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젠더 갈등의 기원
게임의 시작은 자주 침묵 속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로부터 시작된다. 플레이 화면은 어둡고, 음악은 긴장감을 더한다. 화면 어딘가에서 한 줄의 문장이 떠오른다. “그녀는 잡혀갔다.” 유저는 별다른 설명도 없이, 누가 왜 그녀를 납치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일단 구하러 간다. 그녀는 이름이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다. 성격은 설명되지 않으며, 화면 속에서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적으로 구출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반복되어왔다. 그리고 유저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이 구조를 받아들였다. 그녀가 왜 붙잡혔는지, 왜 스스로 탈출하지 못하는지 묻지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구조되어야 하는 존재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게임의 목적은 너무나 자명하다.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고, 도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를 다시 ‘해방’시켜야 한다.
어떤 게임에서는 그녀가 유리관 속에 누워 있고, 어떤 게임에서는 그녀가 기둥에 묶여 있다. 때로는 기억을 잃었고, 때로는 중세의 드레스 차림이다. 그녀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탈출하고 싶었는지, 전투에 참여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유저는 단지 그를 ‘되찾아야’ 한다. 그녀가 인간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때로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이며, 왕국의 공주이며, 실종된 동생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감정은 표현되지 않는다. 오직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게임 속의 ‘그녀’는 항상 기다리는 존재다. 탑 위에서, 절벽 끝에서, 어두운 던전의 안쪽에서. 그녀는 그곳에 정지되어 있으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그녀가 움직이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게임은 달라져야 하고, 유저는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기에 그녀는 시스템적으로 ‘멈춰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말 그대로, 하나의 오브젝트가 된다.
게임 속 세계는 정교하고, 복잡하며, 인터랙티브하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배경이다. 유저가 주인공이며, 그녀는 그 배경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때로는 아름답게 묘사되지만, 그 아름다움조차 유저의 동기를 자극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녀는 세계의 일부이되, 세계를 바꿀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녀는 시스템의 꼭두각시에 가깝다.
많은 게임에서 ‘그녀’는 고통받는다. 구출되지 않으면 죽거나, 세상이 멸망하거나, 플레이어가 게임 오버를 맞는다. 그녀는 리스크이고, 게임의 균형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단 한 번도 선택하지 않는다. 공격하지도 않고, 도망치지도 않는다. 운명을 바꾸려 들지 않는다. 운명은 오직 유저의 손에 달려 있다. 그녀는 단지 운명을 당할 뿐이다.
이러한 반복은 아주 오래전부터, 심지어 게이밍 산업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시작된 내러티브 공식이다. 영웅은 여정을 떠나고, 공주는 탑에 갇히며, 승리는 구출의 성공 여부로 결정된다. 이 구조는 너무나 많은 게임에서 변형 없이 반복되었고, 심지어 그 ‘공주’는 이름을 갖기보다 색깔로 불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빨간 드레스, 금발, 슬픈 눈동자. 그녀는 감정의 이름을 갖기보다 시각적 특징으로 정의된다. 기능적이다.
유저는 이 구조에 길들여져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다. 우리가 어떤 캐릭터를 구출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는 순간, 그 캐릭터는 인간이 아닌 도구가 된다. 감정 이입이 아니라 기능 인식이 일어난다. “구출해야 하니까 구출한다.”는 명제가 설득력 있게 작동하는 세계. 그것이 게임이 만든 서사의 틀이다. 여기서 ‘그녀’는 스토리의 대상이 아니라 스토리를 작동시키기 위한 장치로 축소된다.
더 나아가 어떤 게임에서는 그녀가 실패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구하지 못하면 게임 오버가 되고, 그녀의 죽음은 유저의 실패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 죽음은 상징적이지도 않고, 감정적으로도 충격적이지 않다. 그냥 ‘미션 실패’일 뿐이다. 그녀는 죽지만, 그것은 시스템상의 리셋 조건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조건부다. 살아 있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구조 속에서 그녀는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상태 변수에 가깝다.
지금도 많은 게임에서 이러한 서사 구조는 유지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다양성과 변화를 추구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구출되고 있다. 시스템은 다채로워졌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그녀가 칼을 들고 싸우는 게임이 늘었지만, 그녀가 왜 싸우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녀는 더 많이 말하지만, 여전히 이야기의 주체는 아니다. 그녀는 선택할 수 없는 존재이며, 플레이어는 선택하는 자로 남는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유저에게 익숙한 구조가 되었고, 의심 없이 수용된 세계관이 되었다. 우리는 그녀를 구출하면서 성장하고, 경험치를 얻고, 클리어 타임을 단축한다. 그리고 그 구출은 늘 성공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묻자. 왜 그녀는 항상 구출당해야 했는가? 왜 그녀는 구출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태어났는가? 혹시 우리는 그런 구조 안에서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녀는 존재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움직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선택하지 못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스스로를 구해본 적이 없다. 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바란다면, 그녀가 말하게 해야 한다. 그녀가 걷게 해야 하고, 그녀가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게임이 ‘사람’을 다루는 방식의 변화일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게임 속 여성 캐릭터는 갑자기 강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구출당하지 않았다. 손에 무기를 쥐고, 등을 돌리고, 화면을 장악했다. 그녀는 전장에서 가장 앞에 섰고, 누구보다 빠르고, 누구보다 단호했다. 말은 적었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총을 들거나, 마법을 쓰거나, 전투복을 입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진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정말로 그녀는 자유로워졌는가? 정말로 이제는 이전의 서사를 극복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방식으로 기능화된 것인가? 화면 속의 그녀는 전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많이 싸우지만, 여전히 말이 없다. 감정은 억제되고, 흔들림은 허용되지 않는다. 강해야 하기 때문에, 강해 보이기 위해서. ‘약한 여성’이 클리셰였다면, ‘강한 여성’은 또 다른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게임은 종종 이 전환을 자화자찬한다. “우리는 더는 여성을 구출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대신 그녀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종종 남성 캐릭터를 단순히 여성의 몸으로 치환한 것처럼 보인다. 말투도, 행동도, 목적도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성별이 다를 뿐이다.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고, 복수심에 이끌리며, 물리적인 힘을 중심으로 서사를 끌고 간다. 그녀는 더 이상 약하지 않지만, 그 강함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강함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그녀가 적을 쓰러뜨리는 속도? 상처를 감내하는 능력? 감정을 억제하는 절제력? 이것은 과연 인간적인 강함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원하는 기능인가? 그녀는 여전히 게임 속 시스템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처럼 존재한다. 약했을 때는 ‘구출’의 대상이었고, 강해진 지금은 ‘진행’의 도구가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말’ 대신 ‘행동’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 행동은 대체로 폭력이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적을 쓰러뜨린다. 피로 얼룩진 손으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녀의 감정은 지워진다. 사랑, 연민, 갈등, 슬픔, 기쁨. 그런 감정들은 일시적인 컷씬에서만 허용될 뿐, 실제 플레이에서는 기능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녀는 강해야 하니까, 감정 따위로 주저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함이란 무엇인가? 진짜 강한 인간은 울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며, 때로는 포기하기도 한다. 진짜 강함은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고통스럽다. 게임 속 ‘강한 여성’은 그런 진짜 강함을 가지지 못한다.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감정을 가지면 느려지고, 느려지면 플레이의 템포가 떨어진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을 감춘다. 감춘다는 말은, 그 감정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강한 여성’이 마치 전형처럼 소비된다는 점이다. 어깨에 상처가 있는 모습, 붉은 피를 닦으며 무표정하게 일어서는 연출, 홀로 모든 적을 쓰러뜨리는 연속 액션. 이런 이미지는 반복될수록 표준이 된다. 이제 유저는 ‘여성 주인공’이 나온다 하면 그 강함을 예상하고, 그 강함이 없으면 실망한다. 그래서 캐릭터는 또다시 그것을 연기하게 된다.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가면을 자발적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강한 여성’이라는 상징은 처음에는 해방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억압일 수도 있다. 이제 그녀는 약해질 수 없다. 흔들릴 수 없다. 망설일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는 그 약함조차 시스템이 부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강함 역시 시스템의 명령일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런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유저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한 여성은 멋지다. 하지만 멋지다는 감탄은 곧 한정된 감정이다. 그녀가 강하지 않은 순간, 멋짐도 사라진다. 그리하여 그녀는 매 순간 강해 보여야 하고,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한다. 그 끝없는 증명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가?
게임이 진정으로 그녀를 주체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녀가 때로는 울어도 되고, 때로는 무너져도 되며, 누구의 도움을 받아도 되는 존재로 그려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과 선택이 게임 시스템 속에서도 실제로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주체성이다. 강함이 아니라, 주체성이어야 한다. 강함은 시스템이 부여할 수 있지만, 주체성은 게임 세계 안에서 그녀가 스스로 얻어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달릴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싸울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강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게임 안에서 진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강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게임 속 여성 캐릭터는 갑자기 강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구출당하지 않았다. 손에 무기를 쥐고, 등을 돌리고, 화면을 장악했다. 그녀는 전장에서 가장 앞에 섰고, 누구보다 빠르고, 누구보다 단호했다. 말은 적었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총을 들거나, 마법을 쓰거나, 전투복을 입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진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정말로 그녀는 자유로워졌는가? 정말로 이제는 이전의 서사를 극복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방식으로 기능화된 것인가? 화면 속의 그녀는 전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많이 싸우지만, 여전히 말이 없다. 감정은 억제되고, 흔들림은 허용되지 않는다. 강해야 하기 때문에, 강해 보이기 위해서. ‘약한 여성’이 클리셰였다면, ‘강한 여성’은 또 다른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게임은 종종 이 전환을 자화자찬한다. “우리는 더는 여성을 구출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대신 그녀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종종 남성 캐릭터를 단순히 여성의 몸으로 치환한 것처럼 보인다. 말투도, 행동도, 목적도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성별이 다를 뿐이다. 여전히 분노로 가득 차 있고, 복수심에 이끌리며, 물리적인 힘을 중심으로 서사를 끌고 간다. 그녀는 더 이상 약하지 않지만, 그 강함은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강함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그녀가 적을 쓰러뜨리는 속도? 상처를 감내하는 능력? 감정을 억제하는 절제력? 이것은 과연 인간적인 강함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원하는 기능인가? 그녀는 여전히 게임 속 시스템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처럼 존재한다. 약했을 때는 ‘구출’의 대상이었고, 강해진 지금은 ‘진행’의 도구가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말’ 대신 ‘행동’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 행동은 대체로 폭력이다.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고, 적을 쓰러뜨린다. 피로 얼룩진 손으로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이 모든 과정에서 그녀의 감정은 지워진다. 사랑, 연민, 갈등, 슬픔, 기쁨. 그런 감정들은 일시적인 컷씬에서만 허용될 뿐, 실제 플레이에서는 기능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녀는 강해야 하니까, 감정 따위로 주저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함이란 무엇인가? 진짜 강한 인간은 울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며, 때로는 포기하기도 한다. 진짜 강함은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고통스럽다. 게임 속 ‘강한 여성’은 그런 진짜 강함을 가지지 못한다.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는 감정을 가지면 느려지고, 느려지면 플레이의 템포가 떨어진다. 그래서 그녀는 감정을 감춘다. 감춘다는 말은, 그 감정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강한 여성’이 마치 전형처럼 소비된다는 점이다. 어깨에 상처가 있는 모습, 붉은 피를 닦으며 무표정하게 일어서는 연출, 홀로 모든 적을 쓰러뜨리는 연속 액션. 이런 이미지는 반복될수록 표준이 된다. 이제 유저는 ‘여성 주인공’이 나온다 하면 그 강함을 예상하고, 그 강함이 없으면 실망한다. 그래서 캐릭터는 또다시 그것을 연기하게 된다.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가면을 자발적으로 쓰게 되는 것이다.
‘강한 여성’이라는 상징은 처음에는 해방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억압일 수도 있다. 이제 그녀는 약해질 수 없다. 흔들릴 수 없다. 망설일 수 없다. 그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는 그 약함조차 시스템이 부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강함 역시 시스템의 명령일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이런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유저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한 여성은 멋지다. 하지만 멋지다는 감탄은 곧 한정된 감정이다. 그녀가 강하지 않은 순간, 멋짐도 사라진다. 그리하여 그녀는 매 순간 강해 보여야 하고,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한다. 그 끝없는 증명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가?
게임이 진정으로 그녀를 주체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녀가 때로는 울어도 되고, 때로는 무너져도 되며, 누구의 도움을 받아도 되는 존재로 그려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복합적인 감정과 선택이 게임 시스템 속에서도 실제로 반영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주체성이다. 강함이 아니라, 주체성이어야 한다. 강함은 시스템이 부여할 수 있지만, 주체성은 게임 세계 안에서 그녀가 스스로 얻어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달릴 수도 있고, 멈출 수도 있어야 한다. 싸울 수도 있고, 도망칠 수도 있어야 한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녀가 강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게임 안에서 진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강하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다.
처음에는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게임 속 주인공은 늘 똑같은 얼굴이었고, 같은 어조로 말했으며, 무표정하게 세계를 구했다. 백인 남성. 누구나 알았고,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게임은 원래 이런 거지’라는 말이 습관처럼 반복되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화면 속에 낯선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성, 흑인, 동양인, 장애인, 퀴어. 게임은 다양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반가웠다. 오래도록 화면 바깥에 있었던 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동안은, 그 변화가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점점, 그 ‘다양성’이라는 말이 낯설게 들리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은 늘었지만, 이야기는 여전했고, 인물은 바뀌었지만, 시선은 익숙했다. 어떤 유저는 그 다름을 환영했고, 어떤 유저는 피로해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저는, 무언가 부자연스럽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질감은 아주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다.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설정창에서 성별과 인종, 성적 지향까지 선택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배려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시험지 같다.” 마치 올바른 조합을 만들어야만 진짜 유저가 되는 것처럼. 캐릭터의 외형을 고르는 일이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정작 그 선택들이 스토리나 플레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양성은 상징으로 머문다. 배경은 바뀌지 않고, 등장인물의 태도도 그대로인데, 유독 특정 캐릭터만 어딘가 이질적으로 끼워져 있다. “이 캐릭터는 성소수자입니다.”, “이 캐릭터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런 선언은 화면을 뚫고 나와 유저에게 각인된다. 그러나 그게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라, 그저 태그처럼 붙어 있을 뿐이라면, 유저는 그걸 맥락 없는 장식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서사에 대한 몰입은 거기서 멈춘다.
진짜 문제는 이 다양성이 너무 자주, 너무 갑자기, 너무 겉으로만 등장한다는 데 있다. 특정 인종과 성별의 조합이 개발 가이드라인처럼 반복되면, 유저는 익숙해지기보단 의심하게 된다. “이번엔 누구 차례지?“라는 농담은, 그들이 진심으로 환영받고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다. 캐릭터가 ‘존재해서’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존재해야 하니까’ 등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 유저는 그 인물을 더 이상 인물로 보지 않는다.
게임은 결국 몰입의 예술이다. 그리고 몰입은 진심에서 온다.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몰입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야 한다’는 규칙처럼 다가오는 다양성은 유저에게 강박처럼 느껴진다. “이건 네가 반가워해야 할 캐릭터야.”라는 무언의 압력이 몰입을 가른다. 선택지가 많아졌다는 건 기쁜 일인데, 그 선택이 자유가 아니라 의무처럼 느껴질 때 문제는 시작된다.
물론 모든 게임이 그렇진 않다. 어떤 게임은 다양성을 그저 ‘등장’시키지 않고, 살게 만든다. 성소수자 캐릭터는 그저 사랑을 하고, 동양인은 복수보다 고민을 하고, 흑인은 고통 대신 음악을 한다. 그런 인물들은 ‘누구인가’보다 ‘무엇을 하는가’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런 게임은 드물다. 대부분의 게임은 아직, 다양성을 채워야 할 빈칸처럼 다룬다. 그게 무심인지, 계산인지 유저는 느낀다.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캐릭터를 만들다 보니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와야 한다. 그것이 진짜 다양성이다. 지금은 너무 설명이 많다. 등장인물은 말로 자기 정체성을 밝히고, 마치 ‘다름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진짜 사람은 말로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다. 살아가며, 행동으로, 선택으로 드러난다. 게임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다양성이 진보적인지, 형식적인지는 유저가 제일 먼저 안다. 몰입이 끊기면 형식이고, 감정이 따라가면 진보다. 게임은 결국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사람이 만든다. 그러니 이제 다양성은 ‘누구를 등장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유저는 마음 놓고 게임 속 세상에 빠져들 수 있다.
유저는 게임 속에서 누구였을까. 처음 패드를 잡았던 날, 그는 이름 모를 전사였고, 장비를 갖춘 병사였으며, 공장에서 탈출한 로봇이었다. 누가 됐든 상관없었다.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이성애자인지 아니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게임은 그저 세계를 던져줬고, 유저는 그 안에 들어가 싸우고, 걷고, 선택하고, 실패했다.
그렇게 게임은 유저에게 가장 먼저 허용한 것이 ‘정체성의 탈피’였다. 현실에서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게임 안에서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현실의 언어, 규범, 시선에서 벗어난 ‘자유’ 같은 것이 있었다. 게임은 유저에게 “너는 누구든 될 수 있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살게 했다. 정체성을 주입하기보다, 놔두었다.
그런데 지금, 유저는 점점 더 자주 정체성을 마주한다. 캐릭터 생성창은 상세해졌고, 배경 설정은 더 정교해졌으며, 대사 한 줄 한 줄에 정체성이 묻어난다. “그녀는 트랜스젠더였다.”, “그는 이주노동자였다.”, “그들은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양성애자였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그들의 ‘정체성’은 강조된다. 그러나 유저는 그런 정보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
유저가 진짜 원하는 건, 누구인가보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다. 게임 속에서의 존재는 수행이다. 그 인물이 어떤 존재인지는 그의 선택과 행동, 실패와 결과 속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한다. 그가 누구인지 말하고, 왜 그런 정체성을 가졌는지 배경을 붙이고, 어떤 시선을 받아왔는지를 서두에서 풀어놓는다. 유저는 때때로 그 모든 설명이 몰입을 방해한다는 걸 느낀다.
정체성이 담긴 인물이 무의미한 건 아니다. 오히려 더 풍부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정체성이 진짜 설계자의 진심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외부 압박이나 마케팅 요구에 따른 것인지는 유저는 쉽게 알아차린다. 캐릭터가 평면적이면 정체성은 부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이야기가 얕으면 정체성은 무게를 잃는다. 정체성이란 ‘배경’이 아니라, 서사의 ‘결과’여야 한다. 그 인물이 어떤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다 보니 그 정체성이 드러난다는 순서가 필요하다.
이상한 일이다. 정체성을 지워도 욕먹고, 드러내도 욕먹는다. 게임 개발자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래서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캐릭터는 중성적이고, 대사는 중립적이며, 배경은 무색무취하다. 그게 무난하고, 안전한 방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유저는 그런 캐릭터에 정을 붙이기 어렵다. 아무런 흔적도, 맥락도, 고통도 없는 존재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란 쉽지 않다.
반대로, 너무 많은 정체성이 부각되는 게임도 유저의 거리감을 만든다. “또 이런 유형의 캐릭터구나.”, “또 이런 설정이군.” 어느 순간, 그것은 장르가 되고, 도식이 되고, 교과서가 된다. 캐릭터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설계된 도형처럼 보인다. 유저는 그런 인물에게 감탄하지 않는다. 감동하지 않는다. 단지 인식할 뿐이다.
유저는 정체성을 원했는가? 아마도 유저는 정체성을 ‘기능’으로서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비슷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 인물이 가진 내면과 선택, 갈등 때문에 그를 좋아한다. 정체성은 부차적이다. 오히려 유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게임은 그런 탈정체성의 경험을 가장 잘 제공하는 매체였다.
하지만 지금, 정체성은 점점 더 전면에 등장한다. 그것은 오히려 유저에게 ‘되돌아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네가 누구인지 생각해봐.”, “너랑 이 캐릭터는 닮았니?” 그러나 유저는 그걸 원치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게임 속에서 ‘누구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다. 정체성보다 경험을, 역할보다 상황을, 표현보다 이야기를 원한다.
결국 정체성은 유저가 느끼는 것이지, 개발자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유저는 느낀다. 어떤 인물이 그저 다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야기를 위해 필요한 존재인지. 정체성은 캐릭터를 진짜로 만들 수도 있고, 가짜로 만들 수도 있다. 그 차이는 아주 작지만, 몰입을 좌우한다.
게임은 정체성의 박람회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전시물이 아니라 서사의 일부여야 한다. 유저는 박물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정체성이 진짜로 작동하는 순간은, 그것이 특별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다. 그때, 유저는 마침내 그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