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영화 ‘킬링필드’를 기억할 것이다. 영화는 미국 뉴욕타임스의 특파원 시드니 쉰버그가 베트남 전쟁 전후로 캄보디아에 가서 취재를 하다가 자신을 돕던 캄보디아인 동료 디스 프란을 그리워하며 찾는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폴포트 치하의 캄보디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프란이 발견한 것은 시체로 산을 이룬 학살 현장이었는데, 실로 섬뜩하기까지 하다.
캄보디아 침공 경로를 설명하고 있는 닉슨 대통령 1980년대 당시 전두환 정권은 “봐라 북괴 공산당이 남한을 점령하면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를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를 대대적으로 전국에 상영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나온 장면 중 전혀 모르는 사실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캄보디아에 행한 무차별 폭격이다.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어마어마한 인명이 희생됐으며, 캄보디아의 국토는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그렇지만, 폴포트의 학살에만 집착한 나머지 정작 미국이 벌인 킬링필드에는 집중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프랑스가 싸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게 됐다. 그러나 독립을 얻기가 무섭게 1960년대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 전쟁은 캄보디아를 다시 한번 전쟁터로 만들었다. 당시 미국은 부패한 왕인 노로돔 시아누크를 내세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시아누크는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중립노선을 추구했다. 그래서인지 캄보디아 내의 좌파 세력을 탄압하는 한편, 1960년대 초 베트콩의 보급루트인 호찌민 루트를 암묵적으로 허용했다. 따라서 캄보디아에는 간혹 베트콩들이 주둔 및 활동을 하기도 했었다.
캄보디아를 폭격하는 미군의 B-52 폭격기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1965년부터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는데, 폭격의 대상에는 캄보디아 국경지대도 포함됐다. 그리고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군대 또한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국경을 빈번히 침범하기도 했으며, 대표적으로 1967년 2월 24일 미군·남베트남군·한국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부대가 캄보디아 영토를 침입해서 크락 크란의 크메르족 마을에 집중 포격을 가해 마을을 지워버린 적도 있다. 또한 1969년 4월 캄보디아의 고무농장이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따라서 1970년 월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공식 백서를 통해 사진과 날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세부 사항들을 덧붙여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수천 건의 사건들을 공개했으며, 미국과 사이공의 폭격이나 지상 공격 이후에 베트콩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심지어 미군의 대규모 병력 개입 이전 남베트남 정부가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한 사건도 있었다. 1964년 5월 25일 뉴욕타임스의 통신원이었던 맥스 프랭클은 남베트남군이 장갑차와 폭격기로 캄보디아의 찬트리아 마을을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사상자가 속출했다고 보도했다.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에 따르면, 캄보디아 국경의 거점과 마을들에 대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침공은 1960년대 초반 이후 더욱 극심해졌고, 한 해에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캄보디아의 마을을 공격한 남베트남군은 미군 고문단의 지휘를 받았다. 이런 사실을 보았을 때,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폭탄을 투하하는 B-52 폭격기 미국의 악명 높은 캄보디아 무차별 폭격은 1969년 초에 시작됐다.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구정 대공세로 베트남 전쟁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구정 대공세는 미국 내의 반전운동을 격화시켰고, 이 시점부터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여론은 아주 급격히 악화됐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통령이던 닉슨은 이른바 단계적 철수를 지향하는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했는데, 다른 한 편 미국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1969년 3월부터 미국은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맹폭격을 퍼부었다. 3월 28일 당시 캄보디아의 대통령이던 노로돔 시아누크는 “미군의 폭격으로 무장하지 않은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되고 있다”라고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다.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 루트와 지도 1970년 미국은 캄보디아 침공과 더불어 점차 반미성향이 생기는 시아누크를 축출하고 친미 군벌인 론 놀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친미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다. 당시 닉슨이 캄보디아 침공으로 내세웠던 명분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의 군사작전은 캄보디아의 민간인 희생자만 늘렸을 뿐이었다. 1970년 3월 29일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침공을 보도한 언론은 남베트남군의 군사작전이 보여준 극도의 잔인성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물론 민간인 사망자 대부분은 마을과 도시를 파괴하거나 심각한 피해를 입힌 폭격 등 미군의 공군력에 의해 발생했다. 2018년 미국에서 개봉한 영화 바이스(Vice)는 부시 정권 시절 부통령을 지내며 이라크 침공을 단행한 딕 체니(Dick Cheney)의 일생을 다뤘다. 이후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이 되는 도널드 럼즈펠드는 딕 체니에게 영화상에서 캄보디아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도널드 럼즈펠드: 체니 저 문 보여?
딕 체니: 키신저 장관 방인가요?
도널드 럼즈펠드: 그래. 지금 저 방에는 닉슨이 있어. 왜 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이 방에서 만날까?
딕 체니: 기록에 남기기 싫은 대화라서?
도널드 럼즈펠드: 그렇지
딕 체니: 무슨 내용일까요?
도널드 럼즈펠드: 캄보디아를 폭격하게 될꺼야.
딕 체니: 그건 불가능해요. 의회 승인이 필요한데 들어본 적도 없어요.
도널드 럼즈펠드: 의회는 개뿔! 밖에서 볼 때나 대단한 기관이지. 안에서 보면 별거 아니야.
딕 체니: 그래도 대선 때 종전 공약을.....
도널드 럼즈펠드: 잘 들어. 지금 닉슨과 키신저가 저 문 너머에서 하는 대화 때문에 며칠 후 지구 반대쪽에서 B-52 폭격기들이 폭탄 340kg을 캄보디아 전역에 투하할 거야. 수천 명이 죽을 거고,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달라지겠지.
미국의 국가안보보자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는 1969년과 1970년 사이에 있었던 최소 3,875회 이상의 폭격을 매회 승인했다. 이것이 바로 메뉴작전(Operation Menu)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쓴 캐나다 기자인 마이클 매클리어는 메뉴작전에 대해 닉슨이 철저한 보안 유지를 명령했고, 전략공군사령부도 출격 직전까지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었다고 책에 썼다. 주월미군총사령관이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도 처음에는 B-52 폭격기가 60회 출격하는 것으로 계획했다가 이후 계획을 수정했으며, 메뉴작전은 14개월간 지속됐다. 당연히 이 작전의 핵심은 전선이 캄보디아로 보다 확장되었다는 데에 있었다. 마이클 매클리어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폭격은 14개월 동안 3,650회를 출격한 B-52가 맡았다. 쏟아부은 폭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일본전에서 사용한 양의 4배가 넘는 규모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일부분으로서 4년 후에야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메뉴 작전이 막 시작되었을 때 닉슨 대통령이 캄보디아에 대한 B-52 폭격기의 공습 요청을 받았다는 신문 보도는 일반 대중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지만, 백악관에서 직원들과 언론인들이 송신했던 전문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첫번째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B-52 폭격기를 동원한 미군의 폭격은 캄보디아 전역을 초토화시켰다. 심지어 1971년 말 회계감사원의 조사단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 “난민과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킨 매우 중요한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난민의 수를 인구 700만 명 중 약 1/3로 추정했다. 심지어 미국 정보기관은 “마을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중폭격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보고했다. 폭격은 1973년 8월 15일까지, B-52 폭격기가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의 양은 무려 54만 톤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 본토에 투하한 폭탄의 양이 16~20만 톤으로 이것보다 몇배는 많은 폭탄이 캄보디아에 투하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사용한 폭탄의 양이 네이팜탄 3만 톤을 합쳐 50~60만 톤 정도 된다. 즉, 미국의 B-52 폭격기가 캄보디아에 투하한 폭탄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북한에 투하한 폭탄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1975년까지 캄보디아에 투하된 폭탄의 양이 200만 톤을 넘는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을 살펴보면 폭탄이 투하된 것들 대다수가 민간 지역이었다. 1973년 6월 19일 캄보디아 폭격 명령을 거부한 죄로 법정에 선 B-52 부조종사 도널드 도슨 대위는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지만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라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미공군은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공습경보도 내리지 않으면서, 병원, 탁아소, 학교, 농장과 같은 시민 생존의 필수 대상을 폭격했다. 그것도 무차별적으로 폭격했고, 보이는 표적이 그것 밖에 없었으며 네이팜탄을 비롯한 국제법적으로 금지한 폭탄들도 마음껏 사용했다.
1973년 6월에서 8월 미국의 닉슨 정부는 지속적으로 공습을 가했다. 6월 한달 동안 무려 5.064차례의 항공기 출격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 달인 7월에는 5,818차례로 증가했고, 8월에는 전반기만 하더라도 3,072차례의 공습이 있었다. 6월 말부터 8월초까지 45일 동안 출격횟수가 21%나 증가했을 정도였다. 앞서 언급한 B-52 폭격기가 투하한 54만 톤의 폭탄 중 절반 가량인 25만 톤의 폭탄은 1973년 2월부터 8월사이에 투하됐다. 미국의 참전이 끝나가던 1973년에 미국이 이렇게나 많은 폭탄을 캄보디아에 투하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생긴 크레이터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캄보디아의 마을: 미군이 폭격으로 파괴한 캄보디아의 마을에는 민간인들이 있었다.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으로 무수히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벤 키어넌 같은 친미 반공 인사들은 폭격 희생자 숫자를 15만이나 30만 아래로 축소한 수치를 내놓지만, 당시 핀란드 조사보고서는 60만 명으로 추정했다. 핀란드 조사위원회의는 미군 폭격으로 인한 사망자가 60만 명이고, 대략 2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발생했다고 추정했는데,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700~800만 정도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수많은 캄보디아인이 미군 폭격으로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대략 40만 명에서 8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되었다는 추정치가 있으며, 올리버 스톤의 경우 50만 명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학살당했다고 책에서 언급했다.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다뤘던 폴포트의 킬링필드: 물론 폴포트의 킬링필드는 분명한 대학살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미군 폭격에 의한 킬링필드가 있었다는 사실도 역사적 팩트다. 서울대학교 한국현대사 교수인 박태균의 경우 저서 <베트남 전쟁>에서 8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언급했으며, 미군 폭격으로 인한 캄보디아 민간인 희생자를 100만 명으로 잡는 통계도 있다. 원광대 전 교수이자 프레시안 기자인 이병한의 경우 폴포트의 학살이 더 많이 죽였는지, 미군의 폭격 어느 쪽이 더 많은 민간인을 죽였는지 확답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미군의 폭격이 무수히 많은 캄보디아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2015년 프레시안 기사인 “킬링필드의 진실, 그 때 미군 폭격이 있었다”에서 언급했다. 1975년 크메르 루주가 승리한 뒤 프놈펜에서 탈출한 서방 통신원들의 경우 잠시나마 농촌 지역의 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이 확인한 B-52 폭격으로 파괴된 캄보디아는 참혹했다. 영국 기자인 존 스웨인(Jon Swain)은 자신이 본 광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여기서 미국이 해답을 제시해야 할 사항은 대규모 인명 살상과 물질적인 파괴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 이 나라를 움직이는, 마치 캄보디아인이 아닌 것 같은 암흑 속의 사람들의 강직성과 추악성, 혹은 이 나라에 남겨진 것들은 마르크스와 마오쩌둥의 산물인 것만큼 그들의 마음을 연마하고 단련시킨 총체적인 미군 폭격의 산물이기도 하다. 대규모 도시 탈출은 고의적인 테러 작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빈약한 질서, 희망의 부재, 길고 야만적인 전쟁에 따른 사람들의 잔인성을 말해준다. 우리가 확인한 다른 지역처럼 이곳(농촌)의 피해는 엄청나다. 제대로 된 교각 하나, 집 한 채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줄곧 땅굴 안에서만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농촌 전체가 미국의 B-52 폭격으로 유린되었으며, 그 결과 도시와 마을 전체가 남김없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나는 멀쩡한 탑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아무튼 앞서 언급한 여러 추정치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캄보디아에서는 대략 5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학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폴포트의 집권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폴포트가 이끌던 크메르루주는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캄보디아에서 활동했는데, 크메르루주는 1969년 닉슨의 캄보디아 폭격과 침공으로 대다수 캄보디아 민중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반면에 미국이 지원한 론 놀 정권은 캄보디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즉, 미군 폭격으로 캄보디아의 수많은 마을이 파괴가 되자, 대다수 캄보디아 농민들은 말 그대로 크메르루주를 따랐고, 1975년 론놀 정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흥미롭게도 캄보디아가 베트남의 통일보다 2주 더 빨랐다. 따라서 폴포트가 집권하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이 정권을 이후 베트남에 맞서 지원한 주체도 미국이었다.
미군의 폭격을 받은 캄보디아 지역을 표기한 지도: 캄보디아에는 무려 수십만에서 200만 톤이 넘는 폭탄이 투하됐다. 폴포트가 자행한 학살과 인권유린 그리고 범죄가 너무나도 커서 그런지, 정작 미국이 자행한 제1차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사람들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폴포트와 더불어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공통적으로 책임이 있는 세력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자행한 제1차 킬링필드로 최소 30~100만 명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당했지만, 이걸 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킬링필드 1차 책임은 결국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