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에 실망하는 이유

by 신아르케

우리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쉽게 실망한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서, 직장에서는 상사에게서, 사회에서는 정치인과 고위 관료에게서,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서 윤리적·도덕적·인격적 실망을 경험한다. 실망의 감정은 때로 분노로 번지고, 분노는 환멸과 냉소로 이어진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가.

그러나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특별한 종족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하나의 무대이고, 사람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연기할 뿐이다. 누군가는 부모라는 역할을, 누군가는 상사나 지도자라는 역할을, 누군가는 목회자나 공직자라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그 역할이 크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까지 자동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역할과 인격은 구별되어야 한다. 큰 권한이 주어진 자리에 서 있는 사람도, 무대 아래에서는 불안하고 미성숙한 평범한 인간일 수 있다. 그들이 원해서든 원하지 않았든 그 자리에 놓였다는 사실은 변명이 아니라 현실이다. 동시에 그것은 면책의 이유가 아니라, 더 큰 책임의 시작이기도 하다. 권한이 클수록 요구되는 윤리적 기준은 분명히 높아져야 한다. 책임은 책임대로 물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권위자에게 느끼는 과도한 분노와 실망의 상당 부분은, 상대방 그 자체보다도 우리가 품었던 비현실적인 기대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권위를 가진 사람을 이상화하고, 이미지화하며, 때로는 우상화한다. 그리고 그 우상이 무너질 때, 분노는 상대를 향하지만 그 뿌리는 우리의 과도한 기대에 있다. 비판의 대상이 된 타인은 원래부터 허물이 많은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특히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 위험에 더 취약하다. 목회자를 신앙적·도덕적으로 과도하게 이상화하고, 그에게 인간을 넘어선 기준을 요구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본 정신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성직자와 평신도의 본질적 차이는 없으며, 모두가 죄인이자 긍휼의 대상이다. 실수와 회개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점에서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 신앙은 쉽게 사랑 없는 율법주의로 변질된다. 타인의 허물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확인하려는 태도는 신앙의 성숙이 아니라 오만의 징후에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을 눈감아 주자는 말은 아니다. 책임은 분명히 물어야 한다. 다만 인간을 신격화하지 말고, 실망의 감정을 관리하며, 판단의 자리에 서기보다 경계와 성찰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권위자를 우상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태도다. 인간을 신처럼 기대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덜 분노하고 더 오래 견딜 수 있다. 그리고 책임과 긍휼을 동시에 붙들 수 있는 지혜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역할보다 크지 않고, 역할은 인간을 대신하지 않는다. 이 단순한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권위 앞에서도 맹목적 기대나 파괴적 분노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된다. 그것이 인간을 바로 보고, 공동체를 건강하게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