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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Sep 21. 2023

고양이의 서열 정리

아내와의 서열 싸움

 이런 변이 있나. 고양이 화장실에 모래로 덮이지 않은 변이 우뚝 솟아 있었다. 자기 존재를 치열하게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용의선상에 오른 두 녀석 중 범인은 다옹이일 확률이 높았다. 아내는 뒷마무리가 미흡한 다옹이의 앞발을 붙잡고 모래를 덮는 시범을 보인 적도 있었다. 영리한 녀석이 그럴 리가 없는데. 인터넷에 원인을 검색해 보고 깜짝 놀랐다. 서열이 높은 고양이는 화장실 모래를 잘 덮지 않는다고 했다. 고양이가 볼일을 보고 모래로 덮는 행위는 포식자로부터 자신의 채취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집에서 자신보다 강한 자가 없다고 생각하니 굳이 뒤처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뻔뻔하게 해먹 위에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던 다옹이가 별안간 벌떡 일어서더니 깩깩, 괴상한 소리를 냈다. 무당벌레 한 마리가 창가에 붙은 것을 보고 채터링을 했다. 새 소리를 모방함으로써 새를 유인해 사냥하고자 하는 본능적 행동이었다. 박스 안에서 단잠을 자던 아옹이는 비몽사몽 중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녀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창가에 높지막하게 위치한 해먹이었다. 해먹 위에 올라가 있으면 온 집안을 두루 살필 수 있었다. 굉음을 내며 바닥을 마구 활보하는 로봇청소기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가 껴안고 뽀뽀하기 위해 다가오는 것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달아날 수도 있었다. 또한 권태로운 얼굴로 창밖의 풍경도 마음껏 관찰할 수 있었다. 집고양이는 야생 늑대나 원숭이처럼 집단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서열 관계를 따지고 지내지 않았다. 기본적인 서열이 있기는 한데 그마저도 상황에 따라 바뀌곤 했다. 고양이에게 높이는 서열 체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높은 곳에 있으면 자기 영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현 위치와 입지를 다른 고양이에게 과시할 수 있었다. 고양이가 집사를 서열로 정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러도 반응이 없거나 주변에 오지 않는 경우, 다가가면 도망가고, 만지면 공격성을 보이는 경우에는 집사를 자기보다 아래도 보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다옹이가 아옹이보다 서열이 높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끼 때부터 함께 자랐기 때문에 크게 의미는 없었다. 먹이를 놓고 다툰 적도 없고 집사의 사랑을 질투하지도 않았다. 다만 활동성이 왕성한 다옹이가 아옹이를 상대로 드잡이질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놀이의 수준이었다. 만사에 귀차니스트인 아옹이는 사냥 놀이를 오래 받아줄 체력과 의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싸움이란 것도 받아주는 상대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지 허공에 대고 혼자 혈기를 부리고 공격을 퍼부을 수는 없었다.


 결혼하기 전 기혼자 선배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같이 살고 일이 년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해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고 했다. 변기 커버를 안 내리고, 양말을 뒤집어 벗고, 집을 어지르고 치우지 않는 등 사소한 행동 습관이 전부 다툼이 될 수 있었다. 결혼하고 나면 더이상 가면을 쓸 필요도,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서로의 적나라한 민낯을 공개해야 되는데 정도에 따라서는 그것이 수용할 수 없는 범위일 때도 있었다. 각자 관리하던 돈과 공간, 관계를 공유함으로써 발생하는 충돌은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상대방을 내 뜻대로 재단하고 제어하려고 하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배우자의 단점까지도 이해하고 용납해야 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내와 4년 연애, 4년 결혼 생활, 합이 8년 동안 싸움 전적은 놀랍게도 0전 0승 0패였다. 아내와 나는 갈등 자체를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아내는 가끔씩 불만을 제기하고 싸움을 걸어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불화와 분쟁을 못 견디는 나는 항상 회피하고 도망쳤다. 잠깐의 냉전과 어색함도 못 참아 먼저 사과하고 백기 투항했다. 한두 번 그냥 넘어가던 아내는 문제 해결 없이 미루는 행위가 반복되자 폭발하고 말았다. 으이구, 답답아, 매번 나만 나쁜 년 만들지! 아내는 상한 감정은 풀고 문제가 생기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봐야 하는데 끝끝내 미루고 방치하는 나를 원망했다. 행동의 개선 없이 앵무새처럼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고 했다. 아내는 대화를 통해 자기감정을 공유하고 소통하고 싶어 했다. 내내 미안했지만 억울한 면도 있었다. 가끔은 남들처럼 화도 내고 머리끄덩이도 잡으며 감정을 솔직히 다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내게는 갈등을 초래하는 것보다는 혼자 삭이고 마는 게 편했다. 여보, 조심해. 나 같은 사람이 한 번 화내면 걷잡을 수 없이 무서워! 사실 구라였다. 어차피 아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글로 마음을 표현하면 그래도 좀 나았다. 대면해서 말로 하는 것보다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기 수월했다. 아내에게 사과 대신 이 글을 바친다고 했다. 나만 천사표 콩쥐로 포장하고 아내는 악독한 팥쥐로 묘사한다며 올리지 말라고 했다. 최하위 피식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 글을 써서 십원이라도 수익이 발생한다면 아내 캐릭터의 저작권료로 모두 넘긴다고 약속했다. 그녀는 내 글쓰기의 듬직한 후원자이자 투자자였다. 아내는 몸집이 커서 해먹에 올라갈 수는 없지만 집안의 서열 1위였다. 나는 아옹이 아래, 꼴찌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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