파리코뮌이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깊이 연구한 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는 『한국의 민중봉기(Asia's Unknown Uprisings Volume 1: South Korean Social Movements in the 20th Century)』에서 광주항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여러 해 동안 광주는 민주주의의 슬로건, 한국 민주화 투쟁의 주요한 상징이자 영감이었다. 한국 역사에서 광주는 프랑스 역사의 파리코뮌, 러시아 역사의 포템킨 전함에 비견될 만한 의미가 있었다. 파리코뮌처럼 광주 민중은 자발적으로 봉기했고 외부 열강의 사주로 토착 군부 세력이 무자비하게 진압할 때까지 스스로 통치했다. 그리고 전함 포템킨처럼, 광주의 민중은 1894년 농민전쟁,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80년 봉기에 이르기까지 되풀이해서 한국에 혁명의 도래를 알렸다. 냉전에 의한 분단에 상관없이, 남한과 북한은 모두 민중의 봉기를 찬양한다. 이런 의미에서 광주는 건설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북의 정치적 분단을 가로질러 단결의 지점을 제공한다.”
하지만 1871년 파리코뮌이 그랬듯이, 광주는 고립되어 갔다. 고립되어 가자 시민군 지도부 내부에선 총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5월 25일 저녁에는 정상용과 윤상원 등 광주의 재야 청년운동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항쟁 지도부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엄군에 맞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들은 시민군을 진압하고 싶어 했다. 5월 27일 새벽 1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결국 새벽 4시 55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전개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사망했고, 또 연행됐다. 나중에 이루어진 공식 통계에 따르면, 광주항쟁은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4명, 상이 후 사망자 95명, 부상자 3,310명, 구속 및 구인자 1,430명 등 총 5,063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또 다른 통계는 광주항쟁에서 사망한 민간인을 161명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5.18 사망자 수치는 이것보다 더 많이 추정한 수치들도 있다. 광주항쟁에서 살아남은 목격자들은 실제 사망자 수가 2,000명을 넘어섰다고 주장했다. 최대 추정치가 2,300명 정도다. 1980년대 중반 서방측 연구에서는 1,000~2,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이 때문인지, 현재(2025년 5월 24일 기준) 영문 위키백과의 광주항쟁 문서에는 사망자 수치를 600~2,000명으로 제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말 그대로 정신이상자 수준의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이는 극우논객으로 유명한 조갑제마저도 부정하는 음모론이다. 5.18에 대해 연구한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북한군 개입 증거가 전혀 확인되지 않다는 사실을 책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미국 관리들과 전두환은 자신들의 행동을 북한에 대한 대응으로 정당화했지만, 정부 내부 문서들은 광주봉기 동안 북한의 평화 위협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국 측 문서들은 1980년 봉기에 대해 북한을 비난하기 보다 전두환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전두환의 신군부 체제가 야기한 문제에 대해 훨씬 더 정확한 이해를 보여준다.”
따라서 북한군 개입설 음모론은 한국 극우들의 망상 및 헛소리 음모론에 불과하다. 극우들이 생각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달리, 실제 미국 문서는 미국 자신들이 전두환 군사정권을 지원하는 주체였음을 더욱 명확히 보여준다. 당연한 얘기지만 광주에서 대학살이 일어나던 시기 미국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을 인정했다. 따라서 5.18을 다루는 데 있어서 미국의 책임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우선 비자이 프라샤드의 얘기를 들어보자.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전두환 독재에 대항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전두환은 5월 18일 군대를 보내 시민에게 총을 발포, 수백에서 수천 명을 살해했다. 전두환은 북한이 선동한 공산주의 쿠데타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행동을 변호했다.(중략...)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5월에 워싱턴으로 보낸 서한에서 광주민주항쟁이 최소 15만 명이 참여한 내부 위협이라고 썼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주장을 통해 알 수 있는건 미국이 광주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이 5.18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게도 2005년 MBC에서 만든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드러난다. 제 5공화국에서 나온 대사를 그대로 옮긴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광주 미문화원으로부터 군인들이 착검한 소총을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미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고 하네요.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저도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진압이 무자비하다는 정보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광주사태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군대투입에 반대해서는 안됩니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만약 한국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군부를 반대하게 되면 일이 커지는데....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군부에 대한 저항이 생기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엄군이 사태를 진정시킬겁니다. 좀 더 지켜보도록 하죠.”
계속해서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을 보자.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가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것 같소.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전두환 장군은 23일 광주에 재진입하려는 것 같습니다. 워싱턴에서는 결정을 내렸습니까?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아직 논의 중이오. 오늘 내링 결정이 내려질 겁니다.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어차피 워싱턴에서는 전두환 장군을 지지하게 될 겁니다. 일이 벌어지기 전에 광주에 있는 미국인들을 서울로 피신시키는 게 좋지 않겠소?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난 먼저 조치를 취하겠소.”
MBC 드라마에서는 미국이 한국 내에서의 반미주의 확산을 의식했는지를 다음과 같은 대사를 통해 보여준다.
“브루스터(CIA 한국지부장): 대사께서는 광주 문제와 관련해서 공식적인 견해를 발표하셔야 겠습니다. 이번에 군 투입을 승인한 게 결과적으로 우리가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는 셈이 돼버렸습니다. 전두환에 대한 반감이 반미감정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려면, 광주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바란다는 발표를 해야합니다. 그러면 한국 국민들은 미국을 믿습니다.
글라이스틴(주한 미국대사): 알았소.”
해당 발언들은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이지만, 그 당시 미국이 어떻게 광주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MBC 드라마가 묘사한 것처럼 실제로 미국은 신군부의 군사 투입을 반대한 적이 전혀 없다. 바로 그렇기에 군사 작전권이 미국에게 있었음에도 전두환 정권이 광주항쟁 진압을 위해 신속히 군대틀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미국이 광주에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서가 있다. 바로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이다. 체로키 파일은 미국의 기자인 팀 셔록(Tim Shorrock)이 발굴해낸 5.18 광주 관련 문서다. 사족이지만 파일명인 체로키는 북미 대륙에 존재하는 미국 원주민 부족 중 하나며, 19세기 이른바 ‘눈물의 행로(The Trail of Tears)’라 하여 최소 4,000명이 집단으로 강제이주 중 학살당한 역사를 가졌다. 팀 셔록 기자가 획득한 미국 비밀해제 문서를 보면 미국이 광주를 어떻게 대했는지 나와 있다. 광주 전일빌딩 박물관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대한민국 5월 21일 전송된 이 보고서는 광주의 상황이 악화되었으며 서울의 한국군 장교들도 진상을 들은 바가 없다 라고 적고 있다. 보고서는 폭동이 나주 등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양측 사상자가 최소 500명으로 추정되며 사망자 숫자는 알 수 없음이라고 쓰고 있다. 또한 이 문서에는 군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나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에 발포를 허가 받았음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또한 이 보고서는 미국이 광주 폭동진압 임무를 위해 한국군 병력을 작전통제에서 해제하였기 때문에 극도로 강한 반미 감정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박물관은 팀 셔록이 획득한 5월 21일자 문서에 이런 내용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미군 국방정보국은 특전여단이 5월 21일 필요하다면 총을 쏴도 된다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5월 21일 오후 특전여단의 발포로 54명이 사망하고 시위대가 무장하자, 백악관에서 고위정책조정회의를 개최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공유했다.”
따라서 미국은 전두환 군사정권에게 무력을 사용할 수 있게 허가했다. 거기다 앞서 언급한 광주항쟁 당시 헬기의 기관총 사격은 미국이 지원한 무기로 이루어졌다. 한국군은 광주학살에 미국이 제공한 헬기 MD-500 디펜더와 UH-1 이로쿼이를 이용했다. 광주 이후에도 한국을 상대로 한 미군 무기 판매는 절대 꺾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미국은 한국에서 일어난 탄압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실제로 미국은 전두환 정권의 학살을 도왔다. 팀 셔록 기자가 5.18 학살에 대해 폭로하자,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an War)』의 저자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광주일지』라는 책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국은 최고위 정책 결정 과정에서 명백히 전두환과 그 일당을 지지하기로 했다. 광주에서 살해되거나 고문당한 젊은이들 수백 명의 피를 그들 손에 묻혔다는 것이 명확하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이런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실제로 미국의 지도부는 반공 독재 국가가 어떤 일을 저질러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옹호했다. 한국에서 소위 인권 대통령으로 알려진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은 워싱턴의 한 TV 방송국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맹방이나 우방 또는 무역대상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소련의 예속하에 내줄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미국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반공독재 국가들을 비호하고 지원했다. 다시 5.18 당시 미국의 책임에 대해 얘기해보자. 미국이 5.18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국내 기사들은 인터넷에 찾아보면 제법 있다. 이 글에서는 팀 셔록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언급하겠다. 2015년 오마이뉴스가 게재한 기사 “'5.18 비밀문서 폭로' 미국인 "수치스럽다"”라는 기사를 보면, 5.18 당시 미국의 개입을 조사한 팀 셔록의 입장이 분명하게 나온다. 아래는 기사 내용 중 일부다.
“이날 야당 국회의원들의 기자회견에 참석한 팀 셔록 역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 정부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셔록은 "1979~1980년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역할과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의무감을 미국 시민으로서 느꼈다"며, "제가 15년간 입수했던 정보에 따르면 1980년 5.17 계엄령 발령과 미국과 한국의 공동군사명령 체계 아래에 있었던 한국 군대를 동원한 결정에 미국 정부가 깊이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셔록은 1980년 5월 22일(미국 시간) 백악관에서 있었던 회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5월 21일 광주시민들은 계엄령으로부터 도시를 해방시켰다"라며 "그러나 미국 정부는 전두환이 7공수여단을 동원해 광주시민들에게 굉장한 폭력을 가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 군대가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에 맞도록 유지할 것을 결정했다"며 "저는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 정부가 한국의 민주주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군사정부의 편을 든 것에 대해 굉장한 수치심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따라서 미국은 팀 셔록 기자의 주장대로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벌인 학살을 지지 및 지원했다. 연구를 통해 미국이 사실상 5.18 학살의 주범인 것이 드러났고, 지금도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이는 미국 측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됐다. 성공회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정해구는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이라는 저서에서 “미국은 광주항쟁 당시 공개적으로는 자제와 대화를 통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광주항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신군부 세력의 진압작전을 지원”했고, “신군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라고 썼다. 정해구는 미국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미국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무자비한 진압에 나선 공수부대를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승인은 공수부대 투입으로도 진압되지 않았던 광주항쟁 진압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로부터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신군부의 광주 진압작전이 외부로부터, 즉 북한으로부터 위협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요건대, 광주항쟁 당시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보다 북한으로부터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고, 이를 위해 신군부를 지원했다.”
미국은 광주학살을 지원했지만, 그 당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이 민중을 학살한 전두환 편을 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국전쟁 이후 한국인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항상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공산주의의 야욕과 팽창으로부터 다른 나라를 지켜주는 고마운 나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의 나레이션도 그 당시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했고, 그것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레이션): 영원한 우방, 미국! 당시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의 나라 미국이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과 신군부를 지지하고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미국이 우리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결과적으로 광주를 통해 사실이 아님이 한국인들에게 드러났다. 1990년대 초에 나온 『한국 현대사 이야기주머니 3』을 보면, “해방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의 장벽 속에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우방이요 세계 민주주의의 선교사로 인식되어 왔던 미국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통하여 그 본질이 드러났다.” 광주학살을 지원한 것이 밝혀지면서 미국은 한국 민중이 우방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다. 5.18 이후 80년대 대학생들은 대미의식에 큰 변화를 겪었고 이것은 반미운동으로 나타났다. 물론 여전히 한국인들 대다수가 미국에 대해 크나큰 환상을 가지고 있다.
글쓴이가 작년에 읽은 저서 『물러나다(The Withdrawal: Iraq, Libya, Afghanistan, and the Fragility of U.S. Power)』는 미국의 저명한 학자인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와 앞서 언급한 인도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해당 책 한국어판 추천사를 한신대학교의 이해영 교수가 썼다. 이해영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왜 그토록 미국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언급했다. 이해영 교수는 한국인들이 미국이 자신들에게 저지른 짓을 모르기 때문에 미국을 사랑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대입해서 보자면, 5.18 역사문제도 이렇게 연결되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5.18에 대해선 알지만, 5.18 학살을 미국이 지원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거나 둔감하다. 따라서 이해영 교수의 해당 명언을 마지막으로 인용하면서, 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북한 사람들은 왜 저렇게 미국을 미워할까? 답은 간단하다. 미국이 그들에게 한 일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한 사람들은 왜 저렇게 미국을 사랑할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다. 미국이 자신들에게 한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