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보편성을 잃어가는 신앙에 대한

역사의 연구를 읽으며

by 신아르케

유대교와 현대 기독교의 차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다양할 수 있다. 교리, 경전 해석, 예배 방식, 역사적 기원 등 수많은 잣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이 차이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그 기준으로 삼고 싶은 관점은 바로 아놀드 토인비의 문명사관이다.

토인비는 정치나 사회 제도보다 종교가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힘을 지닌다고 보았다. 하나의 문명을 구성하던 정치 체제와 사회 구조는 붕괴될 수 있다. 왕조는 무너지고, 제도는 해체되며, 법과 권력은 다른 형태로 대체된다. 그러나 그 문명을 떠받치던 정신과 의미의 핵심은 종교를 통해 살아남아 전승된다고 그는 보았다. 문명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고통을 해석하던 방식, 곧 종교적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토인비는 문명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집단을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외적 프롤레타리아’로 구분했다. 내적 프롤레타리아란 기존 사회 질서 안에서 구조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체제 안에 있으되 체제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고통 속에 놓인 존재들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치나 혁명보다 먼저 종교에서 삶의 의미와 구원의 언어를 찾는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추구하는 구원이 현실 권력의 전복이나 사회 구조의 강제적 개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세상을 힘으로 뒤엎기보다, 자기 자신을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삶의 의미를 초월적인 차원에서 재정립함으로써, 무너지는 문명 속에서도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붙든다. 토인비가 보기에 종교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문명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

이 관점에서 기독교의 탄생과 확산은 매우 상징적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이 쇠퇴해 가던 시기, 기독교는 제국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 곧 가난한 자, 노예, 여성, 병든 자와 같은 내적 프롤레타리아의 종교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민족이나 혈통이 아니라, 고통과 상실이라는 보편적 인간 경험에 말을 건네는 신앙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로마 제국의 공인을 거치며, 그리고 국교화 과정을 지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소외된 이들의 종교만이 아니게 되었다. 제국의 질서와 결합한 기독교는 점차 통치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고, 사랑과 평등, 정의와 긍휼이라는 본래의 가치는 제도와 권력 속에서 왜곡되기 시작했다. 신앙은 구원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지배의 도구가 되는 양면성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역사에는 끊임없는 되돌아봄과 갱신의 흐름이 존재했다. 종교개혁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교회가 권력과 제도의 중심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기독교는 다시 한 번 자신의 근본을 묻는 과정을 거쳐 왔다. “이 신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것이다.

이제 이 질문은 오늘의 한국 교회 앞에 다시 놓여 있다. 나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당 부분이 ‘기독교의 유대교화’라는 현상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느낀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교화란 유대교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선민화하고, 타자를 배제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우리 교회, 우리 교단, 우리 교리, 우리 지역.”
이 반복되는 ‘우리’라는 말의 이면에는 종종 “우리는 다르다”라는 교만한 자기 구별 의식이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구별은 쉽게 배척과 혐오로 이어진다. 타 민족, 타 문화, 타 사상, 심지어 같은 기독교 안의 타 교파까지도 경계의 밖으로 밀어낸다. 보편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다시 닫힌 공동체의 종교로 수축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순수한 의미의 기독교는 결코 사회의 주류를 대변하는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기존 체계에서 소외되고, 억압받고,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곁에 머무르던 신앙이었다. 기독교가 권력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토인비의 시선으로 본다면, 종교는 문명을 지키는 장식품이 아니라, 문명이 무너질 때 인간을 지켜내는 마지막 언어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가. 체제를 유지하는 언어인가, 아니면 상처 입은 인간에게 의미를 건네는 언어인가.

이 질문 앞에서의 성찰 없이는, 어떤 신앙도 더 이상 참된 종교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