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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백내전기 미국의 개입

100년 전 러시아를 침략했던 미제국주의

by 김남기

인류 역사 최초로 단기간에 가장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 대규모 전쟁이 20세기 초에 일어났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I)은 1914년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대낮에 암살하면서 발발했다. 전쟁은 4년간 지속됐고, 1918년 11월 11일 마지막까지 버티던 독일 제국(제2제국)이 항복하면서 미·영·불 연합군이 승리했다. 전쟁 기간 4년 동안 최소 1,000만 명이 사망했고,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상해를 입은 이들은 2,000~3,000만 명이나 되었다. 전쟁에서 소모된 재원은 당시 달러로 대략 330억 달러로 천문학적인 수치에 이르렀다.

적백내전 당시 혁명 러시아가 상대한 국가들: 이렇게 보자면 러시아는 독소전쟁 이전 이미 제1차 대조국 전쟁을 치렀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보통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사상자는 사망자 1,000만 명, 부상자 2,000만 명이라 추산하는데, 단기간의 전쟁으로 이렇게나 많은 인명이 사망한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인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제1차 세계대전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매우 참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그것이 바로 적백내전(Russian Civil War)이다. 적백내전에 대해 알기 위해선 우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14년부터 전쟁을 치른 러시아는 초기 독일과의 전쟁에서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전투에서 적잖은 패전을 거듭했다. 1915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은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동부전선에서 유리한 전세를 잡았으며, 1914년에서 1917년까지 러시아군은 총 200만 명이 전사하고 또 다른 200~300만 명이 부상당했다. 총 500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한 것이다.

레닌 포스터: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립했다.

1917년에 시작된 2월 혁명은 로마노프 왕조(Romanov Empire)를 무너뜨렸고, 러시아는 점차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 쪽으로 가게 됐다. 2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소위 멘셰비키(Menshevik)와 케렌스키(Kerensky) 정권은 전쟁을 지속적으로 감행했고, 1917년 6월과 7월에 행한 갈리시아 공세로 2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전선에서 퇴각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7월 봉기가 일어났고, 그 이후 8월 말엔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멘셰비키 내각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 해 10월(보통 우리가 쓰는 양력으로는 11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주도한 10월 혁명(October Revolution)이 일어나 진정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Boshevik)가 주도한 10월 혁명은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탄생을 의미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건설한 레닌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을 외쳤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당시 사진.

1918년 3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려 했던 소비에트 정권은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Brest-Litovsk Treaty)의 체결은 러시아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목표한 사회평등을 실제로 이루고자 했고, 단기간에 일정 부분 이루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매우 단기간 동안에 볼셰비키 정권 하에서 진보적인 조치들이 단행됐다. 볼셰비키는 분명히 노동자와 빈농과 병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지주의 토지소유가 사라졌고,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국민이 러시아 시민이 됐다. 인종주의적인 법률도 폐지됐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했으며,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식량이 우선 지급됐고, 노동자 가족들은 음침한 지하실과 가건물에서 나와 자본가와 지주의 소유였던 좋은 집으로 몇 가족씩 합쳐 이주했다.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고 노동조건도 개선됐으며, 산업재해와 질병 · 실업에 대한 보험법도 발표됐다. 이에 따라 노동자 · 농민과 그 아이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산업을 국유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전이 한참이던 1919년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을 창설하여 세계 혁명 전파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거기다 러시아 혁명의 여파는 유럽과 아시아를 휩쓸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등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비록 궁극적으로 실패했지만 말이다. 아시아에서도 중국, 조선, 베트남 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볼셰비키는 국내적으로는 단기간에 앞서 언급한 진보적인 가치들을 실행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이와 관련된 초기적 틀을 마련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1917년에 성공한 러시아 혁명은 20세기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면에서 진보적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1918년 이른바 적백내전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지도로 정리한 적백내전: 적백내전은 여러모로 매우 복잡한 전쟁임을 이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적백내전은 매우 처참한 전쟁이었다. 무려 3년간 치열하게 전개된 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최소 700만 명에서 최대 1,200만 명으로 추산한다. 보통의 경우 1,000만 명으로 잡는 것이 더 현실적인 수치일 것이다. 이 중 400만 명 이상은 기근으로 죽었다.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과 기근 및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거의 비슷한 수치로 죽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즉, 그 맥락에서 글쓴이는 적백내전이 제1차 세계대전 못지않게 참혹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면 제1차 세계대전이 서유럽 사람들에게 항상 기억되는 반면, 적백내전은 철저히 잊혔다는 사실일 것이다.

1918년 핀란드에서 벌어진 백색테러 중 하나인 학살 사건: 사진 속 학살의 경우 핀란드 우익들이 400명의 러시아 적군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했다.

적백내전의 또 다른 특징을 뽑자면 테러에 대한 얘기도 할 수밖에 없다. 테러도 빈번히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볼셰비키와 차르주의자 양측 모두 테러를 전쟁 수단으로 사용했다. 테러의 규모 면에서 당연히 백군 반동세력이 훨씬 컸다. 대략 수십만 명이 백군 세력의 테러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볼셰비키의 경우도 적색테러를 저질렀다. 볼셰비키의 추산에 따라 보면, 1918년부터 1919년 전반까지 체카는 러시아의 20개 주에서 최소한 8,389명을 재판 없이 총살했고, 8만 7,000명을 체포했다. 볼셰비키의 적색테러로 처형된 사람은 전쟁을 통틀어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비록 볼셰비키 측 테러의 규모가 작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백군이 규모 및 잔혹성에서 압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시기 적백내전 중 일부였던 핀란드 내전의 경우 우익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여기서 우익들은 무려 5~10만 명의 핀란드인을 학살했다. 따라서 적색테러를 백색테러와 동급이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레닌은 “우리가 사보타주 행위자나 백위대를 총살할 준비가 안 됐다면, 도대체 그 혁명은 어떤 혁명인가?”라고 말했고, 적색테러라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사회혁명당의 경우 1918년 7월 6일 독일대사를 살해하고 반소비에트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심지어 1918년 8월 30일에는 레닌까지 암살 시도했다. 또한, 같은 날 사회혁명당의 저격병이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인 우리츠키를 암살했고, 또 다른 사회혁명당 당원은 레온 트로츠키를 암살하고자 했으며, 6월 20일 볼셰비키 선동가인 볼로다스키가 암살당했다. 1918년 9월 25일 사회혁명당 좌파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스크바 당 본부 폭파기도로 니콜라이 부하린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는 그 시기 백군세력이 저지른 백색테러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체카의 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합법적인 소비에트 정부에 대해 백위군들은 온갖 비겁한 술수를 부리고 있는데 우리는 단지 그들에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적백내전 당시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 이 군대는 이후 소련의 붉은 군대가 된다.

4년간 전개된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세력은 바로 볼셰비키였다.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는 붉은 군대(Red Army)를 만들었지만, 내전을 치르면서 그 규모가 확장됐다. 내전이 종결될 즈음에는 총인원이 500만 명이 넘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군의 시초였다. 대략 1920년이 되었을 때, 볼셰비키는 러시아 영토 전역에서 승기를 잡았고, 일부 반란들을 제외하면 내전은 1921년에 거의 끝나게 됐다. 다만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의 경우 소위 바스마치 운동이라 하여 1934년까지 싸운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제국주의 간섭 군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된 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러시아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으려 하자, 러시아를 침략했다. 이것이 바로 적백내전의 시작이었다. 적백내전에는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세르비아,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연합국 군대가 참전했다. 체코도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하게 되는 폴란드도 이 전쟁에 참전했으며, 북유럽 국가 핀란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간섭 군대의 규모도 작지 않았다. 앤토니 비버에 따르면, 러시아 북부에 주둔한 영국군은 1918년에서 1919년 기준 1만 8,400명이었다. 일본의 경우 총 7만 명의 병력을 블라디보스토크를 포함한 극동 시베리아 지역에 파병했으며, 최소 3,00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대통령이자, 이승만의 지도교수였던 윌슨은 1918년 인류 최초의 진보 혁명을 막기 위해 차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주의 군대를 러시아에 파병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연합국 군대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내정간섭을 통한 차리즘(Tsarism) 세력의 복권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군대들은 바로 혁명으로 축출당한 러시아 제국 반동 세력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 그 당시 대통령이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1918년 초까지만 해도 러시아 개입에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 국무장관인 로버트 랜싱(Robert Lansing)의 설득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꿨다. 사실 미국은 이 시기에 매우 반공주의적인 국가이기도 했다. 윌슨 정부는 국내 정치 개혁을 얘기하며, 신자유주의 개혁 방침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는데, 여기서 윌슨의 정치개혁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의 활동이나 유진 뎁스(Eugene Debs) 같은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을 의미했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혁명의 물결이 미국 내에서도 있을 것 같자, 소위 적색공포(Red Scare)를 정부가 조장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미국은 그런 나라였다. 따라서 적백내전에 간섭군대를 파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미군.
블라디보스토크 오지를 행군하는 미군.

러시아 혁명 이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내에서 이른바 좌파 색출작업을 단행했는데, 그 결과 적잖은 좌파 운동가들이 감옥에 갔으며, 미국 내에서의 반공주의 정서가 극심해졌다. 우드로 윌슨 정부는 1918년 러시아에 미군을 보냈다. 말 그대로 혁명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침략군을 보낸 것이다. 윌슨 정부는 총 13,000명 정도의 미군을 러시아에 보냈다. 1918년 9월 러시아 북부에 있는 아르헨겔스크와 극동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미군 병력이 상륙했으며, 이들의 임무는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3,000명의 미군 병력 중 5,000명은 아르헨겔스크에 주둔했고, 나머지 8,000~8,500명은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러시아로 파견된 미군들 또한 전투를 치렀다. 미국 전쟁부 장관은 미국 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s) 사령관 윌리엄 시드니 그레이브스(William Sidney Graves) 소장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고 한다.


“발밑을 조심하게. 다이너마이트로 채운 달걀 위를 걷게 될 걸세. 건승을 비네.”

시베리아 파병 미군 관련 스탬프 포스터.

그 당시 윌슨 대통령이 직접 작성한 비망록에 따르면 그레이브스가 받은 지령은 “러시아에서 체코 군단이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돕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무르만스크에 비축된 10억 달러 정도의 미국 군사장비를 보호하고, 소위 민주적인 러시아인들이 새 정부를 조직하는 것을 돕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진보적인 볼셰비키 정권을 노골적으로 전복하기 위한 행동을 미국이 한 셈이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되었음에도 미국은 여전히 적백내전에 참전했고, 간섭군들은 비록 소규모지만 전투를 치렀다.

아르한겔스크에 파병되었던 미군.

그 이전에 우선 어떠한 미군들이 갔는지도 얘기하겠다.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상륙한 미군 부대는 시베리아에서 경이로운 경험을 했다. 그 당시 간섭군으로 참전한 윌리엄 S. 배럿(William S. Barrett) 대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000km 떨어진 하바롭스크의 얼어붙은 툰드라지대에서 부대를 지휘했다고 한다. 영하 30도 추위에서 그들은 털모자와 양가죽 코트, 장갑에 감사했다. 그만큼 추운 곳에서 근무했다는 얘기다. 아르헨겔스크에 배치된 미군 대다수는 흥미롭게도 겨울 날씨에 잘 버티는 미시간 출신의 병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미시간(Michigan) 주는 미국의 유명한 도시 디트로이트(Detroit)가 있는 곳으로 캐나다의 유명한 도시 토론토(Toronto)하고도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겨울에 제대로 대비가 안된 군대가 장진호에 투입되었다가 중공군에게 패배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것 같다.

아르한겔스크 위치: 그 당시 미군이 얼마나 오지인 곳에 침략 군대를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미군 지휘관들은 이들이 아르헨겔스크의 추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배치되기 전 영국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당시 이들이 받았던 훈련 중에는 영하 기온에서 버티는 방법도 있었으며, 이걸 교육한 사람은 남극을 탐험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탐험가 에르네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시베리아의 경우 대략 300명 이상의 미군 철도 기술단이 1918년 초에 왔다. 이들의 임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재편해 독일과 전쟁 중인 러시아군에 지속적으로 보급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내전을 지속하기 위해 이들이 이용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미군의 경우 러시아 여성들을 상대로 매춘을 즐겼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 당시 한 보도를 보자.


“반쯤 헐벗은 술에 취한 여성들과 미국 신사들이 창문을 열고 전구가 타오르는 가운데 마음껏 즐기며 난잡하게 놀고 있었다.”

적백내전 당시 미국에서 만든 포스터: 자신들의 내정간섭 행위를 이렇게 미화하고 있다.

그리고 민간인 아녀자에 대한 강간이나 약탈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백군 측 러시아군 장교 한 명이 “미군 부사관이 러시아 여성에게 못된 짓을 한다”라고 말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질 뻔한 사건도 있었다. 그 장교는 권총을 들고 미군 병사를 위협하며 “코사크는 아내와 딸의 강간자를 친구로 대할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미군 부사관도 콜트 권총을 꺼내 그와 대치하기도 했다. 2019년 스미소니언 매거진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시베리아에 주둔 중이던 콜차크 제독의 백군들은 점령한 지역에서 백색테러를 했다고 한다. 대량 처형이나 고문 등이 대표적이었으며, 기사에 따르면 “코사크 장군 출신인 그리고리 세메뇨프(Grigori Semenov)나 이반 칼미노프(Ivan Kalmikov)가 지휘하는 백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비호하에 점령한 지역과 마을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일각에서는 당시 미군들이 백군 세력을 도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주민들을 학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간섭군으로 온 미국 제국주의 군대가 약탈·강간·전쟁범죄를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

볼셰비키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은 미군.

이제 전투 부분에 대해 알아보겠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헨겔스크에 파병된 미군들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전투를 치렀다. 아르헨겔스크의 미군은 전투에 엄청 적극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선 아르헨겔스크의 경우 미군 병사들이 군생활을 하기에 매우 힘든 지역이었다. 이들 중 하나였던 헨켈맨과 3명의 병사는 연대장에게 최후통첩을 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919년 3월 15일까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러시아 적군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둔다.”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는 1919년 1월에 아르헨겔스크에 있는 미군을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게시했다. 7일간의 공세 기간 동안 미군 병력은 8 대 1이라는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고, 이 미군들은 바가 강을 포함하여 지키고 있던 여러 곳에서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의 점진적인 공세는 5월에도 지속됐고, 미군은 1919년 6월 15일 아르헨겔스크에서 철수를 마쳤다. 아르헨겔스크에서 9개월간 주둔했던 미군은 총 235명이 전사했다.

2008년 러시아 영화 제독의 여인에서 나온 장면: 깃발들을 보면 알겠지만 선명하게 미국 국기인 성조기도 보인다.

블라디보스토크 및 극동지역에 있던 미군들도 아르헨겔스크의 미군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앤토니 비버에 따르면, 미군 장교 대부분은 이 지역에 더 머무르거나 격렬하게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다고 봤다. 그 이유는 바로 러시아가 볼셰비키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로마놉카에서 미군은 전투 의지를 보였었다고 한다. 로마놉카에서 새벽이 밝기 직전 미군 부대의 텐트가 볼셰비키 군대에게 기습을 당했는데, 여기서 미군 19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 결과적으로 1920년 1월 우드로 윌슨 정부가 시베리아에서의 철군을 결정하면서 미군은 시베리아에서 철수했는데, 철수 시점까지 총 189명이 전사했다. 그 당시 미군들이 어떻게 자신들이 참전한 전쟁에 대해 낙담했는지 한번 보자.


“콜차크 군의 기강은 해이하고 병사들은 너무 어리다. 사실, 그냥 소년들이다. 그들은 소총, 제복, 검은 빵 한쪽과 소금을 받고 전선에 파견된다. 하지만 미국 병사들은 모두 이 전투가 사나이들의 싸움이 아니어서 피하려 한다.”

영화 킹콩의 감독 메리언 쿠퍼: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군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한 그는 적백내전의 일부인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비행기 조종사 자원병으로 참전하여 전투를 치렀다.

그 외에도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전한 미군 중에는 세계적인 영화감독도 있다. 바로 1933년에 개봉한 전설적인 영화 ‘킹콩(King Kong)’을 만든 감독 메리언 콜드웰 쿠퍼(Merian Caldwell Cooper)였다. 쿠퍼는 앞서 언급한 극동 시베리아나 아르헨겔스크가 아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2년간 전개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폴란드군을 이끈 장군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는 폴란드군 창설과 더불어 공군도 창설했다. 공군 창설 당시, 폴란드군은 외국에서 자원병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받아들였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이후 킹콩을 제작하게 될 영화감독 메리언 콜드웰 쿠퍼였던 것이다. 물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경우 현재 반공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폴란드가 볼셰비즘을 비난하며 애국심을 부추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역사적 소재다. 아무튼 미국 영화감독 중에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1929년 12월 5일 아르헨겔스크에 파병한 미군 병사들의 장례식: 해당 전사자들은 미국과 소련 양국의 협의를 통해 1929년이 되어서야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적백내전의 경우 분명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볼셰비키는 궁극적으로 승리했고, 결국 폐허가 된 혁명 러시아 즉 소련을 재건해야 했다. 지난 2025년 1월 미국 폭스 뉴스의 아나운서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은 진보성향의 영화감독 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역사학자 피터 커즈닉(Peter Kuznick)을 인터뷰했다. 이 인터뷰에서 올리버 스톤은 현재 서구가 가지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내러티브를 철저히 비판했고, 해당 비판은 터커 칼슨도 깊게 공감했다. 방송 중 올리버 스톤은 “미국의 러시아 개입 역사는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라고 언급했다. 즉, 올리버 스톤은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미국의 반러주의와 루소포비아를 1918년부터 거슬러 올라가 분석한 것이다.

아르헨겔스크에 있던 미군 전사자의 묘.

앞서 강조했듯이, 적백내전으로 무려 1,000만 명의 러시아인이 사망했다. 전쟁의 책임은 구황실을 복권하려는 차르주의자들을 지원한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우익 반동 세력들에게 있었다. 왜냐하면, 볼셰비키들의 당시 슬로건은 즉각적인 전쟁 중단 및 평화 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침략하고 내정간섭하자 볼셰비키는 총을 들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고, 궁극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미국은 인류 최초의 진보적인 흐름을 방해하기 위해, 그리고 구 황실을 복권하기 위해 제국주의 국가로서 침략 군대 13,000명을 러시아에 파병했다. 적백내전기 미군 전사자 숫자는 344명에서 424명 정도로 추정되며, 부상자도 최소 3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볼셰비키가 전쟁과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적백내전기 미군의 파병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말 그대로 미국은 볼셰비키에게 패배했다.

앤토니 비버가 쓴 저서: 원서는 2022년에 나왔다. 적백내전의 전투 과정을 알기에는 유용한 책이다. 그러나 저자 특유의 친서방 반공 시각은 많이 걸러 읽어야 한다.

절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러시아를 침략했던 사실을 전혀 모르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못지않게 참혹했음에도, 서양 사람들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이 역사는 집단 서방의 역사인식 그리고 미국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처참하고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인지를 보여주는 한 예시가 아닐까 의심해 보며 긴 글을 마친다.


참고문헌


단행본


노경덕, 『사료로 읽는 서양사 5 – 현대편 제국주의에서 세계화까지』, 책과함께, 2022.

리처드 아피냐네시 글, 오스카 자레트 그림, 이동민 옮김, 『만화로 보는 레닌』, 책벌레, 2001.

쉴라 피츠패트릭, 고광열 옮김, 『러시아 혁명 1917-1938』, 사계절, 2017.

R.B 에스프레이, 편집부 옮김, 『세계게릴라전사 1』, 일월서각, 1993.

앤토니 비버 지음, 이혜진 옮김, 『러시아 내전 – 혁명 그 이후 1917-1921』, 눌와, 2024.

이무열, 『러시아 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09.

Bailey Stone, “The Anatomy of Revolution Revisited: A Comparative Analysis of England, France, and Russ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기사


마이클 M.필립,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미군들”, 르몽드, 2021.07.30.

Blake Stilwell, “The United States' Invasion of Russia Was a Yearlong Freezing Hell for the Troops”, Military.com, 2022.06.28.

Erick Trickey, “The Forgotten Story of the American Troops Who Got Caught Up in the Russian Civil War - Even after the armistice was signed ending World War I, the doughboys clashed with Russian forces 100 years ago”, Smithsonian Magazine, 2019.02.12.


인터넷 사이트

https://en.wikipedia.org/wiki/Allied_intervention_in_the_Russian_Civil_War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650&code=kc_age_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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