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젠더 - 게임은 왜 계속 공격받는가?

‘여성혐오’라는 딱지와 도덕적 우월주의

by 엠알

혐오의 낙인, 그리고 유저에 대한 도덕적 재단


2014년, ‘게이머게이트(GamerGate)’ 사태는 단지 미국 게임계 내부의 일대 혼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게임을 둘러싼 ‘도덕적 전선’이 본격적으로 열렸다는 신호탄이었다. 당시 몇몇 인디 게임 개발자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사건은, 페미니즘적 게임 비평과 유저 커뮤니티 간의 극심한 충돌로 번졌다. “게임은 여성혐오적이다”라는 비평가들의 비판은, 수많은 유저에게는 “너희는 혐오자다”라는 선고처럼 들렸고, 이후 게임 안팎에서는 ‘도덕적으로 옳은 자’와 ‘문제를 가진 자’로 사람들을 나누는 흐름이 가속화됐다.


비판의 출발점은 분명한 문제의식이었다. 게임 산업은 오랜 시간 남성 중심의 시장이었다. 메이저 타이틀의 주인공은 대부분 백인 남성이고, 여성 캐릭터는 부수적이거나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된 방식으로 등장하곤 했다. 하지만 이 비판이 점차적으로 “게임 전체는 여성혐오적이다”, **“게임 유저는 여성차별적이다”**라는 일반화로 이어지면서, 그 비판은 담론으로서의 설득력을 잃고, 공격과 방어의 프레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저들은 이 비판이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처럼 느꼈다. 단순히 어떤 게임을 좋아했다는 이유로, 혹은 그 게임의 디자인이 특정 페미니즘 기준에 맞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은 ‘혐오자’로 호명됐다. 물론 모든 유저가 건전한 것은 아니다. 악성 댓글, 여성 스트리머에 대한 괴롭힘, 선정적 모딩 등은 분명히 존재했고, 이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행위를 특정한 전체로 일반화하고, 그 틀을 통해 유저 커뮤니티 전체를 재단하는 방식이다. 이는 결국 소통이 아닌 단절, 반성보다 반감을 낳는다.


대표적인 예로,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2(The Last of Us Part II)>를 들 수 있다. 이 게임은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전면에 내세운 대표작이었다. 하지만 일부 유저는 이야기 전개와 특정 캐릭터의 설정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냈고, 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정체성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되었다. 개발사 너티독(Naughty Dog)은 이를 ‘혐오’로 규정했고, 유저 사이에서는 자유로운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라는 비판이 확산됐다. 이처럼 게임의 표현에 대한 반응이 ‘도덕적 프레임’ 안에서 해석될 때, 유저는 침묵하거나, 혹은 더 극단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반복됐다. <블루아카이브>나 <소녀전선> 등 일부 서브컬처 게임에서 여성 캐릭터의 외형이나 특정 일러스트가 논란이 되자, 해당 게임을 즐기던 유저들은 ‘여성혐오 게임 유저’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각에서는 심지어 플레이 자체를 문제 삼는 흐름도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유저가 게임을 해석할 권리, 그 해석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보일 권리를 억압하게 된다. 즉, “이런 게임을 좋아하면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도식이 게임 외부로부터 강요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도덕적 프레임은 게임을 감상하는 자유를 압박한다. 게임을 좋아한다는 행위는 원래 정치적이지 않다. 특정 캐릭터를 좋아하거나, 특정한 서사를 선호하는 것도 개인의 취향이다. 하지만 그 취향이 사회적 이슈와 맞물리는 순간, 그것은 도덕의 심판대 위에 오르고 만다. 그리고 그 심판은 언제나 단호하며, 종종 일방적이다. 유저는 스스로를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들’에 의해 평가당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 도덕은 누가 정의하는가? 비판은 어떤 근거에서 이뤄져야 하는가? 게임은 수많은 유저가 각자의 방식으로 몰입하는 공간이다. 이 몰입의 방식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 물론 혐오 발언, 폭력적 행위, 차별적 구조는 분명히 문제다. 그러나 그것은 맥락 속에서 조명돼야 하며, 단지 ‘정치적으로 옳은 사람’의 기준에 의해 단정될 수 없다.


정치적 비평이 게임을 변화시켜 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비평이 유저를 설득하지 못하고, 오히려 적으로 돌리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그것은 더 이상 비평이 아니다. 그것은 선동이며,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운 배제의 장치가 된다. 게임을 바꾸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비판의 방식이다. 낙인이 아니라 질문으로, 추궁이 아니라 대화로, 재단이 아니라 탐구로.


게임은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게임을 좋아하든, 누구도 그 취향으로 인해 평가받아선 안 된다. 그것이 진짜 자유이며, 그 자유 안에서 게임은 성장할 수 있다.


도덕적 게임 서사,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게임은 원래 선택의 예술이다. 유저는 어떤 캐릭터를 조종할지, 어떤 길을 갈지, 어떤 결과를 받아들일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 선택은 때로 서사를 바꾸고, 게임의 결말을 변화시키며, 유저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등장한 게임들에서는 그런 선택의 자유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 유저의 모든 선택은 하나의 ‘도덕적 기준’에 의해 평가되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비도덕적, 혹은 비정상적인 선택으로 취급된다. 이는 단순한 게임 설계의 변화가 아니다. 게임 서사 속 ‘정의’의 개념 자체가, 유저의 주체성과 충돌하고 있다는 신호다.


예컨대, 최근 수년간 주목받은 게임들에서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들이 서사의 중심에 자리한다. 성소수자, 유색인종, 혹은 장애를 가진 캐릭터들이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핵심 주인공이 되고, 그들의 선택과 고통이 게임의 주제와 직결된다. 이런 흐름은 당연히 환영받아야 할 변화다. 그러나 문제는, 유저가 이 서사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에 있다. 유저가 주체로서 서사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옳다고 규정된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것이 되면, 그 순간 유저는 더 이상 주체가 아니다. 유저는 단지 제작자가 설계한 윤리적 루트를 걷는 ‘수행자’에 불과해진다.


대표적인 예가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트루 컬러즈(Life is Strange: True Colors)>다. 이 게임은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짚어낸 내러티브로 호평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유저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윤리적 측면에서 대부분 정답이 정해져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감정적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옳은 길’로 설계돼 있고, 그 흐름을 따르지 않으면 유저는 뉘우쳐야 하거나, 게임 속 세계와 충돌하게 된다. 이것은 윤리적 서사로서 설계된 작품이긴 하지만, 동시에 유저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구조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덕 중심의 서사는 사실상 하나의 강제된 윤리 세계다. 물론, 이야기에는 항상 윤리적 기준이 존재한다. 모든 소설, 영화, 드라마가 그렇다.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게임은 상호작용의 매체이며, 유저는 ‘정답을 고르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직접 탐험하는 존재’다. 그런데 정답이 정해진 세계는 탐험이 아니라 순응이고, 몰입이 아니라 복종이다. 유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윤리적 검열의 대상이 된다면, 그 선택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헤븐즈 볼트(Heaven’s Vault)>나 <던그리드(Dungreed)>와 같은 비교적 소규모 타이틀에서는, 오히려 도덕적 압박이 줄어든 자유로운 탐험이 가능하다.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성격이나 정체성을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세계를 읽고, 이해하며, 그 이해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이는 상호작용 매체로서 게임의 본질에 훨씬 더 가까운 방식이다.


유저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반드시 ‘옳은 가치’를 내면화하기 위해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게임은 실험의 공간이고, 가능성의 실험실이며, 때로는 윤리적 실패를 안전하게 감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런데 최근의 많은 게임들은 이 공간에 도덕적 울타리를 세운다. 그리고 유저는 그 울타리를 넘을 수 없도록 설계된다. 결과적으로 유저는 더 이상 이야기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전달자, 혹은 그 메시지를 수용하는 수신자로만 존재한다.


진짜 ‘윤리적인 게임’이란, 유저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게임이다. 무엇이 옳은가를 강요하지 않고, 어떤 길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윤리적 서사란, 도덕적 정답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선택 속에서도 주체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근의 도덕적 게임 서사가 빠지는 오류는 바로 여기다. 옳은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길만이 옳다고 선언해버린다. 그 순간 게임은 서사적 다양성을 잃고, 유저는 선택의 가능성을 잃는다.


정의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게임 속 서사가 정말로 ‘약자’를 위한 정의를 구현하고 있는가, 아니면 특정한 사회적 기준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가? 유저는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 공간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계라도, 자유로운 게임의 세계라 부르기 어렵다.


유저는 왜 게임 밖에서 싸우는가


게임은 점점 더 정치적인 매체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그렇게 간주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임은 “그냥 오락”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은 단지 재미를 위해 플레이하는 것조차 도덕적 검토의 대상이 된다. 정체성, 젠더, 다양성, 혐오, 포용 같은 담론이 게임을 해석하는 기준으로 자주 동원되면서, 유저는 점점 더 자신의 취향과 선택, 감상까지도 누군가에게 해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 과정에서 유저는 비로소 자신이 ‘소비자’가 아니라 ‘판단받는 주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다.


유저가 분노하는 것은 그저 게임 속 서사에 동의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분노는 “내가 이걸 좋아하면 안 되는 건가?”, “왜 나는 설명 없이 비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지?”라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유저는 게임을 해석하고 감상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비평 담론은 그 권리를 ‘윤리’라는 이름으로 제한한다. 특정한 메시지를 내포한 캐릭터, 사회적 맥락을 강조한 서사, 혹은 포용적 장치를 두고 “이건 이래서 중요하다”는 판단이 먼저 내려지고, 이에 동의하지 않거나 불편함을 느끼는 유저는 곧바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저 커뮤니티는 점점 더 극단화된다. 일부 유저는 “정치적 올바름에 물든 게임 따위는 사절이다”라는 목소리를 내고, 반대로 게임 비평계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오는 것이 불편한 유저들이 문제”라고 응수한다. 양쪽 모두 합리적 토론보다는 감정적 반응에 휘말려 있고, 그 가운데 있는 유저 다수는 점점 피로감을 느낀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엔 지나치게 도식화된 프레임들만 존재하고, “말을 아끼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식처럼 여겨진다.


이런 현상은 게임 비평이 유저를 ‘정당한 수용자’가 아니라, ‘교정해야 할 존재’로 간주하면서 심화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페미니즘적 게임 비평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저는 왜 이 캐릭터를 성적 대상으로 보는가?”, “왜 이 선택지가 유저에게 유쾌하게 느껴지는가?”라는 질문들이다. 이 질문은 겉보기에 정당하다. 그러나 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문제다. 그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다. 유저에게 답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유저의 태도를 미리 판단한 뒤 해석을 덧씌운다.


대표적으로 논란이 됐던 게임 <호그와트 레거시>를 떠올려보자. 이 게임은 해리포터 세계관을 배경으로 제작되었고, 많은 유저들의 기대 속에 출시되었다. 그러나 원작 작가인 J.K. 롤링이 과거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발언으로 논란이 되면서, 게임 출시 자체가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많은 게임 평론가와 인플루언서들이 “이 게임을 하는 것은 곧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를 지지하는 것이다”라는 논리를 폈고, 이에 유저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왜 나의 게임 선택이 누군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 표명이어야 하지?”라는 물음이 뒤따랐고, 결국 이 게임은 출시와 동시에 유저와 비평계 간의 전선을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게임은 원래 유저의 공간이었다. 스토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캐릭터에 공감할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두 유저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점점 더 ‘올바른 방식’만이 허용되는 분위기다. 이는 유저의 주체성을 침해하고, 게임 자체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게다가 이런 분위기는 정작 포용과 다양성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더 많은 유저를 소외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정체성의 정치가 게임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지금, 유저는 더 이상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그는 말과 선택, 감정까지 해명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저는 게임 바깥에서 싸운다. 그 싸움은 “정치적 메시지를 넣지 마라”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게임을 즐길지, 내 방식대로 결정하게 해달라”는 요구다. 그리고 이 요구는 단순히 보수적이거나 반페미니즘적 목소리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게임은 오랫동안 유저와 함께 성장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흐름은 유저를 점점 더 ‘문제 있는 존재’로 다룬다. 그리고 유저는, 이 흐름에 반발하면서 점점 더 거칠고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 언어가 불편할지언정, 그 안에는 분명히 하나의 외침이 있다. “나는 내 방식대로 게임을 해도 되는가?” 이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이라는 이름의 강요일 뿐이다.


‘여성혐오’라는 라벨, 논쟁을 막는 가장 쉬운 방법


“여성혐오.” 이 단어 하나로 수많은 대화가 멈춘다. 어떤 게임의 디자인이든, 캐릭터 설정이든, 혹은 유저의 발언이든 간에 ‘여성혐오’라는 말이 덧씌워지는 순간, 그것은 분석이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인 규탄과 교정의 대상으로 변한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분노의 문제를 넘어서서, 비판이 가진 언어적 권력이 일상적으로 행사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그렇게 쉽게 이 단어를 꺼내는가? 그리고 그 단어가 갖는 무게는 과연 어떤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게임 산업에서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등장한 순간을 기억해보자. 2014년 게이머게이트(Gamergate) 논쟁은 단지 하나의 논란이 아니라, 게임 문화 내 젠더 갈등의 전면화였다. 당시 여성 개발자에 대한 비난과 비판, 이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한 페미니스트 비평가들, 그리고 양쪽의 충돌은 지금까지도 게임 커뮤니티의 균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해 ‘여성혐오’라는 언어가 비판의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 검증’의 잣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떤 게임을 좋아하는가, 어떤 캐릭터를 선호하는가, 어떤 게임문화에 익숙한가에 따라 ‘여성혐오자’로 분류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퍼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유저다. 유저는 단지 게임을 즐겼을 뿐인데, 그 행위 자체가 정치적 함의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어떤 게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문제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유저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하게 만든다. 커뮤니티에서는 이제 “나는 이 게임을 재밌게 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위험한 행위가 되었다. 말하기 전에 먼저 방어해야 하고, 취향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해명해야 한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는 방식이며, 유저의 주체성은 점점 더 협소한 경계 속에 갇힌다.


특히 ‘여성혐오’라는 용어가 갖는 효과는 강력하다. 그것은 ‘당신은 잘못된 사람’이라는 선언이자, 동시에 ‘그 어떤 설명도 무의미하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대화는 중단되고, 상대방은 변명하거나 침묵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다. 이로 인해 많은 유저들은 분노한다. 그들은 “나는 여성을 미워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 말조차 ‘무의식적 여성혐오’라는 프레임 속에서 부정된다. 모든 반응이 이미 규정된 틀 안에서 해석되는 구조, 이것이 바로 게임 커뮤니티의 현재다.


<드래곤즈 도그마 2>에서 여성 캐릭터가 적은 비중으로 등장하거나, <엘든 링>에서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 중심 서사”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게임 서사를 비평하는 기준이 지나치게 도식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다양한 정체성이 표현되더라도, ‘올바른 방식’에 부합하지 않으면 그 서사는 비판받는다. 즉, ‘여성혐오’라는 프레임은 평가가 아니라 전제이며, 설명이 아니라 정답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작자들에게도 부담을 준다.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창작이고 표현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창작물이 젠더적 검열을 통과해야 하고, 혹시라도 ‘문제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미학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개발자와 유저 모두가 스스로를 검열하는 이 구조는 결국 게임 산업 자체의 위축을 불러온다. 표현이 다양해질수록 검열은 더 세분화되고, 검열이 강해질수록 표현은 더 획일화된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히 ‘표현의 자유’ 대 ‘사회적 책임’이라는 구도로만 볼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사용된다는 데 있다. 그것이 정말로 혐오를 비판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견해를 억누르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언어의 타락이며, 비평의 무기화다. 그리고 그 피해는 유저뿐 아니라, 결국 게임 전체의 생태계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혐오를 덜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혐오라는 말을 더 신중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여성혐오’라는 말이 비판의 종결어가 아니라, 대화를 여는 질문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건강한 게임 문화를 가질 수 있다. 유저는 비평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게임의 중심에 있는 존재이며, 그 감정과 취향, 불편함과 기쁨이야말로 진짜 비평의 출발점이다.


게임 서사의 경계 위에서


현대 게임은 과거보다 훨씬 풍부한 서사를 담고 있다. 단순히 적을 무찌르고 목표를 달성하는 구조를 넘어, 인간의 갈등과 감정, 사회적 메시지까지 게임의 세계관에 녹여낸다. 그리고 그 서사 속에 성별, 인종, 젠더, 계층 등 다양한 정체성이 포함되기 시작하면서, 게임은 점점 더 문화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어떤 게임의 메시지를 ‘비평’하는 것과, ‘정답’을 강요하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다. 우리는 지금 그 경계에서 자주 헷갈린다. 아니, 헷갈리는 척하며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게임 비평계에서 점점 더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이 게임은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 “여성 캐릭터의 존재가 도구화되어 있다.” 이 표현들은 처음에는 제안이나 문제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종의 ‘합격 기준’처럼 작동한다. 게임이 이 기준에 부합하면 ‘진보적’이고 ‘성숙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렇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 ‘차별적’인 게임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비평은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심판이 되었고, 유저는 이 심판이 내린 평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받는다.


이와 같은 기준은 게임 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많은 개발자들이 ‘문제없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콘텐츠의 방향성을 조절한다. 이는 분명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변화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표현의 자율성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단지 ‘정치적으로 안전한’ 게임이지, 진정한 의미의 창의적인 게임은 아니다. 모든 여성 캐릭터는 강인해야 하고, 모든 서사는 소수자에게 공감해야 하며, 모든 선택지는 도덕적 정답을 향해야 하는 구조는 오히려 ‘윤리의 획일화’를 낳는다. 그리고 그런 게임은, 결국 유저에게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는, 무해하지만 무의미한 콘텐츠가 된다.


이 문제는 유저의 반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다수의 게임 커뮤니티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 피드백이 있다. “또 이런 메시지야?”, “주제의식은 알겠는데 너무 노골적이야.” 유저는 단지 정치적 메시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 메시지가 ‘서사적 필연’이 아닌 ‘외부의 명령’처럼 느껴지는 순간, 유저는 몰입에서 이탈한다. 게임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설득과 공감으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도덕적 정답을 앞세운 게임은 설득하지 않는다. 선언하고, 단죄하고, 훈계한다. 그리고 유저는, 그러한 태도에 피로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는 깊은 서사와 강한 메시지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주인공의 성격 변화, 플롯 전개, 인물 구성에서 “이건 너무 교훈적이다”는 비판도 많았다. 물론, 이 게임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반응조차도 “당신은 여성 주인공을 싫어해서 그렇다”, “트랜스젠더 캐릭터가 불편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몰아가며 반박의 여지를 차단하는 비평자들의 태도였다. 유저는 이 게임의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 말조차 특정 프레임 안에서 해석되며 ‘의심받는 존재’가 된다.


게임은 창작물이다. 창작물은 해석을 요청하고, 감정을 유도하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현재의 게임 비평 담론은 질문이 아니라 정답을 먼저 요구한다. 그것은 비평이 아니다. 그것은 강요다. 이 강요는 개발자에게는 방향의 제약이 되고, 유저에게는 해석의 압박이 된다. 그리고 그런 게임 세계에서는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 표현은 정치화되고, 감상은 검열되며, 대화는 침묵으로 대체된다.


우리는 다시 비평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게임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해 유저가 반론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불편함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게임은 세계를 그리는 도구이자, 플레이하는 사람을 통해 완성되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정답이 없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게임은 특별한 매체였다.


정체성 게임, 그 피로한 싸움의 끝에서


우리는 지금, 단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전쟁터를 누비고 있다.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느냐, 어떤 게임을 선호하느냐가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행위가 되었고, 그 선택은 곧장 도덕적 검열과 연결된다. 유저는 스스로의 취향을 해명해야 하고, 개발자는 창작의 방향에 대해 사전 승인을 요구받는다. 이 모든 것은 ‘다양성’과 ‘포용’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다양성의 이름으로 새로운 획일성이 탄생했다. 모든 게임이 같은 메시지를 향해 나아가야 하고, 모든 캐릭터는 정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모든 유저는 ‘올바른 방식’으로 감상하고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문화적 피로다. 게임은 현실보다 자유롭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현실보다 더 많은 제약과 프레임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진보를 위한 필수적인 감수성이다. 문제는 그것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었을 때다. 게임은 메시지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게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그 안에서 유저는 선택하고, 실패하고, 몰입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색해 나간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행위가 미리 정해진 틀 안에서 이뤄지길 강요받고 있다.


이 시리즈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단 하나다. “정체성이 게임을 점령했는가?” 그리고 “그 점령은 정말 필요한 것이었는가?”

게임은 표현의 공간이어야 하며, 그 표현은 정답이 없어야 한다. 게임은 정체성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정체성에 의해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유저가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으로 게임을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게임은 다시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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