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이후에도 남는 것

by 신아르케

사무엘하를 읽다 보면 한 가지 불편한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다윗은 분명 회개했다. 그것도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침상이 눈물로 젖을 정도의 깊은 회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후 삶은 이전과 같지 않다. 오히려 그의 판단은 흔들리고, 그의 가정은 무너지고, 그의 왕국은 균열을 겪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묻는다.
회개는 과거를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남기는 것인가.

다윗의 삶을 따라가 보면, 그의 내면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어렴풋이 보인다.
암논이 다말을 겁탈했을 때, 그는 분노했지만 결단하지 못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을 때, 그는 슬퍼했지만 정의를 세우지 못했다.
압살롬이 돌아온 후에도, 그는 마주하지 않고 방치했다.
그리고 반란 속에서 시므이의 저주를 들을 때, 그는 그것을 단순한 모욕으로 넘기지 않고 자신의 죄를 떠올린다.

이 모든 장면은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의 회개는 진실했지만, 그 죄의 기억 또한 그의 안에 깊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죄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갈림길에 선다.
과거의 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이미 용서받았으니 잊어버리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끝까지 기억하며 괴로워해야 한다고.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죄를 완전히 잊어버리면, 인간은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하기 쉽다.
망각은 때로 보호가 아니라 무감각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디서 무너졌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은, 같은 자리에서 다시 넘어진다.

그래서 죄의 기억은 필요하다.
그 기억은 우리를 낮추고, 우리를 조심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지금의 내가 된 것은 나의 의가 아니라 은혜다”라는 고백은, 바로 그 기억 위에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기억이 방향을 잃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은혜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람을 묶는다.

과거의 죄가 끊임없이 현재를 붙잡고,
결정의 순간마다 주저하게 만들고,
자신을 스스로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책임져야 할 자리에서도 물러서게 만든다.

이때 죄의 기억은 더 이상 스승이 아니다.
그것은 족쇄가 된다.

다윗의 삶에는 이 두 모습이 함께 보인다.
그는 자신의 죄를 잊지 않았고, 그 기억은 그를 낮추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기억은 때때로 그의 결단을 흐리게 만들고,
정의를 세워야 할 자리에서 머뭇거리게 만든 듯 보인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죄는 단순히 한 순간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으로 남고,
그 기억은 성격이 되고,
그 성격은 다시 선택을 만든다.

그래서 회개는 단지 과거를 정리하는 행위가 아니다.
회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과거의 죄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우리를 은혜로 이끌어야 한다.

우리를 더 겸손하게 만들고,
더 신중하게 만들고,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방향이라면
그 기억은 축복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우리를 자기 연민으로 끌어들이고,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게 만들고,
현재의 책임을 회피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건강한 기억이 아니다.

믿음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 붙잡혀 사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과거를 하나님 앞에 두고,
현재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고백 앞에 서게 된다.

나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나는 그 죄에 묶여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구한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게 하는 은혜,
그러나 죄에 눌려 살아가지 않게 하는 은혜.

기억은 남아 있지만,
그 기억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않게 하는 은혜.

그 은혜 안에서만,
우리는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때,
회개는 비로소 삶이 된다.