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다

by 신아르케

나는 정치적 성향으로 보자면 진보에 가깝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진보는 무조건적인 변화나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잘못된 것을 고치고 근본으로 되돌아가려는 태도에 가깝다. 그것은 나 개인의 삶에서도, 내가 속한 교회에서도, 더 나아가 사회 전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고쳐야 한다. 제도와 전통, 의식과 형식이 껍데기처럼 굳어 버렸다면,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보수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다. 그 형식과 관습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품고 있었던 근본 정신을 다시 묻고, 회복해야 한다. 개혁이란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본래의 목적과 의미를 되찾는 일이다.

그리고 모든 개혁의 출발점은 언제나 ‘나’ 자신이다. 개혁은 거창한 제도 개편이나 기술적 개선 이전에, 윤리와 도덕의 영역에서 시작된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정신과 영적인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 이미 모두 알고 있는 기본들이다. 근면, 성실, 책임감, 정직, 공정, 자유와 평등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덕목들. 수많은 고전과 사상가들이 시대와 문명을 넘어 반복해서 강조해 온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개혁이란 결국 이 기본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개혁을 말할 때 반드시 경계해야 할 위험이 있다. 나는 오늘 이 지점을 가장 강조하고 싶다. 인간은 홀로 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세대와 세대로 엮여 있다.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생각과 감정, 가치관의 상당 부분은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어린 시절의 교육과 부모 세대, 선배 세대가 만들어 놓은 문화와 전통 속에서 학습된 결과다.

인간은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학습을 통해 인간이 된다. 문화와 교육, 언어와 규범이 없다면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과 관습, 신앙과 제도가 단순한 낡은 잔재가 아니라, 수많은 세대의 시행착오를 거쳐 응축된 지혜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 세대의 유산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실존하는 존재로서, 우리만의 삶의 방식과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이성을 사용해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고칠 것은 고치며, 새롭게 받아들일 것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의 정신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 독립적이고 개혁적인 정신이 오만으로 변질되는 순간, 개혁은 파괴가 된다. 이전 세대의 유산에 무조건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부정하고 허물어 버리는 태도는 지혜롭지 않다. 솔직히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의 삶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전통과 관습, 제도와 신앙은 인간이 합리적이기 때문에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동시에 이기적이고 감정적이며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 장치이기도 하다.

형식만 남은 제도와 의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묻는 질문 없이 제거하는 것은 위험하다. 처음 본 장소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면, 그것을 허물기 전에 왜 그 울타리가 필요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실수를 다른 모습으로 반복할 뿐이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을 비판하며 경고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기존의 질서를 뿌리째 뒤엎는 급격하고 폭력적인 개혁과 혁명은 인간 사회를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보다, 오히려 무질서와 혼란 속으로 빠뜨릴 위험이 크다.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무시한 추상적 이상은, 종종 이전보다 더 비참한 현실을 낳아 왔다.

그래서 개혁은 반드시 점진적이어야 한다. 세대를 거치며 시간의 장벽을 통과해 온 전통과 관습을 존중하되,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잘못된 부분을 끊임없이 고쳐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개혁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품고 있던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이다. 그때에만 개혁은 인간을 살리고, 사회를 성숙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