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정확히 본다는 것

by 신아르케

인간은 흔히 스스로를 합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인간의 판단은 이성보다 감정에 먼저 반응하고, 공정함보다는 자기중심성에 더 쉽게 기울어진다. 우리는 논리로 결정한다고 믿지만, 이미 감정이 내려놓은 결론을 뒤늦게 이성으로 정당화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결코 순수하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을 선한 존재라고 단정할 수도, 악한 존재라고 규정할 수도 없다. 인간은 선과 악이 뒤섞인 존재다. 누구나 윤리적 양심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기적 욕망을 품고 살아간다. 협동과 연대를 통해 서로를 돕는 존재이면서도, 경쟁과 비교 속에서 타인을 경계하고 밀어내는 모순을 함께 안고 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존재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사람에게서 쉽게 실망한다. 나 자신에게서, 그리고 타인에게서 완전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함을 기대하는 순간, 실망과 분노는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윤리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인간을 죄악시하거나 경멸하는 태도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위험한 오만일 수 있다.

인간이 보여주는 오만함, 이기심, 허영심, 교만, 시기와 질투, 경쟁심, 욕심, 배척과 소외, 거짓과 잔혹함은 분명 추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 말은 그것들을 정당화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실상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현실을 외면한 이상주의는 사랑을 낳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과 정죄를 키운다.

기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이 말은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비난이 아니라, 인간 모두가 동일한 조건 위에 서 있다는 고백에 가깝다. 누구나 내면에 죄성을 지니고 있으며, 다만 그 영역과 방식, 드러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이 인식이 빠질 때, 신앙은 쉽게 사랑 없는 율법주의로 변질된다. 타인을 평가하고 분류하며, 스스로를 도덕적 심판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태도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평가 절하할 필요도, 과대 평가할 필요도 없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비로소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 전체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가질 수 있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 한 문장은 삶을 대충 넘기기 위한 체념이 아니라, 삶을 오래 견디기 위한 지혜에 가깝다. 인간이기에 어떤 상황에서는 미숙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이유 없이 미워하고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인생을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은 무분별한 허용이 아니라, 경계를 포함한 성숙한 관용의 출발점이 된다.

인간을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기에 실망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기에 미워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인간을 바로 보는 눈은 결국,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