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을 유보하는 용기, 그리고 겸손의 탄생

by 신아르케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감정에 기울기 쉽다. 우리는 이성적 존재라고 자신을 설명하지만, 실제로 판단의 초점은 대부분 자기 보존과 생존에 맞추어져 있다. 어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으로 굴절되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해 나의 생명을 내놓는 일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며, 감정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향을 선택한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비난은 큰 의미가 없다.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꽤 정의롭고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이성에 기반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거의 언제나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판단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으며, 그 어느 쪽도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삶은 단순하지 않고, 감정·이해관계·상황·윤리·도덕 등 셀 수 없는 요소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한 가지 해석으로 설명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우리의 감정과 생각, 판단은 일관적이지도 않다. 때로는 나조차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말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확신을 조금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과 상황을 바라볼 때, 단일한 관점에 기대어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은 결국 나의 한계에 스스로 갇히는 일이다. 어떤 일이 지금 당장 나에게 좋은지 나쁜지조차 명확히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내가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은 긍정적 경험이 되기도 하고, 불행의 씨앗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판단 유보’라는 태도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일어난 일과 타인에 대해 즉각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채 바라보는 훈련이다. 물론 이것이 나에게 정말 이로운지, 아니면 해로운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태도가 자칫 우유부단함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오래 망설이지 않고 직관을 따른다. 대신 사람과 상황에 대한 평가는 서두르지 않는다. 두 영역을 분리해 보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얻는 긍정적 효과는 분명하다. 성급한 판단으로 감정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관점의 폭이 넓어진다. 사물을 보는 시각에 균형이 생기며, 마음과 정서가 한결 차분해진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지고, 포용력이 생기는 것도 느낀다.

돌이켜보면, 예전의 나는 감정에 기대어 내린 판단에 너무 쉽게 확신을 가졌다. ‘내 생각과 판단만이 옳다’는 편견과 오만 속에서 살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과 삶의 복잡성을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무지였다. 세상은 내가 이해한 만큼만 단순해 보였을 뿐이다.

이제 나는 조금씩 그 복잡성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확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고 대신 겸손이 자라기 시작했다. 겸손은 나약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삶이 지닌 다층성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인식은 나를 더 성급하지 않게 만들고, 더 넓어진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한다.

판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판단의 속도를 늦추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성숙의 형태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