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하나이고, 문화는 여럿이다

토인비를 통해 다시 배우는 겸손의 시선

by 신아르케

역사의 연구 2권을 읽으며 처음으로 강한 인상을 받은 개념이 있다. 그것은 문명과 문화는 서로 다른 차원의 개념이라는 통찰이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을 혼용하며, 그 혼용 속에서 우월과 열등이라는 위험한 판단을 쉽게 만들어 낸다. 토인비는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문제 삼는다.

근대 서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생산력과 군사력, 운송과 통신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 변화는 세계사의 중심축을 한동안 서유럽 열강으로 이동시켰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가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현상을 “서유럽 문명이 본질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순간, 역사는 설명이 아니라 자기합리화의 신화가 된다. 토인비가 경계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에 따르면 문명은 특정 국가나 인종이 소유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문명은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해 온 공동의 자산이다. 철학, 과학, 예술, 정치 제도, 기술은 어느 날 한 지역에서 무(無)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지역과 시대가 주고받고, 차용하고, 변형하며 함께 만들어 온 결과물이다. 오늘날 서유럽 문명의 기반이라 불리는 요소들 역시 고대 그리스·로마, 이슬람 세계, 아시아 문명과의 교류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뛰어난 문명”이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큰 오류를 포함한다. 문명은 하나이며, 다만 그 문명을 제도와 힘으로 표준화하고 확장하는 중심이 시대에 따라 이동해 왔을 뿐이다. 한때는 영국과 프랑스였고, 오늘날에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긴장이 세계 질서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영원한 상태가 아니라, 도전과 응전의 역사 속에서 다시 이동할 수밖에 없는 과정일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등장한다. 문명과 달리 문화는 지역마다 다르다. 문화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 지역의 지리, 기후, 역사, 정치적 선택, 집단적 경험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 삶의 형태다. 문화는 비교 우위를 가릴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 사람이 같은 시점에 여행을 떠났지만, 누군가는 산을 오르고, 누군가는 바다를 건너며, 누군가는 숲을 탐험한 것과 같다. 길이 다를 뿐, 그 자체로 우열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비교를 통해 안도하려는 존재다. 우리는 쉽게 타 문화를 평가하고, 재단하고, 서열화한다. 예컨대 오늘날 중국 사회를 바라보며 정치적 통제, 부패, 자유의 제한을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곧바로 “중국 문화는 열등하다”라는 결론으로 도약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제국주의적 사고의 함정에 빠진다. 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가 처한 조건과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결과이지, 다른 사회의 잣대로 단순 재단할 대상이 아니다.

차은우의 얼굴과 신체 조건으로 태어난 사람이, 전혀 다른 조건에서 태어난 사람의 삶의 방식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조건이 다르면 선택의 경로도 달라진다. 문화 역시 그렇다. 이해는 가능하지만, 서열화는 폭력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 자신의 문화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우리 문화에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있다. 그렇기에 필요한 태도는 우월의 선언이 아니라 관찰과 성찰이다. 비교를 통해 이기려는 시선이 아니라, 차이를 통해 배우려는 시선 말이다.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반면교사로 삼되, 문화 그 자체를 함부로 단죄하지 않는 태도—그것이 토인비가 우리에게 요구한 문명적 성숙일 것이다.

문명은 하나다. 그리고 문화는 여럿이다. 이 단순하지만 어려운 명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덜 오만하게, 더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다. 문명의 성취를 독점하려는 태도 대신, 문화의 차이를 존중하려는 겸손—오늘의 세계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양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